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수 “연기는 늘 두렵고도 경이로운 일”
  • 하은정 우먼센스 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11.14 15:00
  • 호수 162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영화 《내가 죽던 날》로 돌아온 배우 김혜수

김혜수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가감이 없었다. 세월을 살아오며 켜켜이 쌓인 연륜과 내공, 취향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조근조근 따뜻하게 말을 이었다. 단단한 사람이었고, 동시에 유리 같은 사람이었다. 적어도 지금의 김혜수는 그랬다. 매 작품 치열하게 자신을 몰아세우며 연기하는 그에게 물었다. “이제는 조금 즐겨도 되지 않아요?” 그의 대답도 매번 같다. “사람이 어디 변하나요?” 그에게 연기는 즐겁기보다 고통이다. 부족한 자신을 수도 없이 마주하는 순간이기에 데뷔 34년 차인 그는 여전히 연기 앞에서 겸허해진다. 그렇게 내놓은 작품, 영화 《내가 죽던 날》이 11월12일 개봉했다.

김혜수는 극 중 형사 ‘현수’ 역을 맡았다. 가장 가까운 이의 배신과 예상하지 못한 사고로 일상이 무너졌지만 삶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인물이다. 그 과정에서 형사로서 재기하기 위해 절벽 끝에서 사라진 소녀 ‘세진’의 흔적을 추적하면서 삶의 진실을 찾아간다. 김혜수는 “어떤 측면에선 내 이야기 같았다”고 담담히 말한다. 김혜수는 최근 가족과 얽힌 일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힘든 시간을 보낸 바 있다.

“현수의 대사 중에 그런 게 있어요. ‘나는 내 인생이 멀쩡한 줄 알았다. 그래서 이렇게 될 줄 몰랐다.’ 실제로 제가 했던 말이에요. 또 영화 속 대사 중에 ‘난 왜 몰랐던 걸까? 그래서 벌 받나 봐’라고 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 마음 역시 제게 조금 있었어요. ‘네가 널 구해야지’ 하는 대사와 ‘인생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길다’ 등등 유독 세포 하나하나에 흡수되는 말이 많았던 작품이에요. 연기를 하면서 위로를 많이 받았어요.”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민낯에 편안한 옷차림이었다. 배우 김혜수보다 사람 김혜수를 마주한 느낌이었다.

ⓒ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강영호작가제공
ⓒ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강영호작가제공

작품을 선택한 이유는 뭔가.

“사실 대본을 읽기도 전에 제목이 마음을 사로잡았어요. 그리고 대본을 읽으면서 저도 모르게 마음의 위로를 받았어요. 제가 느끼는 위로를 관객들이 같이 느낀다면 가치 있는 작업이 아닐까 싶어 함께하게 됐어요. 어쩌면 그게 영화의 목적이 아닐까요?”

시나리오 작업에도 참여했다고 들었다.

거의 모든 작품이 스태프들의 다양한 아이디어로 풍성해지죠. 물론 그 많은 아이디어 중 버려지는 것도 많고요. 이번 작품에서 현수가 꿈을 꾸는 장면이 있는데, 그 부분은 제가 제 경험을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썼어요. 실제로 제가 어느 한 시기에 비슷한 꿈을 반복적으로 꿨거든요. 그 감정을 그대로 썼어요.”

이번 작품을 통해 만난 이정은 배우와의 호흡은 어땠나.

“좋은 배우임과 동시에 좋은 사람을 현장에서 만난다는 게 이렇게 특별한 경험이라는 걸 이번 작품을 통해 느꼈어요. ‘이렇게 완벽한 순간을 선사하는구나’ 하는 감정이 들 정도로요. 실제 정은씨가 영화 속 캐릭터처럼 말없이 사람을 안아주는 힘이 있어요. 저는 이 영화의 흥행 여부와는 무관하게 이미 많은 걸 얻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매 작품에서 자신을 몰아치며 완벽하게 연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 연기, 만족하나.

“자기 연기에 만족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세계 어느 대배우에게 물어도 다 마찬가지일 거예요. 다행인 건, 제가 시나리오를 보고 느낀 위로의 감정을 보시는 분들도 느껴주셔서 안도한 건 있어요. 글쎄요, 연기요? 연기로만 따지자면 저는 영화를 찍고 난 뒤엔 제 영화를 남 영화 보듯 멍하게 보는 편이에요(웃음).”

