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영국서도 터진 ‘인종 차별’ 항의 투쟁
  • 방승민 영국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6.13 10:00
  • 호수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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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칠도 인종차별주의자” 역사적 인물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도

5월 어느 날, 필자는 퇴근길에 런던 외곽에서 재택근무 중인 또 다른 한국인 친구와 영상통화를 했다. 친구가 마스크를 쓰고 통화를 하며 길을 지나던 중, 중년의 한 백인 여성이 친구에게 길 한쪽으로 붙어 걸으라며 매섭게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수화기 너머에 있던 필자도, 상황을 직면한 친구도 당황스러워 서로 잠시 아무 말도 못 했다. 이 여성은 길 한가운데를 지나는 다른 백인들에겐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 옆을 홀로 걷던 동양인만을 표적으로 삼았다.

이는 최근 영국을 비롯한 유럽 거리에서 드물지 않게 펼쳐지는 풍경이다. 코로나19가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올해 초부터 동아시아인에 대한 일부 유럽 시민들의 노골적 냉대와 차별은 급격히 증가했다. 인종차별을 배경에 둔 폭행 사건은 언론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뉴스이기도 하다.

6월7일(현지시간) 영국 남서부 브리스틀 시내에서 시위대가 17세기 노예무역상 에드워드 콜스턴의 동상을 끌어내리고 있다. ⓒAP 연합
6월7일(현지시간) 영국 남서부 브리스틀 시내에서 시위대가 17세기 노예무역상 에드워드 콜스턴의 동상을 끌어내리고 있다. ⓒAP 연합

영국에 울려 퍼진 ‘Black Lives Matter’

지난 2월,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 재학 중인 싱가포르 출신 조나단 목은 밤 9시경 런던 번화가인 옥스퍼드 거리를 지나가다 4명의 남성 행인들에게 기습 폭행을 당했다. 이들은 “너희 ‘코로나바이러스’가 우리나라에 있는 걸 원치 않는다”고 소리치며 무차별적으로 폭력을 휘둘렀다. 안면 재건 수술이 필요할 정도로 심각한 피해를 입은 조나단은 이후 자신의 얼굴 사진과 사건 내용을 페이스북에 올려 공론화시켰고, 이내 BBC 등 주요 언론에서 해당 사건을 다루기 시작했다. 런던 경찰은 가해자들의 얼굴이 찍힌 CCTV 영상을 확보해 언론에 공개하며 강한 수사 의지를 드러내는 듯했지만, 이들에 대한 수배 소식을 전한 지 3개월이 지난 현재까지 별다른 뉴스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비슷한 시기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유학 중인 한국인 유학생 김도현씨는 저녁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갑작스레 덮친 10대 무리에게 주먹으로 얼굴을 수차례 가격당했다. 다행히 지나가던 40대 부부가 경찰에 신고해 폭행은 가까스로 중단됐다. 경찰은 사건 발생 이틀 후에야 김씨를 찾아와 조사했다. 김씨는 사건 발생 후 경찰로부터 어떠한 피드백도 전달받지 못했다고 전한다.

가디언지는 지난 5월 영국 정부 내부 조사 결과, 동아시아인과 남아시아인들에 대한 인종차별적 증오범죄가 코로나19 발생 직후 21%가량 증가했다고 보도했다. 런던 및 교통경찰 당국에 따르면, 코로나 사태 이후 동아시아인에 대한 인종차별 사고 신고 건수는 전년도 동일 기간 대비 3~4배가량 증가했다. 또한 올 상반기 내내 BBC·SKY TV·가디언지 등 영국 주요 언론매체에선 중국인 등 동아시아인에 대한 인종차별적 증오범죄 소식들이 끊임없이 전해졌다.

특히 런던을 비롯해 유학생 인구가 많은 지방의 대학 도시인 사우샘프턴·요크·셰필드·맨체스터 등에서 동아시아인에 대해 언어폭력을 행사하거나 돌·계란·쓰레기 등을 던지는 등의 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해당 지자체와 정부, 경찰은 공식적으로 “영국 내에서 인종차별은 용납될 수 없으며 증오범죄에 대해서는 무관용 원칙으로 수사에 임하겠다”고 밝히고 있지만, 실질적이거나 구체적인 수사나 보호 방침 등에 대해서는 투명하게 알려진 바 없다.

