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가 후계구도 변수로 떠오른 ’성년후견 심판’
  • 이혜영 객원기자 (applekroop@naver.com)
  • 승인 2020.08.01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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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이어 한국타이어도 심판 절차 밟게 돼
조양래, 장녀에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답답함 토로
조양래 한국테크놀로지그룹 회장 ⓒ한국테크놀로지그룹 제공
조양래 한국테크놀로지그룹 회장 ⓒ한국테크놀로지그룹 제공

후계 구도를 결정해야 할 재벌가에 새로운 변수가 등장했다. 롯데에 이어 한국타이어도 재산 상속을 놓고 '성년후견 심판'을 받게 될 상황에 처했다. 고령의 부모가 자녀들 중 어느 한 쪽에 무게를 실으면, 나머지 자녀 또는 가족이 정상적인 판단에서 나온 결정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성년후견 심판청구 카드를 꺼내드는 모양새다. 

성년후견 심판이 진행되면 상속과 연계된 법원의 객관적인 판단을 받게 된다는 점에서 자녀 간 분쟁을 정리할 수 있는 명분을 얻을 수 있다. 반대로 내부 정리에 실패한 약점을 그대로 노출시킨다는 점에서 기업 이미지와 경영에 위협 요소로 작용할 가능성도 크다.    

1일 법원 등에 따르면, 조양래(83) 한국테크놀로지그룹 회장의 장녀인 조희경 한국타이어나눔재단 이사장은 지난달 30일 서울가정법원에 부친을 대상으로 성년후견 개시 심판을 청구했다. 조 회장이 막내 동생인 조현범 사장에게 보유주식 전량을 2400억원에 매각하며 승계 구도를 결정지은 지 약 한 달 만이다.

성년후견 제도는 질병이나 장애, 노령 등 정신적 제약으로 사무처리 능력이 지속해서 결여된 성인에게 후견인을 지정해 주는 제도다. 법정후견과 임의후견으로 구분된다. 이 중 법정후견은 정신적 제약 정도와 후견 범위에 따라 성년후견·한정후견·특정후견으로 나뉜다. 한정후견은 사무처리 능력이 부족한 경우로, 일부분에서 후견인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조 이사장 측은 법원에 성년후견 심판을 청구하면서 조 회장의 결정이 자발적으로 이뤄진 것인지 확인해야 한다는 취지를 내세웠다. 조 회장이 직전까지 주식을 넘길 계획이 전혀 없었고, 공익재단 등 사회에 환원하려는 의사가 있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조양래 한국테크놀로지그룹 회장의 장남 조현식 한국테크놀로지그룹 부회장(왼쪽)과 차남 조현범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 사장 ⓒ 연합뉴스
조양래 한국테크놀로지그룹 회장의 장남 조현식 한국테크놀로지그룹 부회장(왼쪽)과 차남 조현범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 사장 ⓒ 연합뉴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사위인 조 사장은 6월 중 시간외 대량매매로 조 회장 몫 한국테크놀로지그룹 지분 23.59%를 모두 인수해 42.9%의 지분율로 최대주주에 올라섰다. 큰아들인 조현식 부회장(19.32%)과 두 딸인 조 이사장(0.83%), 조희원씨(10.82%)의 지분을 합해도 30.97%로, 조 사장과 큰 차이가 난다. 조 회장이 차남에 주식을 매각하기 전까지는 조 사장(19.31%)과 형인 조 부회장의 지분이 거의 비슷했다. 

조 이사장의 이같은 움직임에 조 회장은 입장문을 내고 "나이에 비해 매우 건강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반박하며 "첫째 딸이 왜 이러는지 정말 모르겠다"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한국테크놀로지그룹 관계자도 조 회장이 본인 생각을 말한 뒤 이를 정리한 글을 일일이 확인하는 작업을 거치는 등 의사결정과 표현 등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강조했다.

조 이사장 측은 부친의 반박에 대해 "예상한 반응"이라며 "법적 절차대로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조 이사장이 심판청구를 취하하지 않는다면, 조 회장은 법원에 직접 출석해 재판부 심문을 받고 의사 감정을 통해 정신상태를 확인받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롯데가(家) 경영비리 혐의로 재판을 받은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왼쪽부터), 신격호 롯데 창업자,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 3부자가 2017년 12월22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선고공판이 끝난 뒤 각각 법정을 나서는 모습 ⓒ 연합뉴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왼쪽부터), 고(故)신격호 롯데 창업자, 신동주 SDJ코퍼레이션 회장 ⓒ 연합뉴스

재벌가가 법원에서 성년후견 관련 판단을 받는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올해 1월 별세한 고(故)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도 생존 당시 가족 간 분쟁으로 이 절차를 거쳐야했다.

2015년 12월 신 명예회장의 넷째 여동생 신정숙씨는 당시 94세였던 오빠의 정신 건강에 이의를 제기하며 법원에 성년후견인 지정을 요청했다. 신 회장 여동생 측 대리인은 "가족 간 논란으로 불미스러운 상황이 이어지는 것을 보다 못해 성년후견인 신청에 나선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 명예회장에 대한 성년후견인 지정 여부는 후계 구도를 둘러싸고 벌어진 차남 신동빈 현 롯데그룹 회장과 장남 신동주 SDJ코퍼레이션 회장의 '왕자의 난' 때문에 더욱 큰 주목을 받았다. 

신동빈 회장 측은 신 명예회장이 치매를 앓고 있어 정상적인 판단이 불가능하다고 했고, 신동주 회장은 고령임에도 경영 현안을 직접 챙길 수 있을만큼 건강한 상황이라며 상반된 주장 속에 여론전을 이어갔다. 

결국 법원은 장기간 심리를 거쳐 신 명예회장에 대한 한정후견인을 지정했다. 법원이 중증 치매 등으로 신 명예회장이 정상적 판단을 하지 못한다는 주장에 손을 들어준 것이다. 

한편, 법원에 따르면 성년후견 제도는 2013년 7월 도입된 이후 해마다 이용 건수가 계속 늘고 있다. 작년 말 기준 후견 개시는 총 3112건으로 성년후견 2141건, 미성년후견 386건, 한정후견 379건 특정후견 202건, 임의후견 4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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