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으로 돌아간 시대 지성의 마지막 흔적
  • 조창완 북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7.05 11:00
  • 호수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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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 발행 겸 편집인의 마지막 잡지 《녹색평론 173》

재생용지를 사용해 갈색 느낌이 나는 가벼운 책의 마지막에 있는 출간정보에는 29년째 ‘발행 겸 편집인 김종철’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이 될 《녹색평론》 173호가 낮은 흐느낌 속에 드러났다.

한국전쟁 발발 70년째 날인 지난 6월25일 SNS를 통해 고(故) 김종철 《녹색평론》 편집인의 부음이 들렸다. 향년 73세. 후학이지만 글벗인 나희덕 시인을 비롯해 언론인, 정치인, 학자, 종교인 등도 가리지 않고 안타까움을 전했다.

《녹색평론 173》 김종철 발행 겸 편집인│녹색평론사 펴냄│248쪽│1만2000원 ⓒ뉴스뱅크이미지
《녹색평론 173》 김종철 발행 겸 편집인│녹색평론사 펴냄│248쪽│1만2000원 ⓒ뉴스뱅크이미지

《녹색평론》, 단행본 능가하는 폭넓은 기획의 산물

《녹색평론》은 격월간 잡지지만, 그 자체가 하나의 단행본을 능가하는 폭넓은 기획의 산물이다. 책 안에는 인문, 환경, 생태, 페미니즘, 사회, 통일, 여성, 시, 책 등이 하나의 덩어리로 잘 빚어져 있다.

이 여정은 영남대에 재직하던 1980년대 초 미국 진보지 ‘뉴욕 가디언’에서 독일 녹색당의 의회 진출과 관련한 글을 보면서 시작된 것이다. 이후 대구에서 사재를 털어 《녹색평론》 발행을 시작했다. 1991년 11월1일자로 시작된 잡지의 창간사는 김 편집인이 그 여정을 시작한 이유를 잘 설명하고 있다.

“거의 파국을 향하여 질주하고 있는 산업문명의 이 압도적인 추세 속에서 우리의 보잘것없는 작업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게다가 이 작업이 불가피하게 삼림파손에 이바지한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의 마음은 실로 착잡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인간을 포함한 수많은 생명체들이 지구상에서 지속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가능성이 대단히 불투명해지는 현실에 직면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은 그렇다 치고 우리의 아이들은 어떻게 될지, 그 아이들이 성장하여 사랑을 하고 이번에는 자기 아이들을 가질 차례가 되었을 때 그들의 심중에 망설임은 없을까–하는 보다 절박한 심정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다.”

그 고통은 김 편집인이 세우고 있는 지성의 큰 기둥을 내놓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 기둥에 이 시대에 드문 지성들을 찾아냈고, 한 자 한 자 자신의 몸에 조각을 내는 것 같은 고통 속에서 작업했다. 아래는 《녹색평론》 창간사다.

“지구상에서 사람이 삶을 영위하는 올바른 방식은 과연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근본적으로 성찰할 것을 요구하는 진실로 심오한 철학적, 종교적 문제에 직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어처구니없기도 하고 끔찍스럽기도 한 사태를 극복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결국 우리들 각자가 자기 개인보다 더 큰 존재를 습관적으로 이식할 수 있게 하는 문화를 회복하는 일일 것이다.”

이후 173호까지 발행된 책의 주요 테마는 생태를 기반으로 했다. 또 공동체, 통일 문제, 생태농업, 지역 문제 등을 다루었지만 한·미 FTA, 4대 강, 세월호, 코로나 팬데믹 등 당면한 문제도 외면하지 않았다. 최근 《녹색평론》이 주목한 것은 인공지능과 코로나 팬데믹이었다. 김 편집인으로서는 인공지능이 스스로 생각한 미래 생태에 어떤 영향을 줄지 고민했고, ‘인공지능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170호 메인테마)을 통해 고민했다. 최근에 김 편집인을 사로잡은 주제는 당연히 코로나 팬데믹이었다. 금년 5~6월호는 주제를 ‘코로나 환란, 기로에 선 문명’으로 했고, 자신의 마지막 발행호가 된 7~8월호도 ‘코로나, 그린뉴딜, 기후위기’로 잡았다.

 

가장 낮은 자세로 문화·역사·예술 전반 다뤄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특수한 상황에도 이를 보는 시선에 렌즈 하나가 더해졌을 뿐 현상은 별다른 차이가 없다. 이번 호에 실은 강수돌 교수의 ‘한국형 뉴딜과 재난자본주의’나 홍기빈의 ‘균형재정론은 틀렸다’는 오래전부터 고민해 온 기본소득에 관한 것이다.

또 코로나 팬데믹에 관한 프랭크 스노든의 ‘팬데믹의 역사가 가르쳐주는 것’이나 농업·농촌, 의료국제주의, 미국 내 흑인인권 등의 원고도 《녹색평론》의 오랜 주제들과 연관돼 있다. 김 편집인 역시 5~6월 발간사에서 고대 아테네를 무너뜨린 역병, 중세 페스트를 말하면서 미봉책이 아닌 근본적인 대책을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특히 백신이나 치료제에 몰두하기보다는 사람들의 면역력을 키우기 위해 오염되지 않은 맑은 대기와 물을 확보하고, 건강한 먹거리의 토대인 농토와 자급 지향의 생태적 농사를 보호·장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7~8월호 중간에 실은 ‘코로나 시즌, 12개의 단상’은 고인의 마지막 집필 원고가 됐다. 코로나 이후 3개월간 칩거생활을 독백하듯이 적은 단상에서 자신의 마지막을 예견한 듯한 “불안의 시대에 우리가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는 데 동아시아의 ‘인명재천’ 철학보다 더 좋은 약이 있을까”라는 말이 있어 안타까움을 더한다.

또 김 편집인은 말한다. “공생을 위한 필수적인 덕목은 단순 소박한 형태의 삶을 적극 껴안으려는 의지(혹은 급진적 욕망)이다. 그래야만 풀들의 웃음과 울음도 들리고, 세상이 진실로 풍요로워진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바이러스는, 공생의 윤리를 부정하는, 그리하여 우리 모두의 면역력을 끊임없이 갉아먹는 ‘탐욕’이라는 바이러스다.”

지난 30여 년간 세상에 가장 낮은 자세로 문학, 역사, 예술 전반에 대한 논쟁을 던졌던 시대사적인 인물이 세상을 떴다. 나희덕 시인은 자신의 SNS에 이렇게 썼다.

“수술 마치고 이제 집에 돌아와 선생님과의 긴 세월을 헤아려본다. 마취가 풀려 통증이 느껴지고 눌러둔 슬픔도 터지기 시작한다. 선생님, 부박하고 한심한 이 세상 때문에 많이 힘드셨지요? 평안히… 부디 평안히…고통 없는 세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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