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콘크리트 혼맥’ 이면의 일감 몰아주기 논란
  • 이석 기자 (ls@sisajournal.com)
  • 승인 2020.07.08 10:00
  • 호수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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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가문 간 혼맥 구도 더욱 공고해져…‘그들만의 잔치’ 될까 우려도

재벌가 자제와 일반인의 결혼 소식이 최근 잇달아 언론을 통해 흘러나왔다. 보수적인 재계도 과거처럼 집안을 따져 혼맥을 구성하기보다 자녀의 선택에 따라 결혼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례는 일부에 불과하다. 재벌 간 혼맥 문화는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재계 관계자들의 공통된 전언이다.

재계 사정에 밝은 한 관계자는 “연예결혼으로 알려진 몇몇 재벌가 자제들의 결혼도 엄밀히 따져보면 정략결혼인 경우가 많다”며 “재벌 간 혼사는 단순히 자제들의 결혼이 아니라 하나의 사업 영역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아모레퍼시픽-범삼성 新혼맥 형성되나

최근 결혼을 전제로 교제한다는 사실이 알려져 주목을 받은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의 장녀 서민정씨와 홍석준 보광창업투자 회장의 장남 홍정환씨가 대표적이다. 서씨는 2017년 아모레퍼시픽 평사원으로 입사했다. 이후 중국 장강상학원(CKGSB)에서 경영학 석사(MBA) 과정을 마치고 지난해 10월 아모레퍼시픽 뷰티영업전략팀에 재입사했다.

직급은 과장급인 ‘프로페셔널’이다. 하지만 서경배 회장이 현재 슬하에 두 딸만 있는 관계로 서씨가 유력 후계자로 거론된다. 서씨는 현재 그룹 지주회사 격인 아모레퍼시픽그룹의 지분 2.66%를 보유하고 있다. 장내 매도로 지분율이 소폭 하락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서경배 회장에 이은 개인 2대 주주로 등재돼 있다.

홍정환씨는 보광창업투자에서 투자심사 업무를 총괄하고 있다. 고 홍진기 보광그룹 창업자의 손자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부인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 홍석현 중앙미디어네트워크 회장, 홍석조 BFG리테일 회장의 조카이기도 하다. 두 사람이 결혼하게 될 경우 아모레퍼시픽과 범삼성가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새로운 재벌 가문 간 혼맥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회사 측은 개인적인 만남이라고 일축했다. 두 사람은 올해 초 지인 소개로 처음 만났다. 이후 결혼을 전제로 교제 중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지난 6월27일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 영빈관에서 양가 친척들이 참석한 가운데 약혼식도 올렸다. 그럼에도 재계에서는 두 사람의 결혼을 개인보다 일종의 ‘혼인 동맹’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실제로 재계 10대 가문 오너 일가 3명 중 1명은 재벌가 후손과 혼인했다. 인맥연구소 ‘리더스네트워크’가 지난 2017년 삼성, 현대, SK, LG, 롯데, 한화, 한진, 두산, 효성, 금호 등 10대 재벌 가문 오너 일가 중 결혼한 것으로 확인된 310명을 조사한 결과 30.3%인 94명이 재벌 가문 후손과 결혼했다. 과거 ‘정경유착’으로 비판받았던 관료나 정계는 각각 14.8%와 4.5%에 불과했다.

재벌 가문 후계자 간 결혼은 시간이 갈수록 더 늘어나는 추세다. 경영 성적 평가 사이트 ‘CEO스코어’의 2018년 조사에 따르면 재벌끼리의 결혼은 전체 367건 가운데 50.7%(186건)를 차지했다. 부모 세대에서는 전체의 49.3%(205건 중 101건)였는데, 자녀 세대로 넘어오면서 52.2%(162건 중 85건)로 비율이 다소 높아졌다.

박주근 CEO스코어 대표는 “그들만의 리그가 더욱 공고해졌다는 방증”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산업화 초기 시대에는 정부가 인허가권을 갖고 있었다. 정부가 돈줄을 쥐고 흔들다보니 정·관계와 정략결혼이 많았다”면서 “최근 들어 국내 기업들이 글로벌화되면서 정·관계의 혼맥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됐다. 재계 순위가 상위권으로 올라갈수록 이런 경향이 더 뚜렷해진다”고 설명했다.

자연스럽게 파생되는 것이 바로 사돈 기업 일감 몰아주기였다. 재계 혼맥의 중심으로 꼽히는 LG그룹이 대표적이다. 구광모 LG그룹 회장은 2009년 10월 정기련 보락 회장의 장녀와 결혼했다. 우연의 일치일까. 결혼 이후 보락의 주요 매출처로 LG생활건강이 등장했고, 매출 의존도가 해마다 상승하면서 눈총을 받아왔다.

논란이 계속되자 구 회장의 장인과 장모, 처제 등이 지난해 구 회장과의 특별관계를 해소했다. 이들은 현재 (주)LG나 LG하우시스, LG전자 등의 지분을 일부 보유하고 있는데, 2018년 구 회장이 (주)LG의 최대주주가 되면서 특수관계인으로 전환됐다. 이에 부담을 느낀 처가 식구들이 지난해 경영 참가 목적이 없다는 확인서를 회사 측에 제출하면서 특별관계에서 제외됐다.

범(汎)현대가에도 사돈 몰아주기 논란이 적지 않다. 현대차그룹의 경우 현대글로비스와 현대제철, 현대건설 등을 통해 사돈 기업인 삼표를 지원하거나 통행세를 받게 한 의혹을 받아왔다. 정몽구 회장의 장남인 정의선 수석부회장과 정도원 삼표그룹 회장의 장녀 정지선씨가 1995년 결혼한 이후 현대차그룹이 사돈 기업에 일감을 몰아줬다는 것이다.

일례로 현대제철은 과거 삼표그룹 계열 삼표기초소재에 철광석 정제 부산물인 슬래그를 독점 공급했다. 삼표기초소재는 일부만 자체 소화하고, 나머지는 마진을 붙여 다른 시멘트 업체에 다시 매각하면서 업계의 강한 반발을 샀다. 논란이 확산되자 현대제철은 삼표기초소재에 대한 슬래그 공급을 중단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현대차그룹과 삼표를 둘러싼 일감 몰아주기 논란이 계속됐다.

 

사돈 기업 일감 몰아주기 여전히 ‘눈총’

이 밖에도 정몽윤 현대해상화재보험 회장의 경우 범현대가 기업들을 동원해 처가 기업을 도와준 의혹을 받고 있다. 정 회장의 지원으로 이 회사는 2009년 매출 53억원에서 425억원으로 10년 만에 8배 이상 증가했다. 태광그룹의 경우 계열사인 흥국생명을 통해 이호진 전 회장의 매형 자녀들이 운영하는 회사에 일감 몰아주기를 하다 시민단체의 강한 반발을 샀다. 대상그룹의 경우 식자재 유통 전문업체인 대상베스트코를 앞세워 사돈 기업인 금호아시아나그룹에 삭자재를 납품해 왔다. 재계가 여전히 그들만의 혼맥으로 범접할 수 없는 성을 쌓아두고 ‘나눠 먹기식’ 부를 창출하고 있는 것이다.

공정위나 국세청 등은 그동안 ‘경제 민주화’와 ‘부의 편법상속 막기’를 위해 일감 몰아주기를 규제해 왔다. 문재인 정부 들어 공정위가 총수 일가를 검찰에 고발해 실형으로 이어진 사례도 나왔다. 하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사돈 기업 간 거래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고 기업 지배구조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지적한다. 합법과 편법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사돈 간 거래’는 아직까지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다는 점에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이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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