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호 PD가 꿈꾸던 유니버스 현실화되다
  • 정덕현 문화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10.10 15:00
  • 호수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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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팬덤에서 유니버스 세계관으로 예능 프로그램 확장

지금은 바야흐로 세계관의 시대다. 과거의 팬덤이 스타의 콘텐츠를 있는 그대로 소비했다면, 지금은 스타의 세계관에 팬덤이 들어와 함께 놀면서 이를 소비하고 확장해 간다. 그런 점에서 MBC 《놀면 뭐하니?》의 유니버스에는 주목할 만한 지점이 있다.

2011년 MBC 《무한도전》의 ‘TV전쟁’편에는 유재석TV와 하하TV 등이 등장했다. 각각의 멤버들이 꾸린 채널을 통해 서로 살아남기 위해 처절한 전쟁을 벌이는 모습을 예능의 틀에 담은 것이다. 당시 종편 채널이 출범하면서 본격화된 채널 경쟁을 예능적으로 패러디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김태호 PD는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그런 각각의 채널들이 저마다의 세계를 갖고 공존하면서 때로는 서로 뒤섞이기도 하는 그런 ‘유니버스’를 꿈꾼다는 이야기를 한 바 있다. 마치 마블 유니버스 같은 캐릭터들의 세계관을 꿈꿨던 것이다.

ⓒ빅히트 엔터테인먼트·SuperM 트위터·MBC 제공
ⓒ빅히트 엔터테인먼트·SuperM 트위터·MBC 제공

《무한도전》 시절 김태호 PD가 꿈꿨던 세계

그로부터 7년 후 《무한도전》이 종영을 선언하고 약 1년 동안의 휴지기를 거쳐 돌아온 김태호 PD는 《놀면 뭐하니?》를 시작했다. 물론 그 시작은 1인 크리에이터 시대에 발맞춘 ‘릴레이 카메라’라는 콘셉트였지만, 이른바 ‘유플래쉬’로 유재석이 유고스타라는 부캐를 키우며 드럼에 도전하면서부터 그 색깔이 조금씩 ‘캐릭터의 확장’으로 진화해 갔다. 트로트를 하는 유산슬을 거쳐 확고해진 부캐 도전은 그 후 라섹이나 유르페우스, 닭터유 같은 다양한 캐릭터들을 만들었고, 싹쓰리 프로젝트를 만나면서 ‘유니버스’의 그림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유재석 혼자 하던 캐릭터의 확장이 싹쓰리에 합류한 린다G(이효리), 비룡(비)으로 넓어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생겨난 ‘환불원정대’는 천옥(이효리)을 필두로 만옥(엄정화), 은비(제시), 실비(화사), 이들을 매니지먼트하는 지미 유(유재석), 기획사 신박기획의 직원으로 정봉원(정재형), 김지섭(김종민) 등을 합류시켰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러한 캐릭터들이 새로운 프로젝트를 낳는 발원지가 되고, 또 새로운 프로젝트는 또 다른 캐릭터들을 만들어내는 발판이 된다는 사실이다. 즉 환불원정대가 탄생하게 된 건 싹쓰리의 린다G가 ‘센 언니들’ 콘셉트의 걸그룹을 거론하며 엄정화, 제시, 화사를 멤버로 지목한 데서 비롯됐다. 그런데 환불원정대는 이들을 관리해 주는 신박기획을 탄생시키고 정봉원과 김지섭이라는 캐릭터를 만들어낸다. 이들이 부를 《Don’t touch me》라는 곡을 작곡한 블랙 아이드 필승 라도 역시 주지훈을 닮았다며 곧바로 ‘툭지훈(주지훈이 툭 치고 간 것 같이 닮았다는 의미)’이라는 캐릭터가 탄생했다. 이 정도면 이 유니버스는 향후 무수히 많은 캐릭터들을 가진 세계가 되지 않을까.

