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한폭탄 영끌투자] ‘영끌의 대한민국’에서 포착되는 위기의 징후
  • 김종일 기자 (idea@sisajournal.com)
  • 승인 2020.11.17 10:00
  • 호수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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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저축 효과, ‘저축→집’보단 ‘투자→집’으로
초저금리 시대 “막차 놓치면 안 돼” 조급함 커져

#1. 34만3076명. 지난 10월 치러진 제31회 공인중개사 시험에 응시한 수험생 수다. 1983년 공인중개사 제도가 도입된 이래 가장 많은 응시생이 몰렸다. 정부가 향후 ‘중개인 없는 부동산 거래’를 추진한다고 발표했음에도 열기는 대단했다. 오히려 지난해(29만8227명)보다 약 13% 늘어났다. 최근 공인중개사 시험은 ‘국민 고시’라 불릴 정도로 인기를 끌어왔지만 올해 유독 응시자가 몰렸다. 올해 시험 접수자는 40대가 32%, 30대가 29%로 10명 중 6명이 3040세대다. 왜 40대가 가장 많이 지원했을까. 통계청에 따르면 40대는 2015년 11월 이후 59개월째 취업자 수가 줄어들고 있다. 고용시장이 얼어붙으면서 직장에 책상이 있든 없든 불안한 마음에 공인중개사 시험을 치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 56만9816명. ‘10억 로또’라고 불린 경기도 과천 지식정보타운 3개 단지 아파트에 신청한 총 청약자 수다. 평균 경쟁률은 단지별로 300~500대 1에 달했다. 청약 광풍의 이유는 시세보다 크게 낮은 분양가 때문이었다. 공공택지 분양가상한제에 따라 평균 분양가는 3.3㎡당 2400만원 안팎으로 책정됐다. 전용면적 84㎡ 기준 8억원 정도로 인근 신축 아파트 시세의 50~60% 수준이다. 이에 시장에선 이들 단지 아파트가 10년 전매제한을 받아 단기 시세차익을 거둘 수는 없지만 추후 큰 차익을 남길 수 있어 ‘로또’라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 

#3. 21만6844명. 정부가 최고 33% 세율이 적용되는 주식 양도차익 과세 대상인 대주주 요건을 10억원에서 3억원으로 강화하려 하자 청와대 국민청원으로 달려가 반대 서명을 한 전체 청원자 수다. 일해서 번 근로소득에 엄격한 과세를 적용하는 만큼 돈으로 돈 버는 자산소득에 대해서도 일정한 세금을 물리겠다는 취지였지만 ‘주식시장 활성화가 우선’이라는 ‘동학개미’로 불리는 국내 개인투자자들의 반발에 정부·여당은 결국 물러섰다.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이 일로 사의를 표명하기도 했다. 동학개미는 경제부총리보다 힘이 셌다. 올해 정부의 주식시장 공매도 금지 및 금지조치 연장, 금융투자소득 과세 기본공제액 상향(2000만원→5000만원) 등은 모두 ‘동학개미’들의 집단적 요구가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시사저널 포토

영끌로 ‘부의 추월차선’에 올라타겠다는 외침

2020년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대표적 사건들이다. 공인중개사 시험에 34만3076명이 응시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 ‘불안감’이다. 평생직장은커녕 당장 내일의 일도 장담할 수 없는 이들이 우리 사회에는 넘쳐난다. 코로나 쇼크라는 전대미문의 위기는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 당첨만 되면 10억원 정도의 시세차익을 거둘 수 있는 과천 아파트 청약에 56만9816명이 몰린 사실은 무슨 뜻일까. 한국에서 재산을 불릴 수 있는 가장 빠른 방식이 ‘아파트 투자’라는 사실의 방증이다. 수억원의 자금을 마련할 수 있는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도 된다. 주식 투자만은 건들지 말라고 서명한 21만6844명의 숫자는 과연 무엇을 나타낼까. 일터는 불안하고 부동산에 투자할 여력은 되지 않으니 마지막 부의 추월차선인 주식 투자만큼은 제발 손대지 말라는 ‘항의’다. 

