퇴근길 지옥 만든 ‘버스대란’…서울시 ‘시뮬레이션’ 안 했다
  • 정윤경 기자 (jungiza@sisajournal.com)
  • 승인 2024.01.10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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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뮬레이션 돌릴 프로그램·장비 없어”…의견 수렴도 無
‘표지판 중단’ 이후에도 ‘출퇴근 전쟁’ 지속돼 시민 불편
9일 저녁 6시께 명동 입구 버스 정류장에서 승객들이 광역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시사저널 정윤경
9일 저녁 6시께 명동 입구 버스 정류장에서 승객들이 광역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시사저널 정윤경

서울시가 도입한 광역버스 지정 승차 표지판이 ‘버스대란’을 유발하면서 여론 뭇매 속 열흘 만에 폐지됐다. 승차 표지판 도입 전 시 차원의 ‘시뮬레이션’이나 시민·버스기사 등을 상대로 한 의견 수렴 절차도 거치지 않은 것으로 확인돼 ‘탁상행정’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전망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10일 시사저널과 통화에서 “따로 (시뮬레이션을 돌릴 수 있는) 프로그램이나 장비가 있는 건 아니”라면서 “광역 버스 배차 간격이나 이용객 수를 기준으로 표지판을 도입했다”고 밝혔다. 이어 “이용객 수가 많아 체류 시간이 긴 광역버스는 정류소 앞부분에 배치했다”면서 “뒷부분에 정차 시간이 짧은 노선을 배치해 승객을 태우고 빨리 차선을 변경해 빠져나갈 수 있도록 고안했다”고 설명했다.

표지판 도입 전 의견 수렴 과정에 대해서는 “표지판이 명동에만 있는 것은 아니고, 기사들의 의견을 듣고 정류소에 표지판을 만들지는 않는다”면서도 “표지판 시행 전 운수회사에 미리 안내를 하고 기사들이 정해진 곳에 버스를 정차할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극도의 혼선이 연출된 퇴근 시간대를 포함해 제대로 된 현장 확인 절차 역시 없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표지판이 버스의 ‘열차 현상(버스가 꼬리를 물고 늘어 섦)’을 빚었다는 부작용에 대해 시 관계자는 “시민 질서와 안전을 고려했다”고 말을 아꼈다.

서울 중구 명동과 경기도 성남시를 잇는 9003번 버스가 만석이 된 모습 ⓒ시사저널 정윤경
서울 중구 명동과 경기도 성남시를 잇는 9003번 버스가 만석이 된 모습 ⓒ시사저널 정윤경

“추운 겨울에 밖에서 30분은 떨어야 겨우 탈까 말까”

지난 9일 6시께 찾은 서울 중구 을지로입구 일대 ‘명동입구’ 버스정류장. 표지판이 없어지면서 ‘버스 대란’이 해소된 듯했지만, 여전히 현장에서는 오락가락한 행정으로 혼란스럽다는 반응이 주를 이뤘다.

경기도 수원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는 박아무개(40·여)씨는 “표지판 앞에서 기다리면 되는 줄 알았는데 이제 사라져 버스가 오면 재빨리 뛰어가야 한다”며 “우르르 뛰어가다 사고라도 날까 무섭다”고 토로했다.

30여 분이 지나자 외국인 관광객과 버스를 기다리는 승객, 교통계도요원 등 200여 명이 북새통을 이뤘다. ‘시민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줄서기 표지판 운영을 유예한다’는 내용의 표지판이 붙어 있었지만 여전히 표지판 앞에 줄을 서는 승객도 있었다. 곳곳에서는 “수원 가는 버스는 이곳에서 줄 서나요?”라고 물어보는 소리가 들렸다. 한 정류장에 수십 대 버스가 몰리다 보니, 이날도 버스 20여 대가 줄지어 도로를 메우고 있었다.

경기도 수원시로 향하는 버스를 타기 위해 줄을 서있던 이아무개(50·남)씨는 “기본적으로 30분은 기다려야 버스를 탈 수 있다”며 “출퇴근길이 매일 전쟁”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 지역에 대설주의보가 발효됐다. 아직 녹지 않은 얼음이 도로 곳곳에 있어 자칫 안전사고가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회사원 김아무개(26·여)씨는 “길이 미끄러운데 사람들이 버스를 타려고 뛰다 보니 위험천만한 상황”이라면서 “날도 추운데 하루빨리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1월6일 오후 퇴근길 혼잡으로 시가 긴급 대책을 마련해 운영 중인 '명동입구 광역버스 정류소'를 찾아 현장을 점검하고 있다. ⓒ 연합뉴스
오세훈 서울시장이 1월6일 오후 퇴근길 혼잡으로 시가 긴급 대책을 마련해 운영 중인 '명동입구 광역버스 정류소'를 찾아 현장을 점검하고 있다. ⓒ 연합뉴스

전문가 “정류장 분산해 혼잡도 줄여야”

명동 입구에서 ‘버스 대란’이 벌어진 이유는 출퇴근 시간대 승객이 정류장 한 곳에 집중적으로 몰려서다.

이곳 한 정류장에만 광역버스 29개 노선이 집중돼 있다. 퇴근 시간대가 되면 500대가 넘는 광역버스가 정차한다. 서울 중심부에서 경기 성남시 분당, 용인시 등 경기지역으로 이동하려는 경기도민 다수가 몰리는 이유다. 하루 평균 9500명의 탑승객이 얽히고설키지만, 정류장 폭은 35m 남짓이다.

이날 만난 시민들은 버스 정류장을 분산해 혼잡도를 줄여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전문가들도 버스 노선 조정, 혼잡 통행료 부과 등 서울시가 자구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김정화 경기대 도시교통공학과 교수는 “서울시가 29개 노선이 한 곳에 배치됐을 때 영향력을 검토하지 못했다”며 “같은 시간대에 노선이 몰리지 않도록 조절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수범 서울시립대 교통공학과 교수는 “광역버스 승하차 지점을 분산 배치하거나 지하철역과 연계할 수 있는 노선도를 구상해야 한다”면서 “영국 런던처럼 혼잡한 시간대에 도심으로 진입하는 승용차에 통행료를 부과해 교통 정체를 완화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제언했다.

이와 관련 서울시 관계자는 “수원 방면 4개 노선(M5107, 8800, M5121, M5115)과 용인 방면 1개 노선(5007)의 승하차 위치를 명동 입구 정류소에서 우리은행 종로지점으로 변경하고, 9401 버스는 롯데영프라자로 정차 위치를 옮길 계획”이라면서 “명동 입구 정류소로 진입하는 광역버스 중 5개 내외 노선을 을지로와 종로 방면에서 즉시 회차하거나 명동에서 무정차하도록 조정하겠다”고 밝혔다.

또 “추가적으로 승하차 위치를 조정할 수 있는 노선이 있는지 경기도, 대도시광역교통위원회와 협의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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