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을 부정하는 팬덤들 [유창선의 시시비비]
  • 유창선 시사평론가 (kham@sisajournal.com)
  • 승인 2021.01.25 08:00
  • 호수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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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정경심 판결 불복 움직임 확산…진실이 아닌 신앙의 영역 돼

프리드리히 니체는 《선악의 저편》에서 이런 말을 했다. “광기는 개인에게는 드문 일이다. 그러나 집단·당파·민족·시대에서는 일상적인 일이다.” 실제로 너무도 멀쩡하고 평범해 보이던 사람이 정치 얘기가 나오면 합리나 이성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되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친문(親文)’ 성향으로 알려진 진혜원 검사라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부인 김정숙 여사가 수해복구 작업을 도왔을 때 “누구에게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진정성과 순수함을 느끼게 된다”는 칭송의 글을 올렸고,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예전 사진을 올리며 “사진에서 배우 채시라님 닮으신 분 누구시죠?”라는 말을 남겼던 검사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과 팔짱 낀 자신의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린 뒤 “나도 성추행했다”고 적어 성추행 피해 여성을 조롱하는 2차 가해를 했다는 논란을 불러일으킨 일도 있다. 번번이 논란을 불러일으킨 언행들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검찰 인사에서 서울동부지검 부부장검사로 영전했다. 그동안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그런 진 검사가 이번에는 페이스북에서 ‘꽃뱀’ 강의를 하고 나섰다. 박 전 시장의 성추행 사실을 인정한 법원의 판결에 대해 ‘나치 돌격대 수준’이라고 맹비난하고는, 다음 글에서 꽃뱀 얘기를 꺼낸 것이다. “꽃뱀은 왜 발생하고, 수틀리면 왜 표변하는가”라며 ‘문란한 암컷’ 얘기를 다룬 글 아래에는 피해 여성을 꽃뱀이라고 맞장구치는 댓글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평소 입만 열면 약자와 정의를 말하던 진영의 사람들이 보여준 참혹한 광경이었다.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던 문재인 정부에서 녹을 먹고 있는 검사가 저런 언행을 해도 되는 것인가. 윤석열 총장에 대해서는 번개같이 징계를 밀어붙이던 법무부는 어째서 진혜원의 엽기적 언행들은 계속 묵인해 주고 있는 것인지 알 길이 없다.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빈소ⓒ서울시 제공

‘상대는 악, 우리만 선’ 이분법적 프레임

재판부는 “(피해자가) 박 전 시장 밑에서 근무한 지 1년 반 이후부터 박 전 시장이 야한 문자, 속옷 차림 사진을 보냈고 ‘냄새 맡고 싶다’ ‘사진을 보내 달라’는 문자를 받았다(고 진술했다)”며 “이런 진술에 비춰보면 피해자가 박 전 시장 성추행으로 인해 상당한 정신적 고통을 받은 건 사실”이라고 밝혔다. 재판부가 성추행 사실을 인정한 판단의 근거는 정신과 병원으로부터 제출된 진료와 상담의 의무기록에서 나온 것이었다고 한다. 의무기록은 보통 재판에서 신빙성이 높은 증거자료로 인정되곤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법원이 어떤 자료에 근거해 어떤 판단을 내린들, 오직 박원순을 지켜야 한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어떤 사실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 같은 판결을 내린 재판부의 사법 쿠데타라고 비난하며 경찰에 고발까지 하는 공격을 하고 나섰다. 이들의 진영 내부에 구축된 신념은 어떤 사실도 받아들이지 않는 막무가내의 고집이 되고 말았다.

