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관이라는 또 하나의 소중한 별이 사라졌다
  • 강헌 음악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1.05 16:00
  • 호수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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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헌의 하이브리드 음악 이야기]
한국 대중음악계에 퓨전 바람 불러일으켰던 봄여름가을겨울

한 해에도 백만 명이 넘는 청년들이 온갖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도전하지만, 그들 중에서 스타가 탄생하기란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 엄연하고도 엄연한 현실이다. 더군다나 보컬리스트가 아닌 연주자가 스타로 뜨는 것은 이제 기적이라 불러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한국 대중음악 스타덤의 모든 영광은 마이크를 들고 카리스마를 자랑하는 보컬리스트들이 독차지하는 세상이 됐다.

방탄소년단 이슈로 한 해가 도배됐던 2018년이 저무는 순간, 우리는 작지만 의미심장했던 하나의 별이 떨어졌다는 부고(訃告)를 받았다. 아직 환갑이 채 되지 않은 ‘젊다면 젊은’ 드러머가 세상을 떠났다. 바로 한국 대중음악계에 ‘퓨전(fusion)’이라는 바람을 몰고 온 봄여름가을겨울의 두 멤버 중 한 사람, 전태관이다.

한국 퓨전음악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우리는 김현식과 대면하게 된다. 1980년 광주, 그리고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가 우리 정치사와 대중음악사의 비극과 희망의 연대기를 막 기술하기 시작할 무렵 김현식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저주받은 걸작을 안고 데뷔의 문을 통과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주목하지 않았고, 그는 두 번째 앨범을 낼 때까지 5년간을 침묵해야 했다. 그러나 그가 《사랑했어요》를 담은 2집과 《비처럼 음악처럼》을 내세운 3집을 연속적으로 성공시키며 언더그라운드의 맹주로 부상하면서 음악 후배들로 구성됐던 그의 백 밴드에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통한의 이름을 붙였다. 그중의 두 구성원인 김종진과 전태관이 그 이름을 안고 독립해 1980년대 말 퓨전 밴드의 기수가 됐음은 한국 대중음악에 조금만 관심 있는 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봄여름가을겨울 전태관(오른쪽)과 김종진이 1991년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연합뉴스
봄여름가을겨울 전태관(오른쪽)과 김종진이 1991년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연합뉴스

김현식,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밴드의 시작

이 1980년대 거물 백 밴드는 두 개의 주목할 만한 퓨전 밴드를 낳는 자궁이었다. 즉 기타리스트와 드러머가 봄여름가을겨울이 됐고, 베이시스트 장기호와 키보드의 박성식(김현식의 대표작 《비처럼 음악처럼》의 작곡자)은 빛과 소금이 됐다. 

퓨전은 재즈와 록이라는 두 개의 흑백 혼합문화가 거대하게 충돌한 1960년대 자유주의적 실험정신의 소산이다.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음향 경험이었던 이 새로운 대중음악의 양식은 1970년대와 1980년대를 지나면서 전통적인 경계를 넘어서려는 모든 시도를 정당화하는 한편, 실험이라는 무거운 화두로부터 점점 범용적인 경쾌함으로 변화하면서 새로운 사회적 배경음악(BGM)으로서의 영향력을 넓혀 나갔다. 새로운 문화의 주체로 떠오른 대도시의 여피족(yuppies·고등교육을 받고 도시 근교에 살며 전문직에 종사하고 고소득을 올리는 젊은이들)은 이 세련된 음악의 가장 큰 지지층이 돼 줬다. 

재즈의 자유분방한 스윙 감각과 로큰롤의 전기 증폭에 의한 에너지를 적절히 순화하면서, 그리고 무소불위의 사운드 조립 공장인 신서사이저의 발전이 가세하면서 퓨전은 중산층의 대표적인 음악 언어로 자리 잡았다. 그리하여 이 새로운 선율과 리듬의 물결은 지구 반 바퀴를 돌아 이 땅에 상륙했고, 트로트와 발라드, 댄스뮤직으로 구성된 빈약한 주류 음악의 아성을 위협하는 작은 대안이 됐다.

40년이 가깝도록 함께해 온 김종진과 전태관의 족적은 의미심장하다. 이 연주자 듀오는 다양한 개성이 백가쟁명으로 폭발하던 1988년에 《항상 기뻐하는 사람들》 《거리의 악사》 《12월 31일》 같은 연주곡을 전면에 내세운 충격적인 데뷔 앨범으로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스타덤에 합류했다. 그리고 뒤이은 1989년, 연주곡 《나의 아름다운 노래가 당신의 마음을 깨끗하게 할 수 있다면…》을 첫머리에 놓는 신선한 아이디어와 《어떤 이의 꿈》 《열일곱 그리고 스물넷》을 브라운관의 도움 없이 대히트시켰다. 두 번째 앨범 만에 새로운 무늬를 우리 대중음악계에 심은 봄여름가을겨울은 이후 두 장의 앨범을 미국에서 녹음하는 의욕과 라이브에 대한 지속적인 열정으로 완성도와 성공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쾌거를 이뤘다. 다시 말해 이들의 성공이 소중했던 이유는 음악전문 매체랄 수 있는 심야 FM, 싱글이 아닌 앨범 중심의 완성도, 브라운관이 아닌 라이브 콘서트의 성공이라는 ‘골든 트라이앵글’의 합작으로 이뤄진 것이라는 점이다. 

봄여름가을겨울 전태관(오른쪽)과 김종진이 1991년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연합뉴스
전태관(오른쪽)과 김종진은 30년 동안 우정을 나눈 ‘음악 동지’였다. © 연합뉴스

8장의 앨범, 한국 대중음악의 절정 수놓아

물론 이들의 성공은 송홍섭을 좌장으로 하는 막강 동아기획 사단의 출중한 연주가들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세 번째 앨범부터 김종진과 전태관은 완벽한 홀로 서기를 시도한다. 미국 스튜디오의 관악기 세션을 고용해 보다 강인하고 치밀한 텍스튜어를 조직, 점점 높아지는 고급 수용자들의 요구에 부응한다. 그리하여 이제는 이른 유작이 돼 버린 2008년의 8집 《아름답다, 아름다워!》에 이르며, 클래식의 영역까지 커버해 내는 이들의 무르익은 역량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모두 여덟 장에 이르는 이들의 정규 앨범은 한국 대중음악의 절정기가 토해 낸 아름다운 디스코그래피다. 그리고 동시에 이 앨범들은 진정으로 음악을 사랑한 자들과 바로 그들을 사랑한 많은 대중들 사이에 놓인 예술적 소통의 기념비다. 

나는 데뷔 시절부터 베테랑이 된 2000년대 이후의 뜨거웠고 화려했던 이들의 무대를 존중한다. 거기엔 진솔한 음악인이, 진짜의 사운드가, 진정한 음악이 흘렀다. 트렌드의 변천과 함께 이들이 스타덤의 뒤안으로 밀려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쇼 비즈니스의 숙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대에 오른 이들의 표정이 어두웠던 적은 없다. 수많은 이합집산으로 어지러운 밴드계에서 이들은 변치 않고 반세기 가까운 음악적 우정을 쌓았으며 그 연대감은 보는 우리를 따뜻하게 만들었다. 

큰 바위 얼굴처럼 언제나 환한 미소를 동반하며 넉넉한 품격을 보여줬던, 그러나 스틱을 잡는 순간부터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는 검객으로 탈바꿈하는 전태관의 그 모든 움직임이 그립다. 우리는 또 하나의 소중한 별을 잃었다. 그 상실이 더 슬픈 것은 이들의 후속 주자들이 불투명하다는 암울한 현실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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