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인의 왼발에 팀 재건 운명 맡긴 발렌시아
  • 서호정 축구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9.27 11:00
  • 호수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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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선수 위주로 대대적인 리빌딩 돌입, 그 중심엔 이강인…최근 프리키커 논쟁으로 비난도

발렌시아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축구클럽 중 하나다. 무려 3개의 축구클럽이 몰려 있는 축구 도시 발렌시아에서도 적장자로 통하고, 실제로 레알 마드리드·FC바르셀로나·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함께 스페인 프리메라리가(라리가)의 ‘빅4’로 꼽힌다. 라리가 우승 6회에, 8차례 코파델레이(스페인국왕컵) 정상에 오른 역사는 명가의 이미지를 보증한다. 오늘날 레알 마드리드와 FC바르셀로나의 양강 체제가 더욱 견고해진 라리가에서 21세기 들어 두 팀 외에 우승을 차지한 다른 팀은 발렌시아(2001~02, 2003~04)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2013~14)뿐이다.

하지만 그런 명성과 달리 지난 시즌 발렌시아는 리그 9위에 머물렀다. 암흑기로 불린 2015~16, 2016~17 시즌 연속 12위 이후 가장 부진한 성적이다. 시즌 중 3명의 감독이 사임하고, 부임하는 혼란이 반복됐고 선수단 내부에서도 반목이 이어졌다. 2014년 1억 유로를 투자해 구단을 인수한 싱가포르 출신의 구단주 피터 림은 실망했고 대대적인 리빌딩을 선언했다.

시즌이 끝나자마자 베테랑 중심의 주전 다수에게 “새 팀을 알아보라”고 통보했다. 주장인 다니 파레호를 비롯해 프랜시스 코클랭, 로드리고 모레노, 페란 토레스 등 주축 선수들이 떠났다. 그는 “발렌시아가 키워낸 어린 선수들을 중심으로 한 완전한 팀 개편이 새 시즌의 목표”라고 외쳤다. 그 목표를 위해 하비 그라시아 감독도 새로 선임했다.

ⓒPPE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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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스 출신 황금세대와 기존 주축 선수들 사이 내부 갈등

발렌시아의 대대적인 리빌딩 계획의 중심에는 이강인이 있다. 2011년에 스페인으로 건너가 발렌시아 유스 아카데미에서 줄곧 성장한 이강인은 2018년 1군 무대에 데뷔, 만 17세에 성인 무대에 서는 월반에 성공했다. 발렌시아 유스는 레알 마드리드, FC바르셀로나, 올림피크 리옹,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이어 유럽 5대 리그에 가장 많은 프로 선수를 배출한 구단일 정도로 육성 시스템의 수준이 높다. 유스 출신인 호세 가야, 페란 토레스, 카를로스 솔레르, 이강인은 ‘성골’로 표현될 정도로 발렌시아 팬들의 기대와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문제는 유스 출신 황금세대와 기존 주축 선수들 사이에 벌어진 내부 갈등이었다. 팀이 자체적으로 키운 스타들을 더 중용할 것을 종용하는 구단주의 눈치를 보는 감독들에게 주축 선수들이 불만을 가졌고, 훈련장과 경기장 라커룸에서 선수들 간 갈등이 벌어졌다. 이강인보다 앞서 팀의 중심으로 올라섰던 특급 유망주 페란 토레스는 지난 8월 맨체스터 시티로 이적하며 “주장인 파레호를 중심으로 한 일부 베테랑들이 나와 이강인을 의도적으로 괴롭히고 따돌렸다”고 폭로했다. 추가적인 증언이나 반박은 이어지지 않았지만 피터 림 구단주는 토레스가 지목한 파레호를 시즌 종료 후 내보내며 토레스의 말을 우회적으로 인정했다. 동시에 그런 상황을 명분 삼아 대대적인 개혁에 돌입했다.

발렌시아의 위기와 리빌딩은 이강인에게 기회가 됐다. 2019년 초 정식 계약을 맺으며 본격적으로 1군 선수가 된 이강인에겐 꾸준한 경기 출전이 성장의 관건이었다. 하지만 2018~19 시즌에는 총 9경기 출전에 그쳤다. 2019년 6월 폴란드에서 열린 FIFA U-20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의 준우승을 이끌며 대회 MVP를 차지했지만 소속팀 내 경쟁에서 반등을 만들긴 쉽지 않았다. 2019~20 시즌에는 24경기에 출전했지만 선발 출전은 6회뿐이었고, 실질적인 출전시간도 평균 30분이 채 되지 못했다. 이강인 측은 임대는 물론 이적도 불사하며 기회를 찾아 떠나겠다고 했지만 발렌시아와 피터 림 구단주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구단은 베테랑, 특히 이강인의 포지션 경쟁자들을 대거 정리하며 출전시간을 늘려줄 방도를 찾았다. 다시 한번 임대를 노리던 이강인도 그런 구단의 청사진과 움직임에 따라 결국 잔류했다.