최근 한 인터뷰에서 ‘은퇴’에 대한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아마도 많은 배우가 매번 작품을 시작하고 마칠 때 수시로 드는 마음일 거예요. 일종의 두려움 같은 거죠. 물론 감독, 제작자는 더하겠죠? 경험한바, 두렵지 않은 현장은 없어요. 그럼에도 해내야 하고, 또 보란 듯이 해내는 사람이 있고, 그 모든 게 얼마나 경이로운 동시에 두려운 일인데요. 그런 의미에서 한 얘기예요.”

김혜수를 즐겁게 하는 건 뭔가.

“사랑, 음악, 시, 글, 아이들, 하늘, 초록…. 사소하고 일상적인 게 즐거워요. 그런 것들로 충전이 되니까 사는 거죠.”

오랫동안 사랑받는 연기자다.

“10대 때 우연히 이 일을 시작했어요. 그 낯선 세계에서 어른들 틈에 끼어 20대를 맞이했어요. 뒤늦게 사춘기가 왔어요. ‘이 일이 뭐지?’ ‘나는 왜 이러지?’ ‘왜 하는 거지?’에 대한 고민들을 뒤늦게 하게 된 거죠. 눈 떠 있는 시간 대부분을 이걸 하며 보내니까요. 내적으로는 방황을 많이 했던 시기였어요. 사람들에게 평가받는 삶도 버거웠고, 또 그렇게 10대와 20대의 청춘을 보낸 게 아까웠어요. 그러다 30대를 맞이하면서, 이 창의적인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곳에서 진짜로 어디 한 번 해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죠. 한데 또 벽에 부딪혔어요. 내 한계를 마주하게 되고, 그걸 받아들이는 과정을 겪게 되고, 내가 원하는 것과 내게 원하는 것이 일치하지 않는 것에 대한 좌절도 느끼고요. 그렇게 30대 한가운데서 “마흔이 되면 정말로 이 일을 그만두고 내 삶을 찾을 거야” 하는 생각을 매일 하며 지냈어요. 그리고 40대가 됐는데, 결국 내 삶과 연기를 분리한다는 게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연기를 하면서 평생 살았고, 연기를 하면서 세상을 바라봤고, 연기하면서 취향이 생겼는데 이제 와서 분리를 한다는 게 의미가 없더라고요. 매번 그런 식이었어요.“

결국 김혜수라는 배우는 여성들의 롤모델이 됐고, 시대의 아이콘이 됐다.

“저만의 힘으론 불가능한 일이죠. 불특정 다수의 사랑, 불가항력적인 운, 힘들 때마다 나타난 수많은 귀인…. 그들이 제게 주는 힘과 영향으로 가능했던 일이죠. 이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내 인생을 구성했던 것 같아요. 사실 연기 잘하는 배우, 얼마나 많아요? 그럼에도 저는 운이 좋았어요. 행운이 끊임없이 제게 왔어요. 감사한 일이죠. 많은 사람이 저를 ‘용기 있는 여성’으로 봐 주는데, 사실 저는 여러분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살고 있어요. 아등바등 늘 제게 주어진 옷을 버거워하고, 작은 것에 기뻐하고, 별거 아닌 것에 실없이 웃기도 하고요.”

뒤늦게 SNS를 시작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너무 재미있어요. 제가 이럴까 봐서 그간 SNS를 안 했는데 역시나 너무 재미있는 거죠(웃음). 오프라인에서 자주 보는 내 친구를 다른 공간에서 또 본다는 게 신기하고, 모르는 사람들과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는 것도 재미있고, 가끔 누군가가 쓴 문장 하나에 위안을 받는 것도 고맙고요. 그분이 제 팬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잠깐의 친구’ 그것도 좋던데요? 그런 거 있잖아요. 아무것도 아닌 것이기도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거요. SNS의 순기능인 것 같아요. 물론 순기능만 취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아요. 어쨌든 여러 가지 의미로 재미있고 좋아요.”

영화 내내 화장기 없는 얼굴로 등장한다. 여배우로서 나이 듦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당연한 것 같아요. ‘어떻게 그런 용기를 내?’라는 질문을 받곤 하는데, 이미 배우가 그 역할을 하겠다고 한 건 그걸 다 포함한 거죠. 캐릭터에 적합한 얼굴, 신체, 보이스를 다 하겠다는 의미죠.”

올해로 데뷔 34년 차가 됐다.

“숫자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아요. 나이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해요. 나이로 인한 부담감도 없고요. 그런 것보단 내가 어떤 배우인지가 중요하죠. 숫자가 많을수록 최고가 된다면 최선을 다해서 나이를 먹을 텐데 그런 게 아니잖아요.”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