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바람의 손자’라 부르지 마라
  • 이상평 야구칼럼니스트 (tkdvud123@naver.com)
  • 승인 2020.08.29 17:00
  • 호수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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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이종범 기록 넘어 ‘꿈의 4할 타자’ 노리는 키움 이정후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속담이 있다. 일반적으로 혈육의 정이 깊음을 이르는 말로 사용되지만,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육체적 재능이 중요한 스포츠계에서는 유전자의 중요성을 의미하는 뜻으로 자주 사용된다.

그리고 이 속담은 최근 세계 야구계의 트렌드를 설명하는 속담이라고도 할 수 있다. 미국 메이저리그의 경우 페르난도 타티스 주니어, 블라디미르 게레로 주니어 등 2세 선수들이 유망주 평가에서 랭킹 상위권을 독점했고, 류현진의 소속팀인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경우는 야구인 2세 유망주들을 적극적으로 모아 팀을 꾸려 ‘혈통볼’ 야구를 한다는 얘기를 듣는다.

한국에서도 이런 흐름은 마찬가지인데, 박세혁·강진성·김동엽·유원상-유민상 형제 등 수많은 2세 선수들이 현재 1군에서 주축 선수로 활약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유명한 선수는 대한민국 야구계 최고 레전드 중 하나로 꼽히는 ‘바람의 아들’ 이종범의 아성을 넘보는 ‘바람의 손자’ 이정후일 것이다.

8월9일 서울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프로야구 LG와 키움의 경기. 4회말 무사 상황에서 키움 이정후가 안타를 치고 있다. ⓒ연합뉴스
8월9일 서울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프로야구 LG와 키움의 경기. 4회말 무사 상황에서 키움 이정후가 안타를 치고 있다. ⓒ연합뉴스

프로 입문 이후 최연소 기록 줄줄이 갈아치워

아마추어 시절부터 정교한 타격 능력과 뛰어난 야구 센스 등이 아버지를 연상시킨다는 평을 받아온 이정후는 키움의 전신인 넥센 히어로즈에 2017년 1차 지명을 받으며 KBO 역사상 최초로 부자(父子) 1차 지명이라는 기록을 세운다. 그러나 당시까지만 해도 ‘이종범의 아들’이라는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아버지 이종범은 KBO리그 역사상 가장 뛰어난 유격수로 꼽히고,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의 유격수 계보를 잇는 레전드였기 때문이다.

당연히 입단 전부터 아버지의 명성을 뛰어넘을 수 있을지, 또 그 명성이 주는 부담감에 눌리진 않을지에 대한 걱정 섞인 의문이 적지 않았다. 선수 자신도 이를 의식해서인지 1차 지명 이후 인터뷰에서 그간 이종범의 아들로 살아왔는데, 앞으로는 이정후의 아버지 이종범이라고 불릴 수 있도록 열심히 하겠다는 포부를 밝힌 바 있다. 그리고 입단과 동시에 자신의 목표를 이뤄내기 시작했다.

입단과 동시에 캠프와 시범경기에서 뛰어난 모습을 보여준 이정후는 순수 신인임에도 개막전 엔트리에 들며 시즌을 시작했고, 데뷔전부터 3안타를 때려내며 커리어를 화려하게 시작했다. 그리고 해당 시즌 1군에서 주전으로 올라서며 풀타임을 소화, 타율 0.324에 179안타(리그 3위), 111득점(리그 3위)을 기록하며 1994년 서용빈이 세운 신인 데뷔 시즌 최다 안타와 같은 해 유지현이 세운 신인 데뷔 시즌 최다 득점 기록을 갈아치웠다. 그러면서 신인왕을 수상했다. 양준혁이라는 거대한 경쟁자를 만난 아버지가 수상하지 못했던 신인왕이라는 점, 10년 만의 순수 신인왕 및 순수 고졸 신인왕이라는 점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이후 매년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며 2년 차와 3년 차 시즌 모두 골든글러브를 수상, 팀의 핵심 선수는 물론 국가대표팀에서도 추후 10년을 책임질 핵심 자원으로 발돋움하는 모습을 보였다. 2년 차인 2018년에는 타율 0.355, 3년 차인 지난해에는 타율 0.336을 기록하는 등 정확도를 끌어올렸다. 이정후는 만 21세가 되기 전에 535안타를 때려냈는데, 이는 KBO리그 역사상 만 21세 이하 역대 최다 안타 기록이다. 이 부분 역대 2위는 ‘타격 기계’라고 불리는 김현수인데, 그마저도 427안타로 개수 차이가 100개 이상일 정도로 격차가 크다. 또한 입단 첫해 시즌을 치르며 볼넷의 중요성을 깨닫고 선구안도 진일보했다. 성인의 몸이 돼 가면서 몸에 힘이 붙어 장타력도 끌어올리고 있는데, 첫해 2개, 2~3년 차 각각 6개에 불과했던 홈런도 올해는 61경기 만에 10개를 때려내면서 시즌 20홈런을 노리고 있다.

