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의 미국 시장 도전史
  • 하재근 문화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9.04 14:00
  • 호수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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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스터즈부터 BTS까지

K팝의 미국 시장 진출은 195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목포의 눈물》을 부른 이난영은 선구적인 걸그룹 제작자였다. 그와 남편(《오빠는 풍각쟁이야》를 작곡한 김해송)의 딸들(김숙자, 김애자)에, 이난영의 오빠인 작곡가 이봉룡의 딸 이민자(활동명 김민자)를 더해 걸그룹 김시스터즈를 만들었다. 이난영이 다재다능하게 육성한 김시스터즈는 미8군 무대에서 인기를 끌다가 실력을 인정받아 1959년 미국 라스베이거스 무대에 진출했다. 1960년대에는 당대 최고의 쇼 프로그램이었던 《에드 설리번 쇼》에 22회 출연했다. 한때 라스베이거스 고액 납세자 6위에 올랐을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이렇게 쇼무대에선 인정받았지만 오리지널 히트곡이 부족한 점이 한계였다. 일부 매체가 김시스터즈의 《찰리 브라운》이 빌보드 싱글 차트 7위에 올랐다고 보도했지만 낭설로 보인다.

한국 가수의 빌보트 차트 진출은 21세기에 접어들어서야 가능했다. 2001년에 김범수가 자신의 곡 《하루》를 영어 버전(《헬로 굿바이 헬로》)으로 리메이크한 것이 빌보드 핫 세일즈 차트에서 51위에 올랐다. 핫100 같은 메인 차트도 아니고, 한국계가 운영하는 레이블의 마케팅 지원으로 거둔 성과이긴 했지만 한국인의 이름이 빌보드 차트에 실렸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를 흥분하게 했었다.

2009년 보아의 앨범이 빌보드200 127위에 오르고, 원더걸스의 《노바디》가 핫100 76위에 오른 것이 본격적인 빌보드 메인 차트 진출의 출발점이다. 빌보드 진입을 위해 원더걸스 멤버들과 제작자인 박진영이 미국 곳곳을 누비며 바닥에서부터 홍보활동을 했다. 귀국 후 선미가 미국 생활을 회상하며 눈물을 흘렸을 정도로 강행군이었다.

하지만 단 한 주 동안 76위에 랭크된 성과에 만족해야 했다. 박진영은 소속사의 다른 가수들도 미국 시장에 진출시키려 했지만 미국 시장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 당시는 비영어권에 대한 편견이 심했고, 유튜브를 통한 공중전은 상상도 할 수 없어 일일이 바닥을 훑으며 자본을 투입해 프로모션해야 했던 시절이다.

ⓒ김시스터즈 앨범 자켓·블랙핑크 앨범 자켓
ⓒ김시스터즈 앨범 자켓·블랙핑크 앨범 자켓

유튜브 통해 한류 영향력 커져

본격적으로 신한류가 점화된 이후엔 한국 가수들의 빌보드 진출이 종종 일어났다. 하지만 높은 순위에는 오르지 못해 이름이 올랐다는 사실 자체로 만족하는 수준이었다. 2012년에 바로 그 사건이 터졌다. 《강남스타일》의 빌보드 2위 신드롬이다. 특별히 홍보할동을 하지도 않았는데 유튜브를 통해 저절로 터졌다. 유튜브가 K팝 세계화의 통로가 된 순간이고, 팝 역사에선 음반시장 이상으로 유튜브의 영향력이 확대되기 시작한 순간이다. 이때 이후로 빌보드 측은 유튜브 조회 수를 순위 산정에 반영하기 시작했다.

유튜브를 장악한 뮤지션이 한국에서 나왔다. 방탄소년단이다. 2015년 ‘화양연화 파트.2’로 앨범 차트인 빌보드200에서 171위에 오른 이래 최근엔 빌보드200 4연속 1위에 올랐다. 올해 발매할 앨범이 5연속 1위가 유력시될 정도로 최고의 팝스타로 우뚝 섰다. 뒤이어 슈퍼엠도 빌보드200 1위에 올랐고, NCT127 5위, 몬스타엑스 5위 등 높은 성적이 잇따랐다.

하지만 싱글 차트인 핫100에서 1위에 오르지 못한 점이 K팝에서 아쉬운 대목이었다. 방탄소년단은 엄청난 인기에도 《온》의 4위가 최고 성적이었다. 이번에 드디어 《다이너마이트》로 역사적인 핫100 1위에 올라 K팝의 60여 년 숙원을 풀었다. 걸그룹 블랙핑크도 빌보드200 24위, 핫100 33위(《하우 유 라이크 댓》)에 오르며 세계 최고 걸그룹으로 성장하고 있다. 이들은 앞으로 또 다른 역사를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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