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양쪽에서 도전받는 文 ‘한반도 운전자론’
  •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장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6.26 13:00
  • 호수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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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턴 회고록 파문…‘남·북·미 모두 패자, 유일한 승자는 볼턴’ 우스개도

지난 2018년 3월8일(현지시간) 저녁 워싱턴의 백악관 잔디 정원. 땅거미가 내릴 때까지 브리핑을 기다리고 있던 출입기자들 앞에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등장했다. 서훈 국정원장과 함께 막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면담을 마치고 나온 정 실장은 직접 영어로 기자회견을 했다. 그는 “저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북한의 지도자인 김정은 위원장과의 면담에서 김 위원장이 비핵화에 대한 의지를 갖고 있음을 언급했다”고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항구적인 비핵화 달성을 위해 김 위원장과 2018년 5월 만날 것이라고 했다는 점도 덧붙였다.

한국의 당국자가 백악관 출입기자들에게 직접 브리핑이나 기자회견을 한다는 건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이 때문에 트럼프가 북한 비핵화나 김정은 위원장과의 북·미 정상회담 개최 같은 메가톤급 뉴스가 포함된 브리핑을 정 실장에게 맡긴 배경이 관심을 끌었다. 마침 정 실장과 서 원장이 브리핑하는 뒤편으로 마이크 펜스 부통령과 제임스 매티스 국방부 장관, 존 켈리 비서실장 등 면담에 배석한 미국 측 관계자들이 우르르 빠져나가는 모습이 포착됐다. 평양을 특사 방문해 김 위원장과 만나고 돌아온 정 실장의 메시지를 100% 신뢰하기 어렵다는 트럼프 행정부의 판단이 청와대 당국자의 백악관 기자회견을 연출하게 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찜찜했던 그날의 분위기는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입을 통해 2년여 만에 드러났고, 논란이 증폭되고 있다. 볼턴은 6월23일 발간된 책 《그 일이 일어났던 방: 백악관 회고록》에서 북·미 비핵화 외교의 전반을 비판하면서 “김정은이나 우리(미국)에 대한 진지한 전략보다는 한국의 창조물”이라고 주장했다. 문재인 정부가 북·미 간 중재 역할을 자처하면서 비핵화보다 남북관계 개선에 치중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지적이다.

대북특사로 방북한 정 실장이 전한 김 위원장의 ‘비핵화 의지’가 실제와 달리 부풀려지고 전제조건 등을 생략한 채 단정적으로 트럼프 측에 전달됐다는 의혹 제기다. 미국 측이 정 실장의 입을 통해 김 위원장의 비핵화 관련 ‘언급’을 전하게 한 데도 이런 판단이 작용했다는 그동안의 관측에 볼턴의 회고록이 힘을 실어주고 있는 형국이다.

2019년 2월8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북·미 정상회담에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왼쪽)이 배석하고 있다. ⓒAP 연합
2019년 2월8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북·미 정상회담에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왼쪽)이 배석하고 있다. ⓒAP 연합

자의적이지만, 마냥 백안시하기도 어려워

볼턴은 회고록을 통해 트럼프 대통령의 리더십과 자질 부족은 물론 북한과의 비핵화 외교의 문제점을 속속 폭로하고 있다. 정 실장의 북·미 정상회담 전언에 트럼프는 김 위원장의 비핵화 언급에 대한 검증 등의 절차도 없이 “되도록 빨리 만나고 싶다”며 서둘렀다고 한다. 북·미 정상회담 직후인 2018년 7월에는 평양에 갔다가 김 위원장도 만나지 못한 채 빈손으로 귀국한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에게 “선물로 가져간 가수 엘튼 존의 친필서명과 CD가 전달됐는가”를 물었다는 주장도 회고록에 실렸다. 북·미 협상의 진전보다 엉뚱한 문제에 더 치중했다는 비판이다.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서도 볼턴은 ‘Moon’이란 표현을 153차례나 쓸 정도로 집중적으로 비판했다. 영변 핵시설 폐기 제안을 미국 측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문했던 문 대통령에게 볼턴은 “조현병적(schizophrenic) 아이디어”라고 거칠게 몰아세웠다. 특히 지난해 6월 판문점에서 이뤄진 남·북·미 정상의 회동에 대해 볼턴은 폭탄 발언을 내놓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방한 길에 트위터 제안을 통해 김정은 위원장과의 만남을 성사시켰는데 문 대통령이 여기에 끼어들었다는 게 볼턴의 주장이다. 북·미 모두 한국 측의 개입을 원치 않았으나 “김 위원장을 트럼프 대통령에게 소개하고 자리를 피하겠다”고 문 대통령이 얘기해 결국 3자 회동이 됐다는 것이다.

볼턴의 회고록에 백악관뿐 아니라 청와대도 발끈하고 나섰다. 정의용 실장은 “상당 부분 사실을 크게 왜곡하고 있다”고 반박해 진실게임 양상으로 번지고 있다. 하지만 청와대는 구체적인 사실관계를 다투거나 언론에 이를 소상히 설명하는 일은 없을 것이란 입장이다. 당시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을 지낸 윤건영 민주당 의원도 “사실을 일일이 공개해 반박하고 싶지만 볼턴 보좌관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없어 참는다”고 말했다.

문제는 볼턴 회고록이 그동안 남북관계나 북·미 비핵화 협상, 한반도 평화 이슈 등과 관련해 우리 국민이 고개를 갸웃거리거나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던 대목에 대해 관찰자의 입장에서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회고록은 당사자의 입장을 부풀리고 사건을 해석하는 시각이 자의적일 수밖에 없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 볼턴의 경우 대북 강경파 인사로 분류된다. 이런 점을 고려하더라도 북·미 협상과 한국의 중재자 역할 등을 내밀하게 지켜본 백악관 안보보좌관의 기록을 무조건 엉터리로 간주하거나 백안시하기도 어렵다는 지적이다. 청와대와 정부는 볼턴 회고록의 파장에 내심 긴장하며 여론 추이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분위기다.

 

북·미 협상 전말 소상히 밝히는 게 필요할 수도

볼턴 회고록의 파장이 증폭된 데는 6월초부터 거세진 북한의 대남 위협과 도발 행보도 한몫했다는 관측이 나온다. 특히 문재인 정부 화해·협력 행보의 상징물인 개성 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해 버린 북한의 충격적인 행태는 국민의 대북여론을 크게 악화시켰다. 문 대통령을 향해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이 조롱과 위협을 가하는 상황 속에서 속수무책인 정부에 대해 실망하는 시각도 적지 않았다. 김정은 위원장이 북측이 예고했던 ‘대남 군사행동’을 유보하는 결정을 내린 건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유야무야 넘겨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 만만치 않다.

볼턴 회고록 파동 와중에 북한까지 나서 문 대통령의 한반도 중재자, 운전자 역할을 거부·비난하는 입장을 내면서 몰아세우고 있다. 이대로 가다간 북한이 볼턴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상황까지 벌어지는 게 아니냐는 전망도 제기된다. 유일한 승자는 선인세 200만 달러를 두둑이 챙긴 볼턴이 될 것이란 우스개까지 나온다. 문 대통령과 정의용 실장 등이 대북특사 파견과 북·미 협상 과정을 되짚어보고 전말을 소상하게 국민에게 밝히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외교상 비밀’이란 커튼 뒤에 숨기에는 상황이 녹록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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