물론 아직까진 아버지의 아성에 미치지 못하지만, 이정후는 지난 몇 년간 활약을 통해 ‘이종범의 아들’이라는 수식어를 떼더라도 이미 리그에서 거대한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는 스타로 발돋움했다. 많은 전문가가 리그 최고의 타자 중 하나로 이정후를 꼽고 있고, 타격에 대해서는 벌써 권위를 인정받는 수준에 이르렀다. 또한 라이벌로 꼽히는 KT 강백호와 더불어 메이저리그 진출 가능성이 점쳐지는 타자이고, 실제로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의 관심도 끊이지 않고 있다. 이런 이정후가 아버지의 커리어 하이 기록에 도전할 수 있을지에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다.

8월9일 서울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프로야구 LG와 키움의 경기. 4회말 무사 상황에서 키움 이정후가 안타를 치고 있다. ⓒ연합뉴스
1993년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MVP로 선정된 해태 타이거즈의 이종범 선수. ⓒ연합뉴스

‘이종범의 아들’ 아닌 ‘야구선수 이정후’로 성장

아버지 이종범은 데뷔 2년 차인 1994년 프로 원년 백인천의 0.412에 이어 역대 2위에 해당하는 타율 0.393, 당시 단일 시즌 최다 안타 기록인 196안타, 19홈런 84도루를 기록하며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냈는데, 그가 대졸이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이미 성인의 몸으로 신체가 완성된 단계에서 프로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이정후는 조금씩 몸을 완성해 가고 있는 단계로, 아버지가 대기록을 달성한 나이까지는 아직도 2년여 정도의 시간이 남은 상황이다. 많은 전문가는 이정후가 몸이 완성된 이후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도루 분야를 제외하고는 아버지의 기록과 경쟁해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실제로 이정후는 2년 차였던 2018년 시즌 9월4일까지 타율 0.382를 기록하며 아버지의 기록에 도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몸이 완성되지 않았던 이정후가 이후 체력적으로 큰 어려움을 드러내며 타율이 추락해 0.355로 시즌을 마무리한 바 있다. 물론 운도 따라줘야겠지만, 이정후가 몸을 완성시킨다면 아버지의 기록과 경쟁해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이 신빙성을 얻는 이유다.

물론 이정후가 아버지의 타격 기록을 넘어서더라도 아버지 이종범은 체력 부담과 수비 부담이 큰 유격수 포지션에서 해당 기록을 달성해 냈다는 점에서 범접할 수 없다고 평가하는 팬들도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외국인 선수가 없었다는 점, 그리고 외국인 선수 유입 이후 리그 수준이 많이 발전했다는 점에서 충분히 유의미한 경쟁이라는 전문가들의 의견도 적지 않다.

대한민국의 대표 스포츠 부자는 차범근-차두리 부자다. 그러나 한 다큐멘터리에서 차두리는 박지성이나 손흥민만큼 축구를 잘하지 못해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한 것에 대해 언제나 죄송하고 마음이 아프다고 했고, 차범근은 ‘차범근의 아들’이라는 칭호 때문에 아들이 힘들어했던 것에 대해 미안하다고 밝혔다. 오랜 기간 유럽 리그에서 활약하고, 국가대표로 좋은 모습을 보였던 차두리도 현역 시절 내내 그런 부담감과 마음고생에 시달렸다. 그만큼 유명한 스포츠 스타의 길을 물려받은 자녀가 지고 있는 짐은 굉장히 무겁다.

이정후는 어린 시절부터 쇼트트랙, 골프, 축구 등 다양한 종목을 했다고 한다. 아버지 이종범은 한 방송에서 아들 이정후가 야구선수로 성공하지 못하면 아버지의 명성 때문에 비참한 인생을 살까봐 어떻게든 야구만은 시키지 않으려고 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이정후는 스스로 무거운 짐을 지기를 선택했다. 무거운 짐을 지고 나아가고 있는 이정후의 끝은 어디일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제 그는 ‘이종범의 아들’이 아니라 ‘야구선수 이정후’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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