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히트 상품, 란가쿠데의 탄생
  • 조용준 작가·문화탐사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7.06 15:00
  • 호수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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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로 보는 세계사 ⑨ ] 미카와치 출토 찻사발은 진해 웅천의 ‘웅천형 사발’과 비슷

지난번에 언급했던 종차관(從次貫)과 그 후손인 후쿠모토(福本) 가문 이야기로 시작해 보자. 종차관은 아마 정(鄭)씨 아니면 정(丁)씨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일본어로는 이를 표기할 수 없어 종(從)으로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쓰우라 시게노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대로 사기장 가운데 가장 기량이 좋았던 종차관을 히젠나고야성(임진왜란 침공 목적으로 병력을 집결시킨 가라쓰 근처에 새롭게 세운 성)에 머물고 있던 히데요시에게 보냈다. 히데요시는 종차관에게 그곳에서 가마를 차리게 하여 다기를 만들게 했다. 종차관은 찻사발뿐만 아니라 히데요시가 좋아하는 복스러운 불상도 잘 빚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히데요시는 종차관의 이름을 야지우에몬으로 고쳐주고 후쿠모토라는 성을 내렸다.

이렇게 히젠나고야성에서 히데요시의 전속 사기장으로 있던 종차관은 히데요시 사후인 1608년에 아들 야이치(彌一)를 얻었다. 1613년에 조선 사기장들이 많이 모여 있던 시이노미네로 이주해 계속 다기를 만들다가 1624년 사망했다. 야이치는 17세 때 습명(襲名·후계자로서 아버지 이름과 직업을 이어받는 일)을 하여, 찻사발 만드는 일에 특히 뛰어난 기량을 발휘했다. 그러자 거관의 아들 이마무라 산노조가 이런 그를 미카와치로 초청해 새롭게 정착할 수 있도록 편의를 봐주면서 힘을 모았다. 서로 흩어졌던 진해 웅천 출신으로 세 사기장 가문이 후대에 이르러 다시 뭉친 것이니, 참으로 감격적인 장면이라 할 수 있다.

거관의 이마무라와 종차관의 후쿠모토, 그리고 에이의 나가자토 세 가문은 미카와치 가마의 중추 세력이었다. 막부 시절은 물론 메이지 유신 이후 1871년 폐번치현(廢蕃置縣) 정책으로 인해 민요(民窯)로 바뀐 이후에도 서로 협력을 통해 미카와치의 지속적인 번영에 절대적으로 기여했다. 이 세 가문의 후손들은 지금도 이 지역 도예 산업의 중추를 형성하고 있다.

에이의 후손인 가쿠쇼 가마의 백자와 대형 청화백자 사발 ⓒ 조용준 제공
에이의 후손인 가쿠쇼 가마의 백자와 대형 청화백자 사발 ⓒ 조용준 제공

미카와치 가마의 중추 세력은 웅천 출신 세 가문

19세기 들어와 미카와치 상인들은 나가사키를 오가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거래를 시작했다. 당시 네덜란드 상인들에게 가장 인기를 끌었던 품목의 하나가 미카와치에서 만든 달걀 껍데기처럼 얇은 도자기인 ‘란가쿠데(卵殻手·egg shell)’였다.

이런 신제품 제작을 주도한 것은 거관의 후손 이마무라 스치타로였다. 그는 당시 번주 겐히로무에게 이를 보고하고 이 기술을 응용한 커피잔이나 양주잔을 만들었다. 이에 겐히로무는 나카사키에 대리인을 보내 히라도도자기거래소(平戶燒物産會所)라는 무역회사를 설립하니, 1865년에는 종차관 후손 후쿠모토 에이타로가 이 회사의 운영을 전담했다.

1871년 폐번치현이 되면서 히라도 마지막 번주 아키라는 당시의 대관(代官) 후루카와 초지에게 히라도도자기거래소의 일체 업무를 물려주었다. 그러자 후루카와는 이를 더욱 번창시키고자 후쿠모토 에이타로와 협의해 만포잔상포(萬寶山商鋪)를 차리고 제품에는 ‘만포잔시에세이(萬寶山枝榮製)’라고 표기했다.

1874년 도요시마 세이지가 숙부인 후루카와 조지로부터 이를 물려받은 다음엔 이마무라 호주, 나카자토 쇼노수케, 나카자토 모리사부로, 나카자토 도요시로 등 임원들이 주축이 되어 해외 전시회나 박람회 출품, 판로 확장에 노력했다. 나가자토 모리사부로는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작품을 출품했다. 1890년 메이지 일왕이 사세보를 방문했을 때는 이마무라 고쿠지로의 닭 모습 장식물(太白鷄置物)을 구입했다. 또한 1900년 이마무라 시카요시는 왕세자의 결혼식 때 사세보시의 위촉으로 투각 향로 1기를 헌상했다. 2005년 조사 집계에 따르면 미카와치의 이마무라 집안은 22가구, 나가자토 집안은 33가구, 후쿠모토 집안은 27가구가 살고 있다.

제일 번창하며 미카와치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거관의 이마무라 가문은 현재 가구 수도 제일 적고 뚜렷한 도예 활동도 하지 않고 있는 듯하다. 미카와치는 1900년대 중반 약 40년 동안의 침체기를 겪으며 쇠락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집안은 매년 5월1일부터 닷새 동안 열리는 ‘하마젠(はま錢) 축제’를 이어가고 있다. 하마젠의 ‘하마’는 그릇을 구울 때 모습이 변하지 않도록 까는 밑받침으로 우리말로는 속칭 ‘개떡’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돈처럼 둥글고 작아서 일본 아이들이 이것으로 돈놀이를 하는 데서 착안해 축제에 ‘하마젠’이라는 독특한 이름이 붙었다.

