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시 대상에서  미국 문화의 주류가 되다
  • 하재근 국제사이버대 특임교수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4.01.26 13:05
  • 호수 1789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징어 게임》 이정재 이어 《성난 사람들》 스티븐 연 에미상 남우주연상 수상
 K팝·K무비·K드라마 이어 K배우 전성시대

최근 미국에서 제75회 프라임타임 에미상 시상식(Primetime Emmy Awards)이 열렸다. 에미상은 기술진과 스태프에게 시상하는 프라임타임 크리에이티브 아츠 에미상(Primetime Creative Arts Emmy Awards)과 감독·작가·배우 등에게 시상하는 프라임타임 에미상으로 나뉘어 진행된다. 우리가 보통 에미상 시상식이라고 부르는 행사는 이 중에서 후자다. 

미국 대중문화계의 4대 시상식이라고 하면 영화계의 아카데미상, 음악계의 그래미상, 연극·뮤지컬계의 토니상, 그리고 에미상을 꼽는다. 에미상은 미국 텔레비전예술과학아카데미가 주관하는 미국 방송계 최고 권위의 시상식으로, 드라마계의 아카데미상이라고 할 수 있다. 

《성난 사람들》의 ‘도장 깨기’ 

이렇게 중요한 시상식이지만 과거 한국에선 에미상이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TV라는 특수성 때문이다. 드라마는 안방극장이라고 할 정도로 각 나라의 국민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내수적 성격이 매우 강하다는 뜻이다. 아무리 미국 영화에 열광하는 한국인이라도 드라마는 한국 드라마를 즐겼다. 미국인도 당연히 미국 드라마를 즐겼다. 그래서 드라마는 국가 간 거리가 매우 멀었고 미국 드라마 시상식에 한국인이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물론 미국 드라마 시상식도 한국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에미상과 한국인은 피차 전혀 상관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오랜 세월을 따로따로 지내왔다. 

그러다 최근에 갑자기 국내에서 에미상 관련 보도가 폭증한 이유는, 에미상이 한국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바로 《오징어 게임》 열풍 때문이다. 지난번 열린 제74회 에미상 시상식에서 《오징어 게임》은 드라마 시리즈 부문 남우주연상(이정재), 감독상(황동혁), 게스트상(이유미), 디자인상(채경선 감독 외), 스턴트상(심상민 무술팀장 외), 특수시각효과상(정재훈 슈퍼바이저 외) 등 6관왕에 올랐다. 

미국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낯선 이역만리 타국의 드라마가 자기들 안방극장 최고 시상식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아카데미상에서 한국 영화가 조명받는 것보다 더 놀라운 사건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드라마는 그 나라 고유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한국 드라마가 미국 에미상의 중심에 설 거라 예측한 사람은 없었다. 이번 75회 에미상도 우리의 비상한 관심을 받았다. 비록 한국 작품은 아니지만, 한국계 미국인들이 주축이 돼 한국계의 이야기를 담아 만든 드라마가 무려 11개 부문 후보로 지목됐기 때문이다. 바로 넷플릭스 드라마 《성난 사람들》(원제 《BEEF》)이다. 

프라임타임 에미상에서 이 작품은 미니시리즈·TV영화 부문 작품상, 감독상, 작가상,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 등을 받았고, 사전에 진행된 프라임타임 크리에이티브 아츠 에미상에서 캐스팅상, 의상상, 편집상을 받아 총 8관왕을 기록했다. 뉴욕타임스는 《성난 사람들》이 ‘이날 밤 미니시리즈 부문 작품상과 감독상, 작가상, 남우·여우주연상을 모두 가져가며 싹쓸이했다(cleaned up)’고 보도했다. 

이 드라마에선 한국계 이민자들의 삶이 배경으로 펼쳐지면서 설렁탕, 깍두기, LG 밥솥 등의 키워드가 등장한다. 한국 냉장고를 사야 한다는 이야기라든가 한인 교회의 모습도 나온다. 주·조연배우 대부분이 한국계 또는 동양계다. 그런 드라마가 75회 에미상의 주인공으로 우뚝 선 것이다. 한류 팽창 연대기는 비현실적인 사건의 연속이다. 

