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란의 역사 살아 숨 쉬는 경남 고성 ‘천년의 고찰’
  • 영남본부 이상욱 기자 (sisa524@sisajournal.com)
  • 승인 2020.07.25 12:00
  • 호수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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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대 산사 여행 떠나기…경남 고성의 옥천사·운흥사·장의사

경남 고성군은 남해의 한려수도와 접하고 있다. 고성군의 면적은 서울시 면적의 85% 크기지만, 인구는 2020년 6월 기준으로 5만1811명이다. 때 묻지 않은 자연과 한적하고 여유로운 풍경을 만날 수 있다. 그야말로 코로나19를 피해 사람 왕래가 비교적 적고 청정한 자연을 즐길 수 있는 최적화된 여행지다. 도처에서 목격되는 문화재와 자연환경은 품격 있는 여름 여행을 보장해 준다.

자연 속에서 한숨 돌릴 방법을 찾는다면 고성의 산사(山寺)로 여행을 떠나면 된다. 고성의 5대 사찰은 전국적으로도 이름이 높다. 산속에 자리 잡은 고즈넉한 사찰은 숲과 계곡을 따라 걸으며 사색하고 마음을 비워내기에 좋다. 그곳에는 특별한 풍경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이야기도 있다. 걷기 좋은 길과 역사 이야기까지, 계승사·문수암과 더불어 고성 5대 고찰로 불리는 옥천사와 운흥사 그리고 장의사를 소개한다.

경남 고성군 개천면 연화산에 있는 옥천사 ⓒ고성군
경남 고성군 개천면 연화산에 있는 옥천사 ⓒ고성군

• 옥천사와 옥샘…임진왜란 때 승병 훈련장

고성 옥천사(玉泉寺)는 연화산에 자리 잡은 천년 고찰이다. 연화산을 찾았다면 한 번쯤 마주쳤을 사찰. 옥천사는 연꽃을 닮은 산 북쪽 기슭에 있다. 연꽃의 암술쯤 되는 자리, 돌 사이로 옥처럼 맑고 귀한 물이 솟는 옥샘이 있어 옥천사다. 옥천사는 부석사와 같이 신라 문무왕 때인 676년에 창건됐다고 추정된다. 의상대사가 화엄전교십찰(華嚴傳敎十刹)을 창건하면서 같이 세웠을 것이란 추측이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탄 대웅전은 효종 8년인 1657년 용성화상이 중창했고, 이후 1974년 경남유형문화재 132호로 지정됐다. 대웅전 뒤 작은 누각에서는 지금도 끊임없이 맑은 물이 솟아난다. 한때는 전국에서 가장 맑고 맛있는 물 100선에 뽑히기도 했다.

옥천사는 구한말까지 한 번에 200명에 이르는 스님이 주석하던 대찰이다. 한때는 기거하는 스님이 300명을 넘었고, 암자도 12개나 됐다. 승병의 근거지였다. 옥천사의 너른 마당은 430여 년 전 승병 훈련장이었다. 옥천사 승려들은 스스로 의승군을 조직해 왜군에 맞섰다. 호국안민의 가람 중에서 첫손에 꼽힐 정도였다.

옥천사의 배치는 독특하다. 대다수 사찰이 대웅전을 중심으로 개방적으로 배치돼 있는 반면, 옥천사는 대웅전 앞에 자방루가 있다. ‘꽃향기가 점점 불어나 멀리 퍼져 나가는 누각’이라는 의미를 지닌 자방루는 영조 21년(1745년) 창건된 목조건물이다. 자방루는 승장이 훈련을 지휘하거나 비가 올 때 승군의 실내교육장으로 쓰였다.

경남 고성군 하이면 와룡산에 있는 운흥사 ⓒ고성군
경남 고성군 하이면 와룡산에 있는 운흥사 ⓒ고성군

• 이순신이 세 번 찾은 운흥사…290년째 영산대제 열어

고성읍으로부터 서쪽으로 30여km 거리. 그 길 끝 와룡산에 구름이 이는 절집 운흥사(雲興寺)가 있다. 고성의 5대 사찰 중 하나인 운흥사는 신라 문무왕 16년인 676년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일설에는 고려 충정왕 2년인 1350년에 창건됐다고도 한다. 운흥사 돌계단을 밟고 올라서면 제일 먼저 보이는 보제루가 마치 성벽 같다. 32개의 커다란 기둥이 떠받친 보제루 뒤로 대웅전과 영산전이 서 있다.

