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님? 감독님? 어떻게 불러드릴까요
  •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8.23 12:00
  • 호수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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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와 연출을 밀고 당기기 시작한 배우들

오, 드디어! 정우성이 《보호자》로 메가폰을 잡았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든 생각이다. 20여 년 전부터 장편 데뷔에 대한 의지를 공공연히 밝혀왔으니, 꿈을 이루기 위해 부단히도 달렸다. 상반기 촬영을 마친 《보호자》는 현재 후반 작업 중인 상황. 이제 ‘감독 정우성’을 만날 일만 남았다. 정우성의 ‘절친’ 이정재도 《헌트》(가제)로 감독 타이틀을 달 예정이다. 4년간 직접 집필하며 숙성시킨 프로젝트다. 정우성에게 공동 주연 제안도 했다고 하니, 성사된다면 《태양은 없다》 이후 21년 만의 재회다.

정우성, 이정재 외에도 배우들이 ‘디렉터스 체어’로 자리를 옮기는 일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오로라 공주》 《용의자X》 《집으로 가는 길》 등을 연출한 방은진은 ‘감독’이란 호칭이 배우보다 이제 더 어울리는 영화인이다. 하정우도 《롤러코스터》와 《허삼관》 두 편의 작품에 연출자로 이름을 올렸다. 유지태·박중훈·문소리·구혜선 역시 감독으로 관객을 만났고, 최근엔 김윤석과 정진영이 이 대열에 합류했다. 조은지도 장편 데뷔작 《입술은 안돼요》 촬영을 마치고 개봉 준비 중에 있다.

《보호자》로 장편영화 감독이 된 배우 정우성(왼쪽 사진)과《헌트》의 연출을 맡은 이정재 ⓒ시사저널 박정훈
《보호자》로 장편영화 감독이 된 배우 정우성(왼쪽 사진)과《헌트》의 연출을 맡은 이정재 ⓒ시사저널 박정훈

배우들은 왜 연출에 뛰어드나

배우들이 연출이라는 새로운 세계에 뛰어드는 이유는 뭘까. 일단 창작에 대한 애정이 강렬한 배우들에게 연출은 실패하더라도 도전해 보고 싶은 호기심의 세계다. 흔히들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라고 한다. 가령 배우가 아무리 훌륭한 연기를 펼쳐도 후반 작업 과정에서 감독의 결정에 따라 편집될 수 있는 게 영화다. 감독이 작품 전체를 총괄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며 관객과 직접 소통하고 싶은 욕구, 자기 목소리를 조금 더 반영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배우가 되기 전부터 ‘영화감독’이 꿈이었던 이들도 있다. 최근 《사라진 시간》을 내놓은 정진영이 대표적이다. 데뷔 36년 만에 감독 타이틀도 단 정진영은 “17세 때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57세 때 이루게 됐다”고 소회를 밝혔다. 유지태의 경우 조금 복합적이다. 일단 영화에 대한 애정이 연출의 출발은 맞다. 심지어 그는 메가폰을 잡기 위해 직접 회사를 차리기도 했다. 흥미로운 건 이 과정에서 그가 구사하는 전략이다. 감독으로서의 유지태는 자신의 비전과 취향을 아낌없이 드러낸다.

첫 장편 연출작 《마이 라띠마》는 불법 이주노동자의 현실을 다룬 작품이었다. 준비 중인 차기작 《안까이》에서는 탈북 여성의 삶을 다룰 예정이다. 즉 ‘배우 유지태’가 대중의 근거리에서 호흡한다면, ‘감독 유지태’는 사회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싶어 한다. 유지태가 롤모델로 삼는 이는 할리우드에서 활동했음에도 평생 독립영화의 정신을 지키며 작업을 한 배우 출신 감독 존 카사베츠다.

문소리는 대학원 과정을 밟으면서 만든 3편의 단편이 《여배우는 오늘도》란 제목의 옴니버스로 묶여 극장 개봉으로 이어지면서 감독으로 데뷔한 특이한 경우다. ‘학점 따기용’ 과제물로 지레짐작한다면 결과물 앞에서 미안해질 영화다. 문소리가 각본, 감독, 주연을 도맡은 영화에는 그 누구보다 충무로 영화계의 속살을 잘 알고 있는 연기파 여배우의 고단함이 풍자와 해학을 빌려 녹진하게 담겨 있다. 일련의 과정에 대해 문소리는 “연출은 평생 할 영화에 대한 애정을 더 높이는 방법이고,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한 의미 있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하정우 역시 연출과 연기가 서로를 보완한다고 믿는다. 그는 “연출을 하면서 무감각해지고 마비됐던 연기에 대한 열정을 확인하고 초심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고 전했다.