 

구단주·감독 지지에도 동료들 신뢰에는 아직 물음표

그라시아 감독도 이강인이 활약할 수 있는 전술적 토대를 마련했다. 프리시즌 동안 이강인은 4-4-2 전형에서는 처진 공격수로, 4-2-3-1 전형에서는 공격형 미드필더 역할을 소화했다. 성인팀 데뷔 후 이강인은 주로 측면에 투입됐지만 맞는 옷은 아니었다. 왼발에서 나오는 창의적인 패스와 뛰어난 볼 간수 능력, 상대 수비 압박에서 빠져나오는 기술이 좋은 반면 측면에서 상대를 돌파하고 나갈 순간적인 주력은 아쉽기 때문이다. U-20 월드컵 당시에도 정정용 감독은 포르투갈과의 조별리그 1차전에서 이강인을 측면에 세웠지만 효과를 보지 못하고 패하자 그 뒤 중앙에 세우는 맞춤 전술의 플랜B로 승승장구한 바 있다.

효과는 확실했다. 9월14일(한국시간) 열린 레반테와의 2020~21 시즌 라리가 개막전에서 이강인은 2도움을 올리며 발렌시아의 4대2 승리를 이끌었다. 최전방 투톱으로 나선 그는 전문 스트라이커인 막시 고메스보다 처진 자리에서 공격의 연결고리 역할을 소화했다. 전반 12분 왼발 코너킥으로 수비수 가브리엘 파울리스타의 헤딩골을 도왔고, 39분에는 고메스에게 창의적인 공간 패스를 보내 두 번째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발렌시아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에 한 경기 2도움을 올린 선수가 됐다. 4개의 키패스(결정적인 찬스를 만드는 패스)에 94%의 패스 성공률은 보너스였다.

주어진 기회만큼 이강인이 감당해야 하는 책임의 무게도 더 커졌다. 팀이 부진에 빠진다면 이강인에게 화살이 향한다는 게 2라운드에서 드러났다. 9월20일 열린 셀타 비고와의 원정경기에서 발렌시아는 1대2로 패했다. 특히 전반 34분 이강인은 자신이 얻어낸 프리킥 상황에서 호세 가야와 키커 선정을 놓고 충돌했다. 서로 공을 가져가려 했고, 이강인은 공을 등 뒤로 빼며 양보하지 않았다.

결국 베테랑인 다니엘 바스가 중재에 나서 가야가 킥을 했지만 허무한 실패로 끝났다. 이 장면은 또 다른 구설을 낳았다. 역할과 왼발 킥의 위력 면에서 이강인이 차야 한다고 지지하는 쪽과, 팀 내 무게감을 볼 때는 가야가 차는 게 맞다는 쪽의 지지가 팽팽히 맞섰다. 스페인 국가대표 풀백인 가야는 올 시즌 팀의 새 주장으로 리더 역할을 맡고 있기에 세트피스 상황에서 이강인의 탐욕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때마침 이강인이 전반 종료 후 교체되자 논란에 한층 불이 붙었다. 경기 후 그라시아 감독은 “팀을 생각하자. 누가 더 잘 차는지만 보자”는 말로 자신의 생각을 에둘러 표현했다.

팀 내 정치적 분쟁의 불씨가 이강인에게 튀고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구단주와 감독의 지지를 받고 있는 이강인이지만, 동료들의 신뢰는 아직 그만큼이 아니라는 것이다. 개막 후 2경기를 치렀을 뿐인데 이강인의 주전 기용이 편애로 비춰지는 모양새다. 그런 가운데 발렌시아는 이강인의 재능을 계속 붙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지난 시즌부터 임대 이적 가능성을 일축하며 2022년까지 돼 있는 기존 계약을 3년 더 연장하기 위해 협상 중이다.

피터 림 구단주는 이강인의 성공을 자신의 재임 후 최대 역작으로 기대하는 모습이다. 이강인 측은 최근의 팀 내 입지 상승에는 만족하지만 구단의 적극적인 재계약 제안에 대해서는 여전히 조심스러운 모습이다. 아직 만 20세 생일도 치르지 않은 이강인의 왼발에 팀의 재건을 맡긴 발렌시아 구단이다. 이제 이강인은 팀의 미래가 아닌 현재로서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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