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 달 만에 환호에서 탄식의 대상으로 바뀌어버린 ‘남미의 트럼프’
  • 정덕주 남미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4.03.02 10:00
  • 호수 17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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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밀레이 대통령 취임 후 물가 불안 더 가중
살인적 인플레이션 견뎌내는 국민 인내심 한계 다다라

‘남미의 트럼프’라 불리며 지난해 10월 아르헨티나 대선에서 55.65%의 득표율로 새 대통령에 당선된 하비에르 밀레이. 극우 자유경제주의자로 혜성처럼 정치판에 나타나 고성과 기이한 언행을 보였음에도 살인적인 고물가 등 경제 파탄에 이른 아르헨티나의 마지막 희망으로 떠오르며 아르헨티나의 민심을 사로잡았다. 대통령 취임 후 3개월이 흐른 지금, 기상천외했던 그의 공약들은 얼마나 실현 가능성을 보이고 있을까. 그리고 아르헨티나 경제난과 국민의 불안감은 얼마나 개선되고 있을까.

1월24일(현지시간)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밀레이 인형을 들고 밀레이 정부의 경제 및 노동 개혁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AP 연합

생필품인 식음료 구매까지 줄여나가는 실정

밀레이가 대통령에 취임한 후 첫 번째로 단행한 조치는 아르헨티나 화폐인 페소(Peso) 가치의 평가절하였다. 하루아침에 정부 공식 달러는 1달러 366페소에서 800페소가 되었다. 이로써 달러 대비 페소의 가치는 50% 이상 평가절하되었다. 아르헨티나에는 현재 정부 공식·비공식(블루달러)·관광객·크립토 달러 등 약 15가지 종류의 달러 환율이 난립하고 있다. 이는 아르헨티나 경제 혼란의 주범이 되고 있다. 전 정부인 페르난데스 정권 시절까지만 해도 정부 공식 환율과 비공식 환율의 차이가 무려 100% 이상 났다. 취임 이틀 만에 내린 밀레이의 페소 가치 평가절하 정책에 힘입어 현재 공식과 비공식 달러의 환율 차는 20% 정도로 좁혀졌다. 하지만 국민의 불안감을 해소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밀레이는 지난해 대선 캠페인 내내 자신의 얼굴이 새겨진 커다란 모형 달러 지폐를 펄럭이며, 당선되면 가치가 바닥을 치는 폐소 대신 미국 달러를 공식 화폐로 사용하겠다는 파격적인 공약을 내걸었다. 1인당 월평균 200달러만 구매할 수 있었던 규제와 15개 환율의 난장판 속에 살던 국민은 열광했다. 개인적으로는 더 이상 해외여행을 위해 또 해외 직구를 위해 공식 환율의 배가 넘는 암달러 시장을 찾을 필요도 없고 기업들은 수출입 시 달러 송금의 복잡하고 어려운 규제에서 해방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졌던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밀레이 대통령의 ‘달러화’ 공약은 한 뼘의 진전도 없는 상태다.

오히려 물가 불안은 더 가중되고 있다. 이전 페르난데스 정권에선 서민의 기본 장바구니에 해당하는 기초 식료품과 생필품에 대해 ‘공정가격’이라는 정책을 통해 가격을 규제한 탓에 일부 품목은 그나마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을 피해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밀레이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 정책은 중단되었고, 서민의 장바구니도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의 직격탄을 맞게 되었다. 밀레이 대통령 취임을 전후한 지난해 12월 한 달 동안에도 현지 인플레이션은 25.5%였으며 올해 1월은 20.6%였다. 레바논과 베네수엘라를 제치고 세계 최고 지수를 기록한 아르헨티나의 전년 동기 대비 1월 인플레이션은 254.2%에 달했다. 이는 현지에서도 30여 년 만에 최고치로 기록된다. 밀레이 정부는 중산층을 무너뜨리고 서민층을 빈곤층으로 전락시키는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을 아직까지도 잡지 못하고 있다.

에너지 공공요금인 전기와 가스비에 대한 정부 보조금도 차차 줄여나가다 철회할 예정이다. 정부의 에너지 분야 요금 규제가 느슨해진 틈을 타 전기회사는 최근 요금을 65~150% 인상했다. 밀레이 정부는 에너지 공공요금에 대한 지원금 감소를 목표로 지난주 가족 구성원 중 5년 미만의 자동차나 오토바이를 소유한 가정의 경우 보조금 철회를 고려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지난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이용이 늘어났던 배달앱에서 일하기 위해 생계형 차량과 오토바이를 구매한 서민들은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 또한 정부의 교통 관련 공공 지원금 감소로 인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경우 교통요금이 새 정부 출범과 함께 4배 넘게 인상되며 서민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다.

