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놀란, 이번엔 아카데미 트로피 거머쥘 수 있을까
  •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4.03.01 13:00
  • 호수 17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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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펜하이머》, 13개 부문 노미네이트되며 최고 화제작 입증
한국계 셀린 송 감독 《패스트 라이브즈》는 작품상·각본상 후보

3월이다. 학생들에겐 새 학기가, 새내기들에겐 입학이, 그리고 영화계엔 아카데미 시상식이 기다린다. 아카데미 시상식은 비록 ‘로컬영화제’지만,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영화 애호가들이 주목하는 축제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수상한 이후 우리에게도 부쩍 가깝게 느껴지는 무대이기도 하다. 올해에도 한국계 캐나다 감독 셀린 송의 《패스트 라이브즈》가 작품상 후보에 올라 눈길을 끈다. 3월10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되는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관전 포인트를 살펴봤다. 

《오펜하이머》의 한 장면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크리스토퍼 놀란, 이번엔 받나요? 

스타들 사이에 ‘연예인들의 연예인’이 있듯, 작품들 사이에도 ‘화제작 중 화제작’이 있기 마련이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 최고의 화제작은 단연 이 영화,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펜하이머》다. 작품상을 비롯해 감독상, 남우주연상(킬리언 머피), 남우조연상(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여우조연상(에밀리 블런트), 촬영상, 편집상, 의상상, 분장상, 음악상, 프로덕션 디자인상, 음향상 등 13개 부문에 이름을 올리며 최다 노미네이트의 주인공이 됐다. 아카데미 전초전으로 통하는 골든글로브는 물론 아카데미 회원 다수가 소속된 미국감독조합상(DGA), 미국제작자조합상(PGA) 등에서 최고상을 휩쓸며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린 상황이다. 

《오펜하이머》가 이름을 올린 13개 부문 중, 수상 여부가 가장 궁금한 건 역시나 작품상과 감독상. 그러니까 크리스토퍼 놀란의 수상 여부다. 놀란은 전 세계에서 가장 잘나가는 파워맨으로 존재감을 발휘하는 감독이지만, 오스카와는 희한하게도 인연이 없었다. 특히나 마스터 피스로 평가받은 《다크 나이트》(2008)가 히어로물이라는 편견 속에서 작품상과 감독상 후보에조차 오르지 못한 건, 아카데미의 실수 중 하나로 평가받기도 한다. 

뭐, 오스카 상복이 없었던 감독이 크리스토퍼 놀란이 처음은 아니다. 대표적인 이가 마틴 스코세이지다. 다섯 번 감독상 후보에 오르고 빈손으로 돌아갔던 스코세이즈는 6번의 도전 끝에야 2007년 《디파티드》로 트로피를 거머쥔 바 있다. 이후에도 꾸준히 감독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던 스코세이지는 올해에도 어김없이(?) 《플라워 킬링 문》으로 해당 부문에 노미네이트됐는데, 이번 행보로 ‘현존하는 영화감독 중 가장 많이 감독상 후보에 지명된 감독’에도 등극했단다. 여러모로 대단한, 감독이다. 

 

디카프리오, 없다! 

《플라워 킬링 문》은 감독상 외에도 10개 부문에 지명되며 올해 오스카에서 존재감을 과시할 예정이다. 이 와중에 주연배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지 못한 건 반전이다. 디카프리오는 2016년 《레버넌트》로 4전 5기의 도전 끝에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바 있는데, 그때 운을 다 쓴 건지 이후 좀처럼 아카데미와 인연을 이어가지 못하고 있다. 

디카프리오 없는 남우주연상 부문은 《마에스트로 번스타인》 브래들리 쿠퍼, 《러스틴》 콜먼 도밍고, 《바튼 아카데미》 폴 지아마티, 《오펜하이머》 킬리언 머피, 《아메리칸 픽션》 제프리 라이트가 경합을 펼친다. 가장 유력한 수상 후보는 《오펜하이머》의 킬리언 머피다. 이미 각종 영화제에서 트로피를 들어올리며 ‘시상식 킬러’로 활약 중이다. 강력한 후보라면 《바튼 아카데미》에서 자기만의 세상에 사는 괴짜 역사 선생님을 맡아 마음을 울리는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 폴 지아마티. 이 배우에게 수상이 돌아간다고 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을 것이다. 

