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 여왕, 브렉시트 침묵이 타당한가”
  • 방승민 영국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10.10 13:00
  • 호수 1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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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의회 장기 정회 해프닝 후 왕실의 정치적 역할에 대한 의문 증폭

영국 의회 의원들이 여름 정기 휴회를 마치고 복귀한 지난 8월말, 보리스 존슨 총리는 곧장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게 9월9일부터 10월14일까지 약 한 달간 의회 정회를 선포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여왕에게 정회 마지막 날 의회에서 ‘여왕 연설’을 해 달라고도 부탁했다. 여왕은 이를 수락했다. 영국에선 여왕이 의회 연설을 허락한 경우, 연설일 이전 일정 기간 의회를 정회하는 게 관례다. 따라서 여왕이 이 요청을 수락함과 동시에 모든 의회 업무가 중단됐다. 브렉시트 합의문에 대한 치열한 논의가 한창이던 때 돌연 정회 선언은 그 즉시 거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국가의 기로를 결정할 브렉시트가 두 달도 채 남지 않은 시점에서 여왕이 정회 요청을 수락했다니, 여왕의 정치적 판단이 도마에 오르는 건 불가피한 일이었다.

의원들의 투표가 필요한 ‘휴회’와는 달리 정회의 권한은 오로지 여왕에게 있다. BBC를 비롯한 주요 언론들은 이번 정회 요청에 대해 “브렉시트 합의안 투표에 대한 의원들의 반발을 예측한 존슨 총리가 의회의 논의 기간을 최소화해 ‘노딜 브렉시트’를 추진하려고 전략을 세운 것”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1주일 미만의 일반적 정회와는 달리, 5주에 가까운 장기 정회는 1700년대 이후 처음이라 정회 여부뿐 아니라 기간 또한 많은 의문을 샀다.

야당을 비롯한 정치 활동가들은 정회 요청이 부당하다며 존슨 총리를 기소했다. 결국 9월24일 영국 대법원의 11명 판사들은 무기명 만장일치로 존슨의 정회 결정이 합리적이지 못하며, 특히 현재와 같이 위급한 시국에 의회의 입헌 기능을 저해할 수 있다는 이유로 위법 판결을 내렸다. 판결 후 여왕 연설을 빌미 삼아 노딜 브렉시트를 밀어붙이려던 것과, 정치적 중립성을 가져야 할 왕실을 정치권에 끌어들인 데 대해 존슨 총리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영국 노동당은 영국의 헌법 체계에 구애받지 않는 여왕도 사실상 이 같은 불법행위에 가담한 것이 됐다는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여왕이 불법적인 선택을 하도록 유도한 총리를 자발적으로 따랐다고 본 것이다.

2017년 6월21일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의회에 참석해 개원 연설을 하고 있다. ⓒ AP 연합
2017년 6월21일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의회에 참석해 개원 연설을 하고 있다. ⓒ AP 연합

“왕실은 더 이상 헌법 위에 존재하지 않는다”

영국은 입헌군주국으로서 민·형사 소송이 군주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즉 군주가 불법행위에 연루됐더라도 기소되거나 처벌받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영국 헌법에 따르면 여왕은 헌법 체제의 중앙에 위치하며 입법·사법부의 모든 권한은 여왕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다. 일례로 영국 입법부를 가리키는 공식적인 표현은 ‘Crown in Parliament(왕실의 의회)’를 사용하며 여왕, 상·하원으로 구성돼 있다. 사법부 역시 판사들은 QC, ‘Queen’s Counsel(왕실 변호사)’이라는 직함을 갖고 있다. 모든 입법 및 사법 행위의 최종 승인과 발효는 여왕을 통해 이뤄진다. 따라서 여왕에 대한 일련의 판결은 영국 법상 원천적으로 불가한 셈이다.

영국 야당인 노동당은 이번 판결과 관련해 “더 이상 여왕과 영국의 군주제가 헌법 위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한 셈”이라며 대법원의 위법 판결을 반겼다. 영국 왕실은 이번 판결에 대해 아직 어떠한 입장도 밝히지 않고 있다. 영국 왕실과 여왕은 전통적으로 정치적 중립을 고수하는 게 원칙이다. 여왕은 투표를 할 수 없고 선거 국면에서도 결코 특정 정당을 지지해선 안 된다. 여왕은 추밀원(Privy Council)을 통해 고위 정치인들과 정기 회동을 갖고 국가 기밀 사항을 전달받을 뿐이다. 영국 의회도 왕실의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기 위해 여왕을 정치적 논란에 끌어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일종의 불문율로 여기고 수십 년간 지켜오고 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그간 정치적 중립을 고수하고 정치에 대한 개입을 최소화하는 성향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존슨 총리는 양자택일의 선택지를 제시하며 여왕을 정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이에 영국에서도 ‘영국 의회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경우’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존슨 총리의 여왕 연설 요청 시기를 고려해 볼 때, 여왕의 수락 여부는 곧 브렉시트라는 중대한 정치적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브렉시트를 둘러싼 의회 내 공방이 치열한 가운데, 여왕은 어떤 선택을 하든 특정 정당의 입장에 힘을 실어줄 수밖에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반대로 만일 존슨 총리의 요청을 거절했다면, 기존의 브렉시트 합의안을 밀어붙이려던 총리와 노딜 브렉시트 지지자들의 반발에 부딪히게 됐을 것이다. 대법원의 판결 이후 의회는 늦게나마 정상화됐지만, 브렉시트에 대한 논의 시간은 대폭 줄었으며 이로 인해 노딜 브렉시트 가능성은 높아졌다. 여왕은 노딜 브렉시트를 반대하는 쪽으로부터 여전히 부적절한 요청을 받아들였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9월2일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총리관저 앞에서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 EPA 연합
9월2일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총리관저 앞에서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 EPA 연합

'여왕과 왕실의 직무유기' 지적하는 목소리도

그러나 한편에선 절차상 치명적인 문제가 없는 상황에서 총리의 요청을 거절했다면,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할 여왕으로서 더욱 위험한 결정이었을 거란 평가도 나온다. 따라서 이번 여왕의 요청 수락은 왕실의 정치적 중립성을 최대한 지켜내려는 행위였다는 옹호 여론도 상당하다. 오히려 비난의 화살은 점점 국가의 상징적 존재인 여왕에게 정치적 선택을 강요하는 구도를 만든 존슨 총리를 향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군주제의 역할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는 높아졌다. 영국 왕실은 영국 역사·문화적으로 매우 상징적인 존재지만, 세금으로 왕실이 유지되고 있는 만큼 영국 국민에게 좀 더 실질적이고 긍정적인 영향을 줘야 한다는 요구가 브렉시트 사태를 겪으며 날로 증가하고 있다. 2016년 브렉시트 투표 이후 영국 왕실은 줄곧 어떠한 견해도 밝히지 않으며 중립을 지키고 있다. 브렉시트로 인해 국가의 미래가 불투명하고 국민 분열이 점차 심각해지는데도, 국가 군주로서 오랜 원칙만 지키고 있는 데 대해 여왕과 왕실의 직무유기를 지적하는 목소리는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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