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지지 않는 佛 ‘노란조끼’, 오히려 기름 붓는 마크롱
  • 최정민 프랑스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1.14 14:00
  • 호수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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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 선회 프랑스 정부 - 재점화된 노란조끼 ‘치킨 게임’

지난해 12월31일, ‘노란조끼’ 집회로 홍역을 치르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신년사가 프랑스 전역의 전파를 탔다. 근엄한 모습으로 책상에 앉아 발표를 하던 전통적인 방식이 아니었다. 마크롱은 곧게 선 채로 역동적인 제스처와 함께 16분간 열변을 토했다. 프랑스 시사주간지 ‘렉스프레스’의 편집인 크리스토프 바르비에는 올해 신년사를 두고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라고 해석했다. 내용 면에서도 강경함이 돋보였다. 신년사의 골자는 ‘정부 주도의 개혁의지에 대한 재확인’이었다. 지난해 12월10일, 날로 거세지는 노란조끼 시위대를 진정시키기 위해 최저임금 인상과 사회보장세 증세 철회 조치 등 100억 유로(13조원)에 이르는 달래기에 나섰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기조였다.

대통령의 입장이 분명해지자 정부도 거들고 나섰다. 벤자민 그리보 프랑스 정부 대변인은 1월4일 새해 첫 각료회의 후 기자회견에서 노란조끼 시위대를 두고 “전복을 원하는 선동세력”이라고 못 박기도 했다. 연말연시를 지나며 노란조끼 시위대의 불길이 어느 정도 잡혔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아마추어 정부’라는 오명답게, 정부의 판단 착오가 드러나는 데는 채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각료회의 이튿날 열린 노란조끼의 8차 집회는 정부의 예상을 뒤엎고 대규모 과격시위로 진행됐다. 감소하던 집회 참가자 수도 반등했다. 이날 전국적으로 5만여 명이 집회에 참여한 것으로 추산됐으며 파리에만 3500여 명이 집결했다. 더구나 일부 시위대는 대변인 그리보의 공관 정문을 지게차로 들이받기도 했다. 당시 공관에 있던 그리보는 동료들과 함께 급히 뒷문으로 피신한 것으로 전해졌다.

프랑스 정치 평론가 알랭 뒤마엘은 사태 이틀 뒤 BFM TV에 출연한 자리에서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증오가 발견됐다”고 우려를 표하며 조속한 정치적 해결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1월5일(현지 시각) 파리 등 프랑스 전역에서 제8차 노란조끼 집회가 열렸다. ⓒ AP 연합
1월5일(현지 시각) 파리 등 프랑스 전역에서 제8차 노란조끼 집회가 열렸다. ⓒ AP 연합

토론 책임자 고액연봉 논란, 시작부터 삐걱

현재 마크롱 정부가 내놓은 대책은 1월15일부터 3개월간 진행될 ‘국민 대토론회’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마크롱은 이미 신년사에서 “빠른 시일 안에 국민들에게 의견을 전할 것”이라고 예고한 바 있다. 그러나 국민 대토론회에 대한 노란조끼 시위대의 반응은 냉랭하다.

현재 노란조끼 시위대가 공개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은 ‘국민투표’다. 유류세 인상 등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과 의회를 장악한 정부·여당의 시각이 크게 다른 상태이기 때문에 국민투표로 명백히 의견을 묻자는 것이다. 반면 마크롱 정부는 국민투표에 반대하며 오직 토론회를 통해 여론을 설득하겠다는 전략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전망은 비관적이다. 정부가 아무리 토론회 멍석을 깔아 봐도 노란조끼 시위대가 참여를 거부하면 더 손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국민투표 실시 여부뿐 아니라 부유세 부활 등 주요 사안마다 정부와 노란조끼 시위대의 입장차가 팽팽한 만큼 대화를 통한 조율이 가능하겠냐는 회의감도 커지고 있다.