취임 이후 경제위기 탈출을 위해 고강도 충격 요법의 구조 개혁과 긴축 정책을 택한 밀레이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공공지출 삭감, 임대료 제한법 폐지, 대통령 권한 강화 등을 담은 366개 조항의 ‘메가 대통령령’과 경제, 재정, 연금, 비상사태 시 선거, 행정 개편 및 공중보건 등과 관련된 664개 조항의 ‘옴니버스법’을 내놓았다. 이런 조치가 국민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유인즉 관련 조항에 한해 2025년까지 의회의 권한을 한시적으로 대통령에게 이양할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의회 동의 없이 모든 권력을 휘두르는 독재자가 되려는 게 아니냐는 의심이 확산되면서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이렇듯 대중교통 및 에너지 요금 인상 및 보조금 철회, 여전히 계속되는 살인적 인플레이션, 페소의 평가절하 그리고 실질 가계소득 하락 등 모든 요소가 오히려 빈곤층 증가와 중산층 몰락을 가져왔다. ‘메가 대통령령’ 조항인 임대료 제한법 폐지로 2023년 임대료는 260% 상승했다. 민간 의료보험비는 지난 2개월 동안 약 80% 인상되었다. 아르헨티나 중소기업 연맹은 페소의 평가절하 정책 이후 지난해 12월 매출은 2023년 전반적인 수준에서 13.7% 감소했는데 이 중 식음료가 전년 동기 대비 19.8%나 감소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즉 국민이 경제위기를 맞아 생필품인 식음료 구매까지 줄여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수치를 조작하는 정부 산하기관인 통계청보다 오히려 더 신뢰를 받고 있는 가톨릭대학 ‘사회부채연구소’의 발표에 따르면, 밀레이 대통령 취임 후 아르헨티나 1월 빈곤율은 57.4%이며 이는 20년 만에 가장 높은 수치라고 전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빈곤율 49.5%에서 한 달여 만에 빈곤자 수가 크게 증가한 것으로, 현재 아르헨티나에선 약 2700만 명이 빈곤자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이 중 15%는 기본적인 끼니도 때우기 어려운 극빈자 계층이라고 발표했다.

 

막말과 원색적 비난으로 소통 부재 드러내

밀레이 대통령에게 실망한 부분은 또 있다. 대선 유세 때 자신들의 특권을 지키려 국민에게 해를 끼치는 기성 정치인들을 싸잡아 ‘카스트’라 칭하며, 전기톱을 휘두르면서 그들을 모조리 제거하겠다고 외쳤고, 이에 국민은 그의 전기톱 모터 소리에 환호했다. 하지만 라틴아메리카 전략센터에 의하면 현재 밀레이 정부의 고위 공직자 78명 중 55명은 이미 이전 정부에 적을 두었던 소위 ‘카스트’라고 지적했다. 그의 ‘카스트 종식’ 약속은 거짓이었던 것이다.

지난해 말까지 밀레이 대통령의 인기는 연예인에 버금갔다. 하지만 최근 한 컨설팅 회사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56%에 육박하는 득표율로 당선된 밀레이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이 매달 조금씩 하락해 취임 3개월 만에 약 7~9%의 지지율을 잃었다고 밝혔다. 과반 이하인 40%대로 추락한 것이다.

밀레이 대통령은 새 정부의 개혁과 발전 과정이 “35년 안에 아르헨티나를 강대국으로 만들 성장의 길”로 보상받을 것이며, 이에 대한 첫 번째 결과가 “15년 안에” 나올 것이라고도 주장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제안하는 정책이 실행되지 않으면 아르헨티나는 “비참한 나라”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물론 만성적인 경제위기에 빠진 아르헨티나를 구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며, 짧은 시간 안에 이뤄질 일도 아니다. 또 여소야대 국회에서 밀레이 정부의 정책을 마음껏 펼치기도 결코 쉬운 상황이 아니다. 하지만 밀레이 대통령은 자신의 의견과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편을 향해 원색적인 비판을 쏟아내고, 정책이 승인되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으로 국회를 ‘쥐들의 소굴’이라고 혐오하면서 소통의 부재를 보여주고 있다.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을 견뎌내며 소통 부재 대통령의 긴축 정책을 바라보는 아르헨티나 국민의 인내심의 최대 한도는 과연 언제까지일지를 현지 언론들은 살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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