한국계 미국인 감독 이성진이 1월15일(현지시간) 로스앤젤레스 피콕 극장에서 열린 제75회 프라임타임 에미상 시상식에서 넷플릭스 드라마 《성난 사람들》로 감독상을 거머쥐었다. ⓒAP 연합

영어식 이름에서 한국식 이름으로 

감독이자 작가인 이성진 감독은 한국에서 태어나 생후 9개월에 미국으로 이주했고, 초등학교 3~5학년은 서울에서 다닌 후 다시 미국으로 갔다. 그는 원래 영어식 이름인 소니 리(Sonny Lee)를 썼었다. 하지만 봉준호, 박찬욱 감독 등이 그에게 충격을 줬다. 특히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 이후 한국식 이름을 그대로 쓰는 것을 보고 그도 이성진(LEE SUNG JIN)으로 활동하고 있다. “미국인들이 봉준호 감독의 이름을 발음할 때 실수하지 않았다”며 “좋은 작품을 만들면 미국인들도 더는 한국 이름을 듣고 웃지 않고 그 이름을 기억할 거라고 생각했다”고 이 감독은 말했다. 

남우주연상을 받은 스티븐 연(한국명 연상엽)은 1983년 서울에서 태어나 다섯 살 때 미국으로 이주했다. 2010년부터 유명 미국 드라마인 《워킹데드》에 출연하면서 이름을 알렸다. 2017년 봉준호 감독의 《옥자》, 2018년 이창동 감독의 《버닝》으로 영화계에 자리 잡았고, 2020년 한국계인 리 아이작 정(한국명 정이삭) 감독의 《미나리》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동아시아계 배우 최초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 지명이었다. 

스티븐 연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지명됐을 당시 사람들은 놀라운 사건이라고 했었다. 그 전까지 동양인 남성은 서구에서 변방 비주류 정도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카데미 후보 정도로도 놀라운 사건이라고 했었는데 드라마계의 아카데미상이라는 에미상에서 한국계가 2회 연속 남우주연상 수상에 성공했다(이정재, 스티븐 연). 스티븐 연은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도 아시아계 최초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드라마 《성난 사람들》의 스티븐 연이 에미상 미니시리즈·TV영화 부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EPA 연합

《성난 사람들》은 이 밖에도 미국 대중문화 시상식 ‘도장 깨기’를 하는 중이다. 골든글로브에서 남우주연상 외에 TV 단막극 시리즈 부문 작품상과 여우주연상(앨리 웡, 중국-베트남계)까지 총 3관왕을 차지했고, 제29회 크리틱스 초이스 어워즈에서도 작품상,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 여우조연상 등 4관왕에 올랐다. 

지난번 《오징어 게임》 이후 두 번째로 한국계에 의한 도장 깨기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2월에 열리는 미국배우조합상 시상식에도 TV영화·미니시리즈 부문 남우주연상과 여우주연상, 스턴트 앙상블상 등 3개 부문 후보로 지명된 상태이기 때문에 《성난 사람들》의 ‘미국 시상식 도장 깨기 순회공연’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에선 흑인 관련 인종차별 이슈가 심각한 사회문제인데, 아시아계 특히 그중에서도 우리가 좁은 의미의 동양이라고 부르는 동아시아 황인들에 대한 차별적 시각은 그런 사회문제로 거론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심각했다. 흑인은 그나마 미국 사회의 일원이라고 생각하면서 차별 이슈의 주인공으로 거론했던 것인데, 황인들은 무존재감의 국외자, 타자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미국 사회에서 아예 이슈가 되지도 못했던 것이다.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에 출연한 이정재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에 출연한 이정재 ⓒ넷플릭스 제공

