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때 목숨 걸어야 하는 ‘이별 전쟁’
  • 정락인 객원 기자 (sisa0@sisajournal.com)
  • 승인 2020.06.26 16:00
  • 호수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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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이별 살인 피해자 58명…스토킹 처벌 강화 시급

요즘 신조어로 ‘이별 전쟁’이란 말이 있다. ‘헤어질 때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세태를 빗댄 말이다. 실제 헤어진 연인 사이에서 ‘이별 살인’이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다. ‘이별 살인’의 가해자는 대부분 남성, 피해자는 상대 여성이다. 

한국여성의전화 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연인 등 지인에 의한 여성 살해 피해자’는 99명, 살인미수는 130여 건이다. 이 중 이혼이나 결별, 만남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살해된 사람이 58명(29.6%)에 달한다. 한마디로 이별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세상이 됐다.

지난 5월31일 경기도 군포에서도 이별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별 통보에 격분한 20대 남성이 흉기를 휘둘러 여자친구를 살해하고 그의 아버지에게 부상을 입혔다. 그는 평소 알고 있던 여자친구 집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 안으로 들어가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해 8월 경기도 용인에 사는 A씨도 이별 범죄에 희생됐다. 그는 남자친구 B씨(30)의 상습적인 폭력에 시달리다가 B씨가 다른 여성과 바람을 피우자 이별을 통보했다.

B씨는 “다시 만나 달라”는 요구를 A씨가 거절하자 여기에 앙심을 품고 범행을 결심했다. 그는 A씨의 승용차에 위치추적기를 부착해 동선을 감시했다. 그러다 A씨가 사는 아파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귀가하던 그를 흉기로 수차례 찔러 살해했다.

B씨는 과거에도 헤어진 여자친구들을 상대로 계속 만나 달라고 요구하며 흉기로 위협해 성폭행하거나 협박·감금하는 등 범죄를 저질러 두 차례 실형을 받았다.

ⓒ일러스트 오상민
ⓒ일러스트 오상민

연인이 살인자로 둔갑

지난 4월 전북 전주에서 여성 두 명을 잇따라 살해한 최신종(31)도 ‘이별 범죄’ 전력이 있었다. 그는 2012년 여자친구가 이별을 요구하자 미리 준비한 흉기로 협박하고 성폭행했다.

잔혹한 범행이었지만 당시 재판부는 “최씨가 반성하고 있고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는다”며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하는 데 그쳤다. 재판부는 또 “최씨의 나이가 많지 않고 교정 가능성이 있다”며 성범죄자 신상정보도 공개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일어난 이별 살인을 분석해 보면 가해자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엿보인다. 상대에 대한 끝없는 의심과 소유욕, 일상생활 통제, 병적인 집착 그리고 무조건적인 증오다. 여기에 더해 가해 남성들은 세상과 단절된 고립된 생활을 하는 경향이 있다.

송파 살인 사건의 범인이 대표적이다. 서른두 살 동갑내기인 한아무개씨(남)와 김아무개씨(여)는 지인의 소개로 만나 연인이 됐다.

처음에는 불타는 사랑을 했다. 거의 매일 붙어 다니다시피 하며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한씨는 김씨를 회사까지 출근시켜주고, 퇴근 후에는 집까지 데려다줬다.

그러나 이런 것도 잠시였다. 한씨는 점점 김씨에게 집착하기 시작했다. 어디를 가면 간다고 알려줘야 했다.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보고하지 않으면 불같이 화를 냈다. 어쩌다 말을 못 하면 “왜 나한테 말 안 해?” 하면서 병적으로 매달렸다.

이뿐만이 아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두 사람은 점점 다툼이 잦아졌고, 결국 8개월 정도 사귀다 김씨가 결별을 선언했다.

한씨는 헤어지자는 말에 “함께 죽자”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하는 등 이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어 한씨의 협박과 잔혹한 스토킹이 시작된다. 수시로 “죽여버리겠다”며 위협했다. 쉴 새 없이 문자와 협박전화를 했다.

그는 거의 매일 김씨가 사는 아파트 앞에 나타났다. 보란 듯이 집 앞에 차를 세워두고 멀리서 지켜봤고, 아파트 맞은편 교회에 올라가 집 안을 수시로 들여다봤다.

쉴 새 없이 문자와 협박전화를 했다. 자신의 신변에 어떤 일이 생길 것에 대비해 미국에 사는 동생에게 이동저장장치(USB)를 보내 내용물을 인터넷에 퍼트리겠다고도 했다. 한씨의 협박 강도는 더욱 심해졌고, 한 가족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그러다 결국 2016년 4월19일 아침 김씨가 출근하려고 현관문을 나서자 흉기로 살해했다. 한씨는 범행 후에도 죄책감을 느끼거나 반성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법원은 한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한씨는 미국으로 이민 간 부모와 떨어져 사춘기 시절을 외톨이처럼 보냈다. 성인이 된 후에는 대인관계를 잘 맺지 못했고, 제대로 된 직업도 갖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내면에는 피해의식이 잠재돼 있었고, 자신을 포장하며 거짓말을 일삼았다.

이에 대해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세상에 대한 피해의식을 가진 사람이 여성을 사귀게 되면 여성에게 병적으로 집착하게 될 가능성이 굉장이 크다”고 분석했다.

‘이별 살인’이 연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결혼생활을 하다가 이혼한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 2018년 10월 서울 강서구 등촌동에서는 40대 여성이 전남편에게 스토킹을 당하다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2016년 서울 송파구에서 전 여자친구를 살해한 범인이 경찰서로 압송되고 있다. ⓒ연합뉴스
2016년 서울 송파구에서 전 여자친구를 살해한 범인이 경찰서로 압송되고 있다. ⓒ연합뉴스

법무부, 강력한 ‘스토킹 처벌법’ 마련

‘이별 살인’의 예방에는 한계가 있다. 가해자 스스로 범행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피해자가 피해 다닐수록 더욱 집착하는 경향을 보인다. 법원에서 ‘접근 금지’ 조치를 내려도 살인으로 이어지면 무용지물이다. 그렇다 보니 살인으로 이어진 다음에야 끝이 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막기 위한 대책은 턱없이 부족하다. 전문가들은 이별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스토킹 범죄에 대한 처벌이 강화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현행법상 스토킹 범죄는 경범죄처벌법 위반에 해당한다. 경범죄처벌법은 ‘상대방의 의사에 반하여 지속적으로 접근을 시도해 만남이나 교제를 요구하는 행위, 반복적으로 따라다니거나 잠복해 기다리는 행위’ 등을 지속적인 괴롭힘으로 보고 처벌 대상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처벌 수위가 10만원 이하의 벌금이나 구류, 과료에 불과하다. 그렇다 보니 스토킹 범죄로 인한 피해자가 급증하는 추세다.

스토킹 범죄에 대한 처벌 수위를 강화하는 내용의 법안은 1999년 15대 국회에서 처음 발의된 후 19대까지 8건의 법안이 발의됐으나 모두 임기만료로 폐기됐다. 20대 국회에서도 7건이 발의됐으나 여전히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최근 법무부는 처벌 수위와 수사 조직을 대폭 강화하는 내용의 ‘스토킹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스토킹처벌법)을 마련했고, 이를 국회에 제출할 예정이다. 법무부의 스토킹처벌법이 시행되면 3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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