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과 배제의 도시’ 강남은 어떻게 탄생했나
  • 감명국 기자·조규희 정치전문 프리랜서 기자 (kham@sisajournal.com)
  • 승인 2020.07.21 10:00
  • 호수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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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이후 ‘교육의 메카’로 인기 급상승

1960년대만 해도 한강 이남의 구(區)는 영등포구가 유일했다. 당시만 해도 영등포의 동쪽, 영등포와 성동의 중간이란 뜻으로 이 지역은 ‘영동’으로 불렸으며, 1970년대에 시작된 개발계획의 명칭도 ‘강남 개발’이 아닌 ‘영동 개발’이었다.

1960년대 서울은 이미 포화상태였다.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몰려든 시민들로 주택난 등 도시문제를 겪었으며, 휴전선에서 40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강북에 인구와 중요 시설이 집중돼 안보상의 우려를 낳았다. 이 외에도 강남은 지대가 낮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개발 가능한 공간이 넓다는 장점도 있었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 정권은 적지 않은 정치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즉 강남 개발은 △안보상에 따른 도심 기능 분산 △개발 가능 면적 △정치자금 △기존 서울 도심과의 인접성 등이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1966년 1월19일 제3한강교(지금의 한남대교) 공사가 시작됐고, 1967년 4월29일 당시 박정희 공화당 후보가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대선공약으로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강남 개발이 시작된다. 1971년 12월28일 완공된 공무원 아파트가 강남 최초의 아파트다. 논현동 22번지 7194평 부지에 5층짜리 아파트 12개 동으로 총 360세대다. 서울시 공무원 가운데 무주택자를 위한 아파트로 12평형과 15평형으로 만들었다. 이후 기업들이 앞다퉈 아파트 건설에 뛰어든다. 강남 지역의 부동산 투기와 관련된 기사는 1977년도부터 등장하며 최초 기사는 압구정 현대아파트 투기에 관한 것이었다.

영동 개발 당시 서울시청을 비롯해 112개 정부기관을 모두 옮기려 했으나 부서 반대와 비용 문제로 취소됐다. 일부 이전한 공공기관의 대표적인 예는 사법부와 검찰청이다. 서울시가 1979년 시청사 이전을 위해 사들인 서초동 2만5000평 부지로 법원과 검찰청이 이동했으며 중구 정동에 위치한 옛 부지는 서울시에 내줬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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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초 서울의 명문고로 불리던 5대 공립(경기·서울·경복·용산·경동)과 5대 사립(중앙·양정·배재·휘문·보성)학교가 대부분 강남으로 이전된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경기고, 휘문고, 서울고, 경기여고, 숙명여고 등이 강남으로 이동했으며 중앙고와 경복고를 제외한 대부분의 명문학교가 옮겨졌다. 경기고·서울고·숙명여고가 옮겨간 강남구와 서초구는 ‘8학군’의 시초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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