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흘’ 문제 [노혜경의 시시한 페미니즘]
  • 노혜경 시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7.25 17:00
  • 호수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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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라 호칭하면 가해자가 되니까 안 된다고?

어이없는 소동이 있었다. 8월17일을 광복절 대체휴일로 삼아 사흘간 연휴로 한다는 발표에, 주로 젊은 세대가 3일간인데 왜 사흘이라 부르느냐고 항의한 것이다. 요즘 청년들이 정말로 사흘을 4일이라고 알고 심지어 ‘4흘’로 쓰기도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이 든 사람들은 개탄할 사건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 무지의 소산일까? ‘당연히’ 배웠어야 할 ‘사흘’이라고 단정하면서 비웃는 사람들을 보며, 뜬금없는 생각이 든다. 그들에게 당연한 것이 젊은 세대에게 당연하지 않다면 그 반대도 참이라는 것.

같은 단어를 서로 다르게 이해하는 문제에서부터 같은 사실을 서로 다르게 인식하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의 특정 연령대와 다른 연령대 사이엔 이미 심연이 들어서 있다. 에둘러 말하자. 내가 휴머니즘 이후의 제2계몽주의라 부르는 페미니즘 운동과 그 언어에 대한 그야말로 제각각의 이해가, 세대 간 단절이라는 층위와 결합하면서 서로 다른 심각도로 이해된다.

1990년대 중반 대학가에서 반성폭력 운동의 열풍이 불었을 때, 학생들이 말하는 ‘성폭력’이 ‘강간’ 같은 중대범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경미한 성희롱이나 가벼운 추행을 포괄하는 언어임을 알고는 당혹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 성폭력이란 명명이 실제로 성폭력을 제어하는 효과적 명명임을 깨닫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얻어터지면서 당하는 성폭행 못지않게 아무리 항의해도 시정되지 않는 성희롱이나 스스로를 물건처럼 느끼게 하는 성추행은 영혼을 크게 손상시킨다. 알고 나니 그 언어가 필요해졌다.

피해자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나는 피해자라는 말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2000년대 초반 개혁당 시절 당내 성폭력 사건을 다루면서 피해자 대신 생존자라 하자고 제안한 일도 있다. ‘성적 수치심’ 대신 ‘성적 빡치심’이라고 말해야 한다는 어떤 네티즌 같은 마음이다. 그런데 피해자라는 용어는, 성폭력 피해를 고발하는 당사자를 부르는 이름으로 이미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다. 이제야 이 말을 배운 정치인, 언론인, 일반 남성이 매우 많다고 해서 이 말이 ‘4흘’ 같은 말은 아니다. ‘사흘’ 같은 말, 아니 훨씬 정확하고 중요한 말이다.

7월22일 서울 중구에서 열린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폭력 사건 2차 기자회견’에서 김재련 변호사가 발언하고 있다. ⓒ시사저널 최준필
7월22일 서울 중구에서 열린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폭력 사건 2차 기자회견’에서 김재련 변호사가 발언하고 있다. ⓒ시사저널 최준필

피해자에게 가해진 ‘괴이한’ 2차 가해들

그를 잃어서 슬프고 그를 그렇게 잃어서 괴로운 날들이었다. 시간이 가면 정리될 줄 알았더니, 사태가 점점 한심해진다. 이수정 교수 표현마따나 “괴이한 현상”. 고 박원순 시장을 고소한 피해자를 향한 2차 가해가 점입가경이다. 고인을 옹호하고자 피해자를 핍박하거나 모욕하는 행태가 심할수록 피해자를 보호하고 사건의 실체를 낱낱이 밝혀야 한다는 압력도 커진다. 나도 박원순을 잃어서 슬픈데 왜 나로 하여금 고인의 반대편에 서도록 하는가.

피해자의 말에 귀 기울이고 고인이 저질렀다고 추정되는 일들을 명확하게 밝혀 비판하면서도 그의 지나간 시간에 고마워하는 게 왜 불가능한가. 피해자를 지워 고인을 기리는 것이 더 불가능하다. 오히려 이 ‘괴이한’ 2차 가해 현상 때문에라도 이 사건은 그가 남긴 좋은 유산은 다 잊히거나 사라지고 먼 훗날 “성추행 혐의로 고소된, 64세 박모씨가 숨졌다”(머니투데이 7월12일자)라고만 기억될 가능성이 훨씬 크다. 왜 모를까. 피해자라 부르지만 않으면 가해자가 아니라고 믿는 납작한 지성 앞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야말로 기성세대판 ‘4흘’ 문제다. 그런데 ‘4흘’과 달리 비극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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