 

‘바비’ 없는 ‘켄’ 

페미니즘 영화 《바비》가 개봉됐을 때 우스갯소리로 했던 이야기. “설마 오스카에서 바비의 남자친구 ‘켄’을 연기한 라이언 고슬링만 연기상에 노미네이트되고, 정작 바비를 연기한 마고 로비와 감독 그레타 거윅은 후보에 오르지 못하는 거 아니야?” 우스개로 한 이야기가 현실이 됐다. 라이언 고슬링이 남우조연상 후보에 올랐지만, 마고 로비와 그레타 거윅은 여우주연상과 감독상 후보에서 누락됐다. 물론 여우주연상과 감독상 후보에 오르지 못했을 뿐, 《바비》는 남우조연상과 작품상, 여우조연상(아메리카 페레라), 각색상, 의상상, 주제가상, 프로덕션 디자인상 등 8개 부문 후보에 이름을 올렸으니, 낙담만 할 필요는 없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라이언 고슬링의 마음이 편할 리 없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성명서를 통해 “훌륭한 영화가 많이 개봉한 해에 동료들과 함께 후보에 올라 영광스럽게 생각한다”면서도 “바비 없는 켄은 없고, 역사적으로 유명한 이 영화에 가장 책임이 있는 두 사람인 그레타 거윅과 마고 로비가 없는 ‘바비’도 없다”고 실망감을 표했다. 이제 궁금한 건 라이언 고슬링이 과연 주제가상에 오른 《바비》의 주제곡 《아임 저스트 켄》을 오스카 무대에서 부를 것인가 여부다. 라이언 고슬링의 평소 성정에 비춰볼 때 ‘안 부른다’에 한 표를 던지려고 했는데… 그가 부른다는 소식이 방금 외신을 통해 전해졌다. 정말 그는 노래를 부를까. 

 

국제영화제 끌어안은 로컬시상식 

“아카데미=로컬시상식!” 한때, 해외 SNS에서 크게 화제가 된 봉준호 감독의 말이다. “한국 영화는 지난 20년 동안 큰 영향을 미쳤음에도 왜 단 한 작품도 오스카 후보에 오르지 못했냐”는 외국 기자의 질문에 대한 봉준호의 유머 섞인 쿨한 답이었는데, 그것이 대중에게 은근한 통쾌함을 선사하며 인터넷 세상을 유영했었다. 이 발언에 대한 대중의 환호가 콧대 높은 오스카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는 수치로 확인할 수 없지만, 영향을 아예 안 준 것 같지는 않다. 《기생충》에 작품상을 안긴 이후 아카데미가 1인치의 장벽을 뛰어넘는 행보를 꾸준히 보여주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올해에도 이런 경향이 작품상 후보에서부터 드러난다. 

먼저 작품상을 비롯해 12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된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가여운 것들》은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이다. 또 다른 작품상 후보인 쥐스틴 트리에 감독의 《추락의 해부》는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고, 조나단 글레이저의 유럽 합작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작이다. 그러니까,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로컬영화상’이 ‘국제영화상’ 수상작도 대거 품는 모양새가 된 셈이다. 물론 여기엔 투표권을 쥔 아카데미 회원에 유색인종 수를 점진적으로 늘려온 오스카의 행보와도 무관하지는 않은데, 어찌 됐든 세계 3대 영화제의 자존심 대결을 아카데미 무대에서 보게 된 건 영화팬들 입장에선 흥미로운 일이다. 

 

OTT 선전은 지속될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의 등장이 바꾼 건 극장 관람문화만이 아니다. 오랜 역사를 자랑해 온 아카데미 시상식 문화도 OTT로 인해 많이 바뀌었다. 2022년엔 애플TV플러스 《코다》가 아카데미 최고상인 작품상을 비롯해 3관왕에 오른 건 콘텐츠 시장 변화를 의미심장하게 보여준 장면이기도 했는데, 올해에도 OTT 작품들이 대거 후보에 노미네이트 됐다. 애플TV플러스는 《플라워 킬링 문》을 통해 《코다》에 이어 작품상 수상을 노리고, 넷플릭스는 브래들리 쿠퍼가 연출하고 주연한 《마에스트로 번스타인》로 작품상,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캐리 멀리건), 각본상, 촬영상, 분장상, 음향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각본상 후보에 오른 토드 헤인즈의 《메이 디셈버》 역시 넷플릭스 영화다.

《패스트 라이브즈》의 한 장면 ⓒCJ ENM 제공
《패스트 라이브즈》의 한 장면 ⓒCJ ENM 제공

《패스트 라이브즈》, 한국과의 인연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패스트 라이브즈》를 통해 한국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CJ ENM과 할리우드 스튜디오 A24가 공동으로 투자 배급한 작품으로 한국에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두 남녀가 20년 만에 미국 뉴욕에서 재회하는 이야기를 그렸다. 한국 배우 유태오와 한국계 미국인 배우 그레타 리가 주연을 맡았다. 참고로 셀린 송 감독은 송강호 배우의 “배~배신이야 배신!” 대사로 유명한 《넘버 3》(1997)를 연출한 송능한 감독의 딸이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한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아버지를 따라 캐나다로 이민 간 셀린 송 감독의 삶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그녀의 삶에 영향을 미친 가족사가 적잖이 스며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나 저러나, 데뷔작으로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과 각본상에 오른 딸을 보며 송능한 감독은 무슨 생각을 할까. 기분 좋은 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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