정경심 교수에 대한 1심 판결 이후에도 그런 모습들은 숱하게 나타났다. 배우자에 대한 법원의 실형 선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조국 전 장관은 “가시밭길을 가겠다”는 말부터 꺼냈다. 당사자부터 그러니 조국 부부가 박해받는 순교자임을 강변하는 설교들이 이어진다. “가슴이 턱턱 막히고 숨을 쉴 수 없다. 단단하게 가시밭길을 가겠다.”(민주당 김남국 의원), “이 땅의 많은 부모들을 대신해 정경심 교수에게 ‘십자가’를 지운 것이냐.”(민주당 윤영찬 의원), “조국은 예수의 길을 걷고 있다.”(황교익 음식평론가), “예수 그리스도가 박해받은 이유가 그러하듯이, 죄 많은 자들은 자신의 죄보다는 그 죄악을 들추고 없애려는 자를 더 미워하는 법이다.”(이연주 변호사)

“고작 표창장 위조 가지고 징역 4년이냐”는 지지자들 앞에서 무려 11개에 달하는 유죄 판단의 사실들은 외면당한다. 조국 부부가 했던 깨알 같은 거짓말들의 실체도 파묻혀 버린다. 그들 가운데 571쪽에 달하는 판결문의 일부라도 성실하게 읽어보고서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 보인다. 조국 전 장관 부부의 유·무죄를 가리는 일도 그렇게 진실이 아닌 신앙의 영역이 되어 버렸다.

자녀 입시비리와 사모펀드 의혹 등으로 기소된 정경심 동양대 교수가 2020년 12월23일 서울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 선고에 출석하고 있다.ⓒ시사저널 박정훈

내 편 지켜주기 위해 다른 이에게 위해 가해 

눈앞에 드러난 사실조차도 부정하는 이 같은 모습들은 집단 사고의 결과다. 같은 진영 내의 집단에 속해 있다는 인식은 집단의 판단과 자신의 판단을 동일하게 맞춰야 동질적인 소속감을 느끼게 해 준다. 문재인 대통령을 지지하는 정치적 팬덤층이 《김어준의 뉴스공장》을 함께 들으며 그의 음모론으로부터 무슨 진실을 찾으려는 광경이 그런 것이다. 집단 사고는 단순하고 극단적인 결론을 추구하는 속성이 있다. 집단의 동질성을 강화하는 가장 손쉬운 길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선과 악의 이분법적 프레임은 집단 정서를 고취시키는 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그래서 상대는 악이고 우리만이 선이라고 해 왔으니, 우리 편이 잘못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초현실주의적인 상상을 통해 여전히 상대가 사실을 조작했으리라는 신념을 버리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법원이 박 전 시장의 성추행 사실을 인정하고, 정 교수의 행위들이 위법하다고 판결해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조너선 하이트는 《바른 마음》이라는 책에서 편싸움 속에서 눈이 멀어버리는 우리들의 모습을 지적하고 있다. “도덕은 사람들을 뭉치게도 하고 눈멀게도 한다. 도덕이 우리를 뭉치게 한다는 것은 결국 각자의 이데올로기를 내걸고 편을 갈라 싸우게 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편이 나뉘면 우리는 매 싸움에 이 세상의 운명이라도 걸린 듯이 서로 이를 악물고 싸운다. 도덕이 우리를 눈멀게 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엄연히 존재하는 사실을 보지 못하게 된다는 뜻이다.”

존재하는 사실을 부인하는 태도는 단지 내 편을 보호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내 편을 지켜주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위해를 가하는 행위가 수반된다. 에이미 추아는 정치에서의 집단 본능을 분석한 《정치적 부족주의》에서 인간에게는 부족 본능이 있으며, 이는 단지 소속 본능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배제 본능을 겸한다고 말한다. “어느 집단이건 일단 속하고 나면 우리의 정체성은 희한하게도 그 집단에 단단하게 고착된다. 가령 개인적으로는 얻는 것이 없다고 해도 내가 속한 집단 사람들의 이득을 위해 맹렬하게 나서고 별다른 근거가 없는데도 외부인에게 징벌적인 위해를 가하려 한다. 또한 집단을 위해 희생하며 목숨을 걸기도 하고 남의 목숨을 빼앗기도 한다.”

박원순 전 시장 성추행 피해 여성의 가족들이 입장문을 냈다. 어머니는 딸의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피해자는 하루에도 몇 번씩 ‘엄마 내가 죽으면 인정할까?’라는 말을 합니다. 자기의 모든 비밀번호를 가르쳐주며 만일을 위해 기억하고 있으라고 합니다.” 드러난 사실조차 외면하며 딴소리만 하고 있는 당신들이 모녀를 그렇게 고통의 지옥에 가둬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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