더구나 토론회 책임자로 임명된 상탈 주아노 전 체육부 장관의 임금이 대통령 수준으로 책정된 사실이 밝혀지면서 다시 한번 논란에 불을 지피기도 했다. 프랑스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토론회를 맡은 대가로 그가 받게 될 월급은 1만4666유로(약 1800만원) 선이다. 연봉으로 따지면 17만 유로(약 2억2000만원)에 이르는 고액이다. 

프랑스 앵포 채널 방송에 출연한 주아노 전 장관은 월급이 지나치게 많은 것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것은 국가에 의해 결정된 것”이라며 “얼마든지 재검토가 가능하다”고 답했다. 그러나 SNS에는 ‘토론회는 시작 전부터 정신이 죽었다’ ‘마크롱주의자들은 대단하다’ 등 비난 댓글이 쏟아지고 있다. 논란이 수그러들지 않자 1월8일 저녁, 주아노는 전격적으로 사퇴를 표명했다. 대통령이 야심 차게 제시한 대화 테이블이 시작 전부터 휘청거리고 있는 것이다.


경찰 폭행 전직 복서에 1억5000만원 모금

1월5일 8차 집회에서 경찰을 폭행하는 전직 복서까지 등장하는 등 더욱 충돌이 거세지자, 이틀 후인 7일 에두아르 필리프 총리는 9차 집회를 대비해 파리에 5000명, 전국에 총 8만 명 규모의 공권력을 배치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또한 ‘과격시위자들’을 엄중하게 단속하는 법안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총리의 발표 직후 노란조끼의 주요 참가자 중 하나인 다비드 게앙은 “시위대의 요구엔 답이 없으면서, 강격 대응책 마련에는 즉각적”이라며 “정부가 불길에 기름을 붓고 있다”고 경고했다. 경찰 내부에서도 총리의 강경책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알랙산드라 랑글루아 경찰노조 대표는 “정치적, 사회적 문제를 공권력으로 해결하려 하고 있다”며 “경찰은 더 이상 예전처럼 일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매주 토요일마다 이어진 집회로 프랑스 경찰과 헌병대의 피로감이 극에 이르렀단 의미다. 프랑스 경찰은 이미 한 차례 업무과중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정부에 가장 차갑게 등을 돌린 건 집회에 참여하거나 지켜보는 일반 시민들이다. 집회 현장에서 경찰을 폭행한 전직 복서가 SNS를 통해 경찰의 과잉진압을 비판한 뒤 자수하자, 즉각 그를 응원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를 돕자는 모금 사이트가 만들어졌고 24시간 만에 7000명이 넘는 후원자가 11만7000유로(약 1억5000만원)에 이르는 성금을 모았다. 

이번 사태의 출구를 두고 대표적인 우파 철학자인 뤽 페리는 “내가 대통령의 보좌관이라면 의회 해산을 강력히 조언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투표가 강하게 요구되는 마당에, 의회를 해산해 조기 총선을 실시한 후 빠르게 돌파구를 마련하는 게 현명하다는 지적이다. 이러한 해법은 1993년 여대야소의 정국에서 조기 총선을 실시했던 시라크 대통령(당시 공화국연합(RPR) 당수)의 선례가 있다. 그러나 결과는 좋지 않았다. 다수당을 잃고 여소야대의 정국이 돼 동거정부로 이어진 것이다. 이러한 선례 탓에 위회 해산 역시 실현 가능성은 낮기만 하다. 

노란조끼 시위의 출구는 있을까. 당장은 시간이 흐를수록 정부와 노란조끼의 간극만 더 커질 뿐 좀체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다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다. 프랑스의 한림원인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이자 스탠퍼드대 석좌교수인 미셀 세르 역시 “과거 바스티유를 습격한 사람들이 프랑스 혁명을 예상했다고 생각하는가”라며 “노란조끼 사태가 어떤 국면으로 전개될지 나는 물론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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