영조 7년(1731년)에 중건된 대웅전은 경남도문화재 제82호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묵직한 맞배지붕 건물이다. 현존하는 괘불 중 가장 큰 괘불탱과 궤(보물 제1317호)도 운흥사에 보관돼 있다. 괘불탱은 가로 8.18m, 세로 12.72m 크기로, 영조 6년(1730년) 의겸과 이연 등 20여 명의 화사가 함께 그린 것이라 전한다. 지금은 1년에 한 번, 영산대제 때만 외출해 사부대중 앞에 선다.

운흥사가 위치한 하이면은 바다와 육지, 영남과 호남이 만나는 곳이다. 이런 지리적 이유로 운흥사는 영남 승병의 본부였다. 바다와 멀지 않은 데다 산중 절집이니 왜구를 칠 전략을 세우는 본부로 제격이었다. 운흥사는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가 지휘하는 6000여 명의 승병이 머물렀다. 당시 운흥사는 지금과 달리 절집만 29동에 천진암과 약서암 등 모두 아홉 개의 암자가 있었다. 임진왜란의 두 명장 이순신과 김시민은 사천과 삼천포에서 수륙양동작전을 펼치곤 했는데, 이들은 운흥사에서 사명대사와 만나 작전을 짰다. 이순신 장군이 전략을 짜기 위해 운흥사를 찾은 것만도 무려 세 번이나 됐다고 한다.

숙종 재위 때부터 지금까지 290년간 매년 봄이면 운흥사 마당에서 국난 극복을 위해 싸운 승병, 지방 병, 관군, 수군들의 영혼과 호국영령의 넋을 기리고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영산대제가 열린다. 전국 절집 중 유일한 승병 제사다. 항간에는 영산대제를 세 번 보면 극락에 간다는 말이 있다.

경남 고성군 거류면 거류산에 있는 장의사 ⓒ고성군
경남 고성군 거류면 거류산에 있는 장의사 ⓒ고성군

• 천 년 넘게 한반도와 임진왜란을 지켜본 장의사

해발 572m의 나지막한 거류산 중턱에는 자그마한 절집이 있다. 고성에서 가장 오래된 절집인 장의사(藏義寺)다. 장의사 일주문을 지나기 전 주차장에 서서 마을을 내려다보면 당동만이 한눈에 들어온다. 거류산 정상부의 거북바위에서 보면 당동만은 한반도 모양이다. 당동만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화당리다. 화당리는 이순신 장군이 적진포해전을 치른 곳이다. 장의사는 1000년이 훌쩍 넘는 세월 동안 한반도를 내려다보고, 임진왜란을 지켜본 셈이다.

장의사는 ‘고성부거류산장의암중창기문’에 632년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기록돼 있다. 장의사 뒤 거류산 줄기를 더듬다 보면 자그마한 굴이 나온다. 신도들은 그 굴이 원효대사가 기도하던 곳이 아닐까 추측한다. 1885년 수해로 가람이 소실됐다. 임진왜란 때 화재로 전소됐다는 이야기도 있다. 지금의 장의사는 1891년 성담 법운대사가 중수한 것이다. 1920년에는 법정 스님의 스승인 효봉 스님이 장의사를 중건했다.

장의사 보광전에는 17세기 후반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석조관음반가상(경남유형문화재 제511호)이 봉안돼 있다. 1000년이 훌쩍 넘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장의사지만, 남아 있는 문화재는 이 석조관음반가상 하나뿐이다. 보광전 오른쪽에는 너른 마당을 두고 천불전이, 보광전 오른쪽 좁다란 계단 위로는 사성각이 있다. 사성각과 보광전 뒤로는 해풍을 맞고 대나무 숲 이슬을 먹고 자라는 죽로다전이 있다. 운해당 옆 작은 돌다리인 백운교는 이름만큼이나 하얀 돌다리다. 이 다리를 건너면 부도탑과 자연보탑을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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