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그 범은 왜 내려왔을까
  • 송혜진 숙명여대 문화예술대학원 교수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10.17 15:00
  • 호수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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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 내려온다》가 화제다. 실력파 판소리 싱어들로 구성된 국악밴드 이날치, 이색적인 비주얼로 무장한 엠비규어스 댄스 컴퍼니가 춤추고 노래하는 한국관광공사의 홍보 영상 속 노래다. 해외용으로 제작되었다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의 호응도 대단하다. ‘K컬처’ 운운하지 않고, 장르 따질 것도 없이 그냥 듣고 보면 좋은 《범 내려온다》. 이  동영상에 달린 댓글 읽는 재미도 놓치기 아깝다. 한국 홍보 동영상 ‘서울-전주-부산편’을 연속 보게 되면 ‘나 국악 좋아하나봐~ㅋㅋ’라며 금방 따라 부르게 될 중독성 강한 이날치의 《범 내려온다》를 한참  재밌게 보다가 문득 궁금해지는 분도 계실 듯하다. 그 범은 왜 내려왔을까? 

ⓒ유튜브 캡처
ⓒ유튜브 캡처

이 노래의 원전은 판소리 《수궁가》다. 바다 밑 세상 수궁에서 그리 높지 않은 ‘주부’ 벼슬을 하고 있던 자라가 몸이 아픈 왕의 치료제를 구하러 육지로 나왔다가 토끼를 꼬여 수궁으로 데려간다는 《수궁가》의 줄거리를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토끼와 자라가 벌이는 ‘밀당’과 승패의 에피소드 이면에는 생생한 공감 코드가 숨어 있다. 노래 속에 등장하는 동물 캐릭터들이 마치 내가 아는 누구 같고, 내가 겪은 어떤 상황 같아 실없이 웃게 되는 고급 풍자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수궁가》에는 토끼와 자라 두 주인공 외에 ‘호랑이’가 꽤 비중 있게 출연하는데, 이 호랑이 등장 신이 바로 이날치 밴드가 부른 《범 내려온다》 대목이다. 

자라가 토끼를 만나기 전에 잠깐, 큰 웃음을 주는 범의 출연은 허울 좋은 ‘갑’에게 가뿐하게 복수하는 ‘을’의 쾌감을 자극한다. 수궁 화가가 그려준 ‘토끼 몽타주’ 한 장 달랑 들고 육지로 나온 자라가 털짐승이면 모두 토끼인 줄 알고 ‘거기 토생원 아니오~~?’라고 부르는데, 그만 턱에 힘이 빠져 발음이 새고 말았다. ‘호 호 호생원 아니오~’가 된 거다. 생전 처음 자기를 ‘생원’이라 높여 불러주는 소리에 기분 좋아진 호랑이가 경계를 풀고 모습을 드러내고, 마침내 자라와 한판 실랑이가 벌어진다. 자라를 본 호랑이는 우선 먹고 보려고 달려들고, 자라는 이리저리 살아나갈 궁리를 하느라 힘을 쓰는 장면이 가관이다.

호랑이와 자라의 싸움이라니 누가 봐도 빤한 승부라 생각하겠지만 결과는 반전이다. 자라의 깨끗한 한판 ‘승’이다. 어떻게 이겼냐고? 자라는 우선 수궁에서의 집안 내력과 직함을 들이대며 내가 만만치 않는 존재 ‘별나리’라 과시하며 호랑이의 기를 죽인다. 호랑이가 네가 ‘별나리’라면 재주로 존재를 입증해 보라며 받아치자, 자라는 허무맹랑한 얘기를 지어내 호랑이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 다음 호랑이의 ‘밑주머니’를 꽉 물어버리고, 예기치 못한 자라의 공격에 혼비백산한 호랑이는 간신히 도망치고 마는데, 얼마나 급하게 멀리 뛰었는지, 해남 땅끝 마을에서 의주 압록강까지 갔더란다. 산중 두목 호랑이의 퇴각 모양새와 소리꾼의 과장된 허풍에 시원한 웃음보가 터지는 대목이다.

이 대목은 여러 판소리 중에서도 인기가 높다. 누구나 알아듣기 쉬운 가사인 데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누가 누구를 골탕 먹이는 얘긴지 다 알아들을 수 있는 풍자 코드에 공감하는 이가 많아서겠다. ‘생원’ 호칭이 뭐라고. 그 알량한 호명에 이끌려 나오는 호랑이. 좋은 것이라면 어찌해서라도 힘으로 눌러 잡아먹고야 말겠다며 달려들다가, ‘별나리’라는 말에 움찔해서 한 걸음 물러서는 모습, 그러다가 예기치 않게 급소를 공격당해 민망한 꼴 보이고, 도망쳐 나온 후에도 ‘나 정도니까 살아나왔지’라며 창피한 줄 모르는 호랑이의 면면이 얼마나 실감 났을까. 이 노래를 들으며 누군가는 평소 한 방 먹이고 싶은 이와 저 호랑이의 이미지가 중첩되어 더 재밌어 할 테고, 또 누군가는 잘못된 ‘호명’에 가벼이 몸을 드러내어 봉변당한 이가 떠올라 씁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참 재밌게 보고 계실 이날치의 《범 내려온다》, 그 이후의 노래도 한번 들어보시라. 《범 내려온다》는 진짜 들려주고 싶은 얘기의 예고편이다. 

※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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