영화를 오래 하고 싶어 그 발판으로 연출에 직접 뛰어드는 경우도 있다. 넌버벌(비언어) 코미디 팀인 ‘옹알스’가 미국 라스베이거스 무대에 도전하는 이야기를 그린 다큐멘터리 《옹알스》로 감독 데뷔를 한 차인표는 전주국제영화제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느 순간부터 상업영화 대본이 안 들어오더라.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영화를 만들기로 했다. ‘평생 영화를 하고 싶어 연출을 시작했다’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롤모델이다.”

충무로의 산업화와 스타 시스템의 성장은 배우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열어주기도 했다. 스타가 영화 투자의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는 오늘날의 배급 환경에서, 배급사는 스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그의 연출에 힘을 보태기도 한다. 영화도 결국 사람과 사람이 하는 일이라 받은 만큼 갚게 되는 경향이 없지 않다. 다만 이럴 경우 연출 타이틀을 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신인 감독들에게 열패감을 안기는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사라진 시간》의 감독 정진영과 《미성년》을 연출한 김윤석
《사라진 시간》의 감독 정진영과 《미성년》을 연출한 김윤석 ⓒ연합뉴스

배우 출신 감독의 미덕과 한계

배우 출신 감독들의 미덕은 그 누구보다 배우의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부분의 좋은 사례는 《미성년》의 김윤석이다. 좋은 영화일수록 소외시키는 등장인물이 없는 법인데, 김윤석은 이 부분에서 매우 뛰어난 성취를 보여줬다. 주연배우들은 물론, 잠깐 등장했다가 퇴장하는 조연과 단역 배우들에게도 개성을 달아줬으니 영화는 생동감이 넘쳤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배우 출신 감독들의 약점이 되기도 한다. 연기를 돌보다가 전체 그림을 놓친 사례가 적지 않게 발견되기 때문이다.

할리우드와 달리 국내에서는 이들에 대한 편견이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결과물의 차이다. 할리우드의 경우 벤 애플렉, 조디 포스터, 로버트 레드퍼드, 에단 호크 등 감독으로서 두각을 드러낸 배우 출신이 많다. 그에 비하면 국내에서는 재미 면에서도, 만듦새 면에서도 아직 관객에게 탄탄한 믿음을 주는 이가 없다. 김윤석의 경우 비평 면에서 호평을 받았지만, 흥행에선 29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데 그치며 아쉬움을 남겼다. 그럼에도 배우들의 겸업은 이어질 것이다. 누가 말했더라. “현장에서 직접 보고 느끼는 것만큼 좋은 배움은 없다”고. 여러 감독과 작업한 경험은 이들이 믿는 든든한 밑천이다.

연출자로 오스카도 접수한 할리우드 배우들

《진주만》 《배트맨 대 슈퍼맨》 등으로 국내에도 많은 팬을 보유한 벤 애플렉은 2013년 《아르고》로 각색상과 편집상은 물론 최고의 영예인 작품상까지 수상하며 그해 오스카의 주인공이 됐다. 《아르고》는 1979년 이란 테헤란에서 시위대에 점령당한 미 대사관 직원들을 구출하기 위한 CIA의 실제 작전을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으로 벤 애플렉은 청춘 스타 이미지를 완전히 벗었다. ‘원조 꽃미남’ 로버트 레드포드와 ‘영원한 ‘보디가드’ 케빈 코스트너는 각각 《보통사람들》(1980)과 《늑대와 춤을》(1990)로 오스카 감독상과 작품상을 안았다. 비록 이들이 마틴 스코세이지의 《분노의 주먹》(1980)과 《좋은 친구들》(1990)을 제치고 수상한 점은 ‘오스카의 실수’로 전해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두 작품이 폄훼될 일은 아니다. 이 분야의 거성은 클린트 이스트우드다. 《용서받지 못한 자》 《밀리언 달러 베이비》로 오스카 작품상·감독상을 거머쥐며 서부의 총잡이에서 할리우드 거장으로 거듭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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