《무한도전》 이전, 예능 프로그램에 팬덤은 거의 존재한 적이 없었다. 그저 방송이 나오면 그걸 애써 찾아보는 애시청자 정도가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무한도전》은 이른바 팬덤 예능 프로그램으로 서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평균 이하’의 캐릭터들은 프로그램이 던져놓은 도전 상황들을 겪으며 실제로 성장했고, 그 과정을 공유한 시청자들은 팬덤이 돼 이들이 하는 일들을 응원하고 지지하게 됐다. 예능 프로그램이 다양한 캐릭터 상품들을 만들어내고, 연말이면 달력을 만들어 판 수익금으로 어려운 분들을 돕는 기부행사를 벌이게 된 건 이런 팬덤이 있어 가능한 일들이었다.

이 팬덤의 시대를 넘어 이제 《놀면 뭐하니?》가 방송되는 지금은 유니버스와 세계관의 시대다. 마블이 유니버스를 구축해 ‘어벤져스’로 묶거나, 각각의 캐릭터들의 이야기로 산개하며 다양한 스토리를 안정적으로 성공시키고 있고, 방탄소년단도 단지 노래만이 아닌 이들이 내놓고 있는 세계관으로 ‘BTS 유니버스’를 구축해 글로벌 팬덤 아미(ARMY)를 점점 확장시켜 가고 있다.

SM엔터테인먼트의 그룹 엑소는 K팝 세계관을 가장 먼저 구축한 사례다. 이들은 태양계 외행성을 뜻하는 ‘엑소플래닛’에서 팀명을 따왔고 그 멤버들은 각각의 행성에서 와 저마다의 초능력을 갖고 있다는 스토리텔링이 더해졌다. SM엔터테인먼트가 최근 서로 다른 그룹에서 멤버들을 모아 만든 슈퍼엠은 그래서 일종의 ‘SM 어벤져스’ 같은 성격의 세계관을 갖는다.

이제 세계관은 그래서 팬덤 소비가 일어나는 콘텐츠 속에서는 어디서든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하게 됐다. 예를 들어 최근 FNC엔터테인먼트 소속의 신인 6인조 보이그룹 피원하모니는 데뷔와 함께 《피원에이치: 새로운 세계의 시작》이라는 영화를 통해 그 성장 서사의 세계관을 먼저 선보이고 있다. 그 세계관은 분노를 일으키는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폐허가 된 세상을 구하는 소년들의 이야기로 채워진다.

 

어째서 세계관일까

그렇다면 어째서 세계관일까. 그것은 달라진 대중의 문화 소비 방식에서 찾아질 수 있다. 이제 팬덤은 단순히 스타의 콘텐츠를 소비하는 차원에 머물고 싶어 하지 않는다. 좀 더 개입하고 싶어 하고 그 성장에 참여하려 한다. 이것은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의 역할까지 하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 ‘프로듀스’의 욕망에 가깝다. 조작 논란으로 일그러졌지만 Mnet 《프로듀스101》 시리즈는 바로 이런 변화된 팬덤 소비자들의 취향을 제대로 포착했던 프로그램이다. 오디션 과정의 힘겨움을 공유하고 함께 성장해 가는 팬덤은 그 자체로 스토리를 쌓아가며 하나의 세계관이 된다.

BTS가 공고한 아미 팬덤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SNS를 통한 끝없는 소통과 교감으로 이러한 세계관이 구축됐고, 그것이 음악을 통해 구현되고 성장하며 결과물로 돌아오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즉 세계관이 이제 새로운 팬덤 소비의 방식으로 등장한 건 훨씬 더 능동적인 팬덤 때문이다. 세계관은 그래서 기획사나 콘텐츠 제작자가 일방적으로 만드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팬덤의 참여가 더해져야 비로소 완성되는 것.

이 관점으로 보면 《놀면 뭐하니?》가 그려 나가고 있는 세계관이 달리 보인다. 《무한도전》 시절의 팬덤 소비에서 이제는 ‘싹쓰리’ 같은 팀명을 유튜브 생방송을 통해 제안받아 만들어내는 세계관 소비로 바뀌고 있다는 것. 《놀면 뭐하니?》뿐만이 아닌 다양한 K콘텐츠들이 구축해 나가는 세계관들을 이제는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그들이 독자적으로, 때론 이합집산해 만들어내는 새로운 세계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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