서구인보다 작으면서 쌍꺼풀 없는 눈, 윤곽이 또렷하지 않은 얼굴, 작은 체구, 약한 힘 등으로 인해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특히 동양 남성의 외형이 서구 섹시함의 기준과 거리가 매우 멀기 때문에 동양의 여성보다도 남성의 존재감이 더 약했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의 존재감은 더욱 희미했다. 미국 등 서구에서 동양 하면 으레 중국이나 일본을 떠올렸다. 그나마 정말 드물게 한국을 아는 사람이라고 해도, 전쟁의 잿더미 정도를 기억할 뿐이었다. 일본 영화나 중국 영화는 서구 평단의 주목을 받았으나 한국은 그렇지 못했다. 일본과 중국은 서구인들에게 막연한 로망으로, 신비한 정신문명의 고향 정도로 인식됐었는데 한국은 그조차 아니었다. 

그렇기에 한국인 남성 스타가 미국에서 주목받는 건 그저 꿈같은 일이었다. 동양인 자체가 미국 영화 속에선 무술인, 웃기는 감초, 괴짜, 신비한 사람, 이런 정도의 정형화된 캐릭터로만 그려졌다. 스티븐 연은 과거에 “미국에서 동양인 배우 역할은 ‘스테레오 타입’이 있다”고 말했다. 

싸이가 놀라운 성공을 거두면서 반전이 시작됐다. 하지만 그때까진 아직 ‘웃기는 캐릭터’였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아이돌계에서 일이 벌어졌다. 빅뱅 같은 팀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더니 방탄소년단 사태가 터졌다. 한국 남성이 백인 사회의 우상 대접을 받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방탄소년단은 새 시대의 섹시한 남성상이 됐다. 남성 이미지가 상승했다는 건 모든 한국인의 위상이 올라갔다는 뜻이다. 동양 남성 이미지의 상승이 가장 어려웠기 때문이다. 

방탄소년단 ⓒ빅히트 뮤직 제공
방탄소년단 ⓒ빅히트 뮤직 제공

“K 붙으면 섹시한 것으로 간주” 

마침 할리우드에 다양성 바람이 불면서 《기생충》 같은 한국 작품도 주목받았다. 하지만 미국은 윤여정에게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주면서도 남우주연상에는 마지막까지 인색했다. 《기생충》 송강호는 아카데미 후보 지명조차 받지 못했다. 그러다 결국 이정재, 스티븐 연이 연이어 에미상 남우주연상을 받기에 이른 것이다. 한국인, 한국계가 더는 미국에서 ‘무존재감의 타자’가 아니라는 뜻이다. 

한때 멸시의 대상이었던 김치, 조롱의 대상이었던 젓가락도 이젠 존중받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미국인들이 봉준호라는 한국식 이름을 정확히 발음하려고 노력하게 된 것이다. 한국이 새로운 문화적 대세라는 인식까지 생겨났다. 포브스는 2019년 “한국은 지난 10년간 K팝, K드라마, K영화의 수출로 인해 인기와 문화적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며 “기본적으로 K가 붙은 것은 섹시한 것으로 간주된다”고 했다. 

이성진 감독은 “할리우드가 정말 많이 바뀌었다. 제가 데뷔했을 때는 ‘어떻게 하면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글을 쓸까’ 고민했지만 이젠 아니다”면서 “K팝, K드라마, K영화뿐 아니라 한국인의 집단적 경험 자체에 대해 관심이 많다.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을 숨기지 말고 그대로 표현하라”고 말했다. 

한국, 한국계 콘텐츠와 인물이 지속적으로 미국 사회에서 사랑받게 되면 한국이라는 나라 자체에 대한 호감이 커질 것이다. 그것은 한국의 모든 산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한국 콘텐츠와 스타를 통해 한국에 대해 로망을 품게 되고, 한국인의 입장에 공감하게 되고, 한국인과 동일시하게 된다. 즉, 한국을 타자가 아닌 ‘우리’라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런 흐름이 강해지면 한국의 위상은 그 어느 때보다도 탄탄해질 수 있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