달걀 껍데기처럼 얇은 ‘란가쿠데’ 도자기의 예시 ⓒ 조용준 제공
달걀 껍데기처럼 얇은 ‘란가쿠데’ 도자기의 예시 ⓒ 조용준 제공

미카와치 도자기, 근대 초만 해도 세계적인 명품

축제 때면 산노조가 처음 백자 도토를 발견한 하리오섬(針尾島)에서 가져온 돌로 만든 미카와치의 상징이자, 조엔(如猿)을 대명신으로 모시는 도조신사에서 제사를 지내면서 앞서 소개한 겐히로무(源凞) 번주가 내린 각서를 읊는다.

미카와치 도자기는 근대 초기까지만 해도 아리타나 사쓰마 도자기를 능가하는 세계적인 명품이었다. 일본 왕실의 어용품(御用品)이었을 뿐만 아니라, 동인도회사의 무역을 통해 세계로 전파되었다. 이런 연유로 영국박물관, 터키 이스탄불의 톱카프 궁전 박물관, 네덜란드의 레이덴 국립민속학박물관에는 다수의 미카와치 도자기가 소장되어 있다. 이런 가치로 인해 덴마크 국립박물관장 에밀 한 노바 박사나 스튜어트 딕도 일찍이 미카와치 청화백자가 일본에서 최고라고 품평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란가쿠데 램프와 맥주잔 ⓒ 조용준 제공
란가쿠데 램프와 맥주잔 ⓒ 조용준 제공
사세보시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에이와 거관 후손들이 공동 제작한 대형 접시. 상단에 도조신사가 있고 그 밑에 고려할머니와 갓을 쓴 거관의 모습이 있다. 왼쪽 상단 붉은색은 조선의 해를 의미하고, 중앙의 노란색은 부의 상징이다. 

고려할머니=삼포할머니?

미카와치 마을 앞을 지나는 개울은 구마카와(熊川), 곧 진해의 웅천(熊川)에서 유래한 것이다. 웅천은 우리말로 곧 ‘곰내’다. ‘진해 웅천 향토문화연구회’의 황정덕 회장은 고려할머니를 모시는 신사가 있는 지역을 일본인들이 ‘산바라게(さんばばらげ)’라고 부른다는 사실에 착안해 고려할머니는 곧 ‘삼포할머니’라 추정한다. ‘산’은 ‘삼(三)’이고, 강이나 내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포(浦)’는 한국말로 ‘개’로 ‘게’와 발음이 유사하기 때문이다. 우연찮게도 진해에는 삼포(三浦)가 있고, 그 마을은 또 임진왜란 당시 히라도 영주 마쓰우라 시게노부가 진을 치고 있었던 사화랑산 왜성과 가까우니, 고려할머니는 곧 삼포할머니라고 추정하는 것도 설득력이 높다.

그러나 에이, 고려할머니가 진짜 삼포할머니인지 아닌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미카와치 그 자체가 히라도에서 시작한 조선 사기장들의 넋과 체취가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특히 미카와치 나카하야마(長葉山)의 옛 가마터에서 출토된 도자기에서는 찻사발들이 많이 발견된다. 이는 진해 웅천 가마터에서 발굴된 ‘웅천형 사발’과 거의 비슷하다. 일본 국보 ‘기자에몬 이도다완(喜左衛門井戶茶碗)’과 같다고 추정되고 있다. 적어도 일본인들이 가장 숭상하는 찻사발의 유력한 ‘원류(源流)’의 하나인 것이다.

미카와치는 오늘날 행정구역상 사세보시에 속하지만, 거리상으로는 사가(佐賀)현에 속한 아리타에 훨씬 가깝다. 아리타와 붙어 있어 아리타 중심지에서 자동차로 15분이면 간다. 미카와치의 도자기 축제도 아리타의 5월 도자기 축제와 시기를 맞추어, 축제 때는 아리타에서 미카와치를 오가는 무료 셔틀버스를 운행한다.

가쿠쇼 가마의 가라코에 차 주전자 ⓒ 조용준 제공
ⓒ 조용준 제공

미카와치에서 생산량 제일 많았던 ‘김영구 가마’

후쿠오카 하카타역에서 JR 특급기차로 갈 경우에는 약 90분을 달려 하이키역(早岐駅)에서 내려 다시 택시로 10분을 가야 한다. 미카와치역은 급행은 서지 않는 무인역으로 사세보나 아리타에서 출발하는 완행열차가 선다. 그러나 미카와치역에서 내려도 미카와치 마을로 가려면 다시 택시를 타야 한다.

한편 거관, 에이 등과 함께 끌려왔던 순천 출신 김영구(金永久)는 히라도의 에나가 가마(江永窯), 구마하라 가마(熊原窯), 후지하라 가마(藤原窯)의 출발점이 되었다. 김영구와 함께 온 조선인 포로는 700여 명이나 되었다. 이들은 나중에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되어 도쿠가와의 종교박해 때 다수의 순교자가 발생했다.

김영구는 김묘구(金妙久)라는 이름의 부인과 같이 끌려온 듯한데, 마쓰우라는 기술이 좋은 그를 무척 아껴서 요코이시 나가히사(橫石永久)라는 이름을 내렸다. 김영구의 가마는 1624년부터 1643년까지 미카와치에서 제일 생산량이 많았고, 번주에게 바친 세금이 번에서 제일 높았다고 한다. 그는 1654년까지 무려 101년 동안 장수했으나, 후손이 없어 그가 사망한 이후 가마는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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