이것은 올해의 시대정신에 대한 이야기다. 2020년의 시대정신은 무엇일까. 정치사회 영역에선 ‘공정과 내로남불’일 것이다. 경제에선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아 투자)’이다. 한국 사회의 ‘부의 축적 방식’은 분명히 달라졌다. 수십 년간 지속됐던 ‘저축→집→노후’라는 부의 증식 고리가 코로나19라는 미증유의 위기로 드디어 깨졌다. 

산업화 세대든 민주화 세대든 자산을 쌓는 방식은 일정했다. 국가 경제의 가파른 성장 속에 고금리라는 거시경제가 뒷받침됐다. ‘교육→취업→자산 증식’이란 법칙은 나름 공정했다. 취업 후 전·월세로 신혼을 시작하고, 목돈을 모아 집을 산다. 자녀를 분가시킨 후엔 집과 약간의 노후자금이 남는다. 자산의 많고 적음은 달랐지만 중산층 삶의 경로는 비슷비슷했다. 

이 공식에서 ‘고성장과 고금리’는 매우 중요한 변수였다. 집값 상승 속도보다 차곡차곡 월급을 모아 자산을 불리는 속도가 빠르면 집은 천천히 사도 문제가 없다. 일터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합리적이자 효율적인 부의 증식 방법이 된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라면 완전히 다른 게임이 된다. 초저금리 상황 속에서 최근 몇 년간 집값은 가파르게 올랐다. KB국민은행에 따르면 2017년 문재인 정부 출범 초기 서울 아파트 중위 가격(집값 순서로 줄을 세웠을 때 한가운데 가격)은 6억원 남짓했지만 지금은 9억원을 훌쩍 넘긴다. 반면 코로나 쇼크로 성장률은 마이너스로 전환했고, 상당수 일터에서는 구조조정이 빠르게 진행 중이다. 

달라진 부의 증식 방법, 노동 대신 투자

이렇게 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2030세대에게 더 이상 노동은 ‘신성’하지 않다. 좀 더 정확하게는 신성하게 여겨야 할 이유가 적다. 진입 통로도 공정해 보이지 않는다. 노동시장에는 ‘엄마·아빠 찬스’가 있다는 사실을 이전 정부와 현 정부 모두에서 목격했다. 명문대를 나오지 못하면 패자부활전 따위가 없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체득했다. 예·적금으로는 도저히 부를 쌓을 방법이 안 보인다. 현재 은행권의 정기예금 금리는 잘해 봐야 1% 남짓이다. 부동산 투자에는 최소한 수억원이 든다. 답이 안 나오는 상황인 셈이다. 

천정환 성균관대 교수는 최근 경향신문 칼럼을 통해 요즘의 이런 현상을 날카롭게 짚었다. 천 교수는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라는 신선한 제목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어른들에게는 작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이 책이 거부하는 것은 무엇보다 ‘노력의 배신’이다. 또한 ‘좋은 대학, 좋은 직장’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야 비로소 진정한 어른이 되고’ ‘보험과 저축, 적금, 집, 차 등도 이 나이가 되면 이 정도는 챙겨야 한다’는 기성의 인생 매뉴얼이다”고 했다. 특히 “이 사회의 어른들과 국가가 청년세대의 노력에 대한 답과 모범을 보여주지 못하자 그들은 일, 직업, 진학에 관한 기성의 가치를 부인하고 다른 길을 모색한다”고 했다. 

갈 곳을 잃고 헤매던 2030세대에게 올해는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다. 지난 3월 첫날을 2000대에서 출발한 코스피는 그달 19일 1457.64포인트까지 하락하며 연중 저점을 찍었다. 코로나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우려에 따른 급락이었는데, 밀레니얼에겐 이보다 좋은 부의 추월차선은 없었다. 개인(청년)들에게 주식 투자는 아무런 배경이 없어도 성과를 낼 수 있는 공정한(혹은 유일한) 게임이었다. 코로나19 우려가 극심했던 지난 3월부터 9월말까지 국내 주식시장에서 개인의 순매수 규모는 46조6000억원. 25조6000억원 순매도한 외국인과 기관(19조7000억원 순매도)의 공백을 완벽히 메웠다. ‘동학개미’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주식 투자 입문자들은 존 리 메리츠자산운용 대표의 “자본이 일을 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말에 끌려들어갔다. 부동산 투자 입문자들은 “노동소득이 아닌 ‘불로소득’으로 ‘경제적 자유’를 달성하라”는 재테크 베스트셀러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의 저자 로버트 기요사키의 20년 전 말을 다시 꺼내왔다. 이런 맥락에서 밀레니얼에게 유일한 문제는 투자할 자산의 규모가 적다는 게 된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다. ‘영끌’이다. 마침 금리는 사상 최저치다. 상환 부담은 그 어느 때보다 적다. 

