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무책임한 연목구어의 구호 ‘협치’
  • 김만흠 한국정치아카데미원장ㆍ정치학박사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7.07 17:00
  • 호수 160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국회 상임위원장이 여당 소속 의원들로만 구성된 채 21대 국회가 본격 개원했다. 의석을 감안해 여야가 분점했던 1988년 13대 국회 이래의 관행이 깨졌다. 제1야당 미래통합당은 상임위 출범에도 불참했다. 신민당이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며 국회 개원을 거부했던 1967년의 7대 이래 처음이다. 여야 정당들이 원했던 바는 아니다. 겉으론 서로가 협치를 내걸었지만, 결과는 정반대가 됐다.

국회 상임위원회 구성을 위한 여야간의 협상이 강대강 대치로 계속되며 '일하는 국회'를 내세운 '21대 국회'는 개원식 조차 열지 못하고 있다. ⓒ연합뉴스

협치, 일반적인 뜻으로는 너무 싸우지 말고 상대를 배려하면서 협력해 다스리자는 의미일 거다. 우리 정치에서 국정운영의 최고 권력은 대통령이니 협력적인 국정운영의 관건은 대통령에 달려 있다. 국회에서의 협치는 다수당, 다수세력에 달렸지만 대통령 권력과 함께하는 여당의 행보가 중요하다.

대통령의 리더십에 따라 협치의 국정운영을 조금은 기대할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도 취임사에서 협치를 내세우고 야당과 함께하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다. 문 대통령의 그런 리더십은 취임사의 구호에 그쳤다. 물론 한쪽이 주도권을 가졌다 하더라도 협력은 상호관계이니 상대적인 책임이 있다. 그래서 그동안의 협치 실패를 두고 여당은 야당의 발목 잡기 탓을 하고, 야당은 대통령과 여당의 일방적 국정운영 탓을 했다.

협치를 말하지만, 여야 관계나 현행 정치체제를 보면 우리 정치에서 협치는 모호하다. 정치 구조적으로는 오히려 협치와 상반되는 승자 독식 체제, 극단적 진영 대립의 정치다. 현실은 오히려 협치와는 대비되는 구조다. 역설적인 구호만 내세우면서 실패의 책임은 상대에게 돌리는 상황만 반복된다. 그러면서 실제 정치의 현실은 협치와는 더 멀어진다.

우리 정치에서 협치의 개념은 초기에 시민사회가 정부 운영에 참여하며 공동으로 다스리는 사회 질서(governance)를 뜻했다. 그러다가 집권여당의 일방주의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협치를 쓰게 됐던 것이다. 정치세력들이 다른 세력과 협력해 공동으로 다스리는 체제는 연합정부, 연정이다. 서로 공동의 권력을 가지거나 분점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협치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처럼 여야가 승자 독식으로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협치는 집권세력의 포용력 정도에 달려 있을 뿐이다. 야당의 참여라는 것도 정부·여당에 동조해 주는 것 외에는 견제 역할을 위한 활동이다. 연합정부와 달리 야당은 국정운영의 주체가 아닌 야당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여야정 국정상설협의체’라는 황당한 기구도 상정돼 있다. 대통령과 정부가 무당파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면, 여야 모두 참여해 국정을 협의할 수 있다. 그럴 경우 사실 여야라는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고 불필요하다. 현재의 체제에서 야당이 상설협의체에 참여한다면 무엇을 하겠는가? 정부로부터 정보와 국정계획을 듣고 의견을 개진하거나 참모 역할을 하는 것이다.

야당 지도부 역할이 정부·여당의 참모 역할을 하는 건 아니다. 여당이 기대하는 협치는 어렵다. 함께하려면 권한과 책임을 갖는 연합정부가 돼야 한다. 또 정부 입장에 대한 의견 개진은 국회의 핵심 기능 중 하나다. 국회가 제대로 가동되면 될 일이지, 여야정 협의체가 필요한 건 아니다. 현재의 승자 독식 대통령제에서 권한도 없는 야당과 더불어 국정협의체를 가동하자는 건 연목구어의 허구이거나, 실패가 예정된 무책임의 정치다.

협치의 국정운영이 필요하다.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방향도 그것이다. 그러나 현행 체제에서 협치는 연목구어의 무책임한 구호일 뿐이다. 승자 독식과 극단적 진영대립의 정치를 협치가 가능한 체제로 바꾸는 것이 선행 과제다.

※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