지난 주말 미국 경찰의 과잉 대응으로 사망한 조지 플로이드를 기리며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200건 이상의 시위가 6월 첫 주말 런던을 비롯해 맨체스터·브리스틀·셰필드 등 영국 전역에서 벌어졌다. 이번 시위에는 약 14만 명이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영국 언론은 이번 시위가 영국 사회 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던 인종차별에 대한 인식의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런던 국회의사당과 총리 관저 앞은 연중 크고 작은 규모의 시위들이 끊이지 않지만, 지난 주말과 같이 광장과 도로를 가득 메울 정도로 인파가 몰린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미 대사관 앞을 걸으며 시위는 평화롭게 시작됐으나, 이후 총리 관저 앞에서 폭력시위로 번져 14명의 경찰관이 부상을 입기도 했다. 이들은 인종차별 사건에 미지근하게 대처해 온 정부와 경찰 당국에 대해 쌓였던 불만도 표출했다.

 

“불편한 진실 마주해야 할 때”

일요일에는 영국 브리스틀에서 노예무역상이었던 에드워드 콜스턴의 동상이 시위대에 의해 철거됐다. 에드워드 콜스턴은 1600년대 후반 10만 명 이상의 흑인을 아프리카에서 캐리비안과 미국 등으로 수송한 인물이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탈수·질병 등으로 목숨을 잃어 바다에 버려졌다. 옥스퍼드대학을 비롯해 영국 곳곳에선 지금 식민지배, 노예농장 운영 등과 관련된 인물들의 동상과, 이들의 이름을 딴 상점에 대한 철거 및 변경 논의가 도마에 올라 있다.

심지어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국의 상징적 인물 윈스턴 처칠 전 총리에 대한 평가 역시 갑론을박 중이다. 런던에 있는 처칠 동상에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낙서가 적히는 등 그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다. 그러나 런던시는 처칠 동상에 대해선 철거 검토 대상에서 일단 제외하겠다는 결정을 내린 상태다.

동상 철거를 비롯해 시민들의 인종차별 투쟁에 대한 영국 정부 인사의 발언과 대처는 좀체 하나로 모아지지 못하고 있다. 보리스 존슨 총리는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으로 촉발된 ‘명백한 불평등’에 대한 분노를 외면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동시에 “지난 주말 폭력시위로 인해 14명의 경찰이 부상을 입은 것과 관련해 인종차별을 극복하고자 한다면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방법을 간구해야 할 것”이라고도 경고했다. 런던시장 사디크 칸 역시 브리스틀의 동상 철거 사태를 참고해 특별위원회를 구성했으며, 런던 시내에 설치돼 있는 동상 중 노예제 및 노예농장 운영과 관련된 인물이 있는지 전부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인종차별 시위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그 못지않게 나오고 있다. 매트 한콕 보건부 장관은 “이번 시위는 단순히 미국에서 발생한 사건을 기리는 시위일 뿐”이라며 “영국은 인종차별주의 국가는 아니다”고 밝혀 시위의 의의를 경시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영국 내무장관 프리티 파텔 또한 시위대의 동상 철거에 대해 “완전히 수치스러운” 행위라고 정의하며 “이들의 행동은 시위대가 추구하는 본질을 흐린다”고 비판했다.

코로나 사태 속에서 민낯을 드러낸 아시아인 차별에 이어, 미국 플로이드의 죽음으로 인한 흑인 인종차별까지 저항의 목소리가 세계적으로 커지는 상황에서, 영국 시민들 역시 차별 철폐를 외치는 추가 시위를 준비하고 있다. 이들은 수백 년 동안 사회 전반에 깔려 있던 차별적 요소들을 뿌리 뽑을 기회라며 ‘역사적 인물에 대한 재평가 등 불편한 진실을 마주해야 할 때’라고 의지를 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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