실제 가계대출 규모는 폭발적이었다. 11월11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2020년 10월 중 금융시장 동향’ 자료에 따르면, 지난달 말 잔액 기준 가계가 은행으로부터 빌린 돈은 총 968조5000억원 수준으로 전월 대비 10조6000억원 증가했다. 이는 10월 기준 2004년 이래 가장 큰 증가 폭이다. 올해 은행의 가계대출 증가 폭은 지난 5월 5조원에서 8월 11조7000억원으로 꾸준히 증가하다 9월 10조원대 아래로 소폭 감소했지만, 지난달 다시 10조원을 웃돌았다. 은행권 주택담보대출(주담대)도 지난달 7조원 가까이 증가했다. 이는 10월 기준 2015년 이후 최대 증가 폭이다. ‘영끌 행진’이 계속되고 있단 얘기다.

전문가들은 올해 투자 성과에 도취되어 주식 투자에 ‘올인’하는 것은 금물이라고 당부하고 있다. ⓒ연합뉴스

안전벨트 없이 달리는 투자 열차

그럼 2030세대의 투자 코스는 탄탄대로 꽃길만 깔려 있을까. 안타깝게도 전문가들의 진단은 다르다. 《밀레니얼 이코노미》 저자인 홍춘욱 EAR리서치 대표는 두 가지 이유로 신중한 투자를 당부한다. 먼저 부동산의 상승 사이클이 수년 내 한계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이다. 홍 대표는 “과거 한국 부동산 사이클이 약 15~16년 주기를 두고 상승과 하락을 반복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번 랠리의 정점이 2020년대 초중반에 나타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또 최근 주택 가격 상승 영향으로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지역의 주택 구입에 따르는 부담이 2000년대 중반 이후 최고 수준에 도달했다는 점도 주의해야 한다고 했다. 

아울러 홍 대표는 “한국 주식시장은 1980년 이후 연평균 수익률이 8.16%를 보였지만, 마이너스 수익률을 기록할 확률이 43.6%에 이를 정도로 위험한 시장”이라면서 “올해 투자 성과에 도취되어 주식 투자에 ‘올인’하는 것은 금물”이라고 당부했다. 

이종우 이코노미스트 역시 너무 많이 오른 주가와 지금껏 주가를 끌고 왔던 저금리 및 유동성 공급 효과가 떨어지고 있는 점 등을 감안하면 지금은 위험 관리와 적절한 수익률을 목표로 하는 투자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위험 관리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빚을 내 투자하는 습관을 버려야 한다”며 은행 대출을 통해 조성한 돈으로 증권사에서 신용거래를 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행동이라고 주의를 당부했다. 주가가 20%만 떨어져도 담보 부족으로 엄청난 손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일본 닛케이225지수가 2만5000선을 돌파하며 최고치를 연일 갈아치우고 있다. 29년 만의 최고치다. 1990년 8월23일 5.8% 급락하며 지수 2만4000선이 무너진 이후 한 세대가 지나서야 겨우 ‘거품’ 붕괴 직전 수준을 회복한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1989년 말 사상 최고치(3만8915.87)의 60% 수준에 불과하다. 주가뿐 아니라 일본의 전국 평균 땅값도 1990년대 초의 40% 선에 머무르고 있다. 한국 경제는 당시의 일본 경제와 많이 다르다. 펀더멘털도 훨씬 탄탄하고 외환보유액도 과거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일본의 경험이 주는 교훈은 있다. 거품은 터져봐야 거품인 줄 안다. 산이 높으면 골도 깊다. 정부 관계자들의 말을 신뢰하기 어렵더라도, 자신의 자산을 소중히 지키려면 안전벨트를 단단히 매고 투자 열차에 올라타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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