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화학연, 정부 ‘정규직 전환’ 부작용으로 내부 갈등
  • 이원석 기자 (lws@sisajournal.com)
  • 승인 2021.02.10 10:00
  • 호수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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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인국공 사태’ 곳곳에… 출연연들도 부작용에 ‘몸살’

“경영진은 기관을 분열시키고 싶은 건가. 진골, 성골, 육두품 나누고 싶은 건지… 차별 없이 같이 잘살아봅시다.”

“뭔 X소린지. 나라에서 강제로 시켜서 (정규직화)한 것도 짜증 나는데….”

직장인 익명 토론 앱 ‘블라인드’ 내 한국화학연구원(이하 화학연) 직원들만 이용할 수 있는 게시판에서 오고간 대화다. 화학연의 한 직원이 정부의 정규직 전환 방침에 따라 연구원 내 만들어진 무기계약직 제도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자 입장이 다른 직원들이 반발하면서 거친 언쟁이 벌어진 것이었다. 대화 내용을 봤을 때 양측의 갈등은 꽤 오래 곪아온 것 같았다.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던 걸까.

대전광역시 유성구 가정로에 위치한 한국화학연구원ⓒ시사저널 이원석

정부의 공공부문 정규직 전환 정책 시행 이후 극심한 노노(勞勞) 갈등으로 번진 ‘인국공(인천국제공항공사) 사태’와 유사한 상황이 일부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들에서도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시사저널 취재 결과, 국내 화학 분야의 권위 있는 연구기관인 화학연 내에서도 정부 방침에 따라 계약직에서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된 직원들과 기존 정규직 간 갈등이 벌어지는 등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출연연은 정부 출연금으로 운영 재원의 일정 부분 이상을 충당하는 연구기관으로 공공기관에 속한다. 앞서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지난 2017년 10월 정부의 공공부문 정규직 전환 방침에 따른 조치로 과기부 산하 25개 출연연에 대한 정규직 전환 가이드라인을 내놨고, 이후 각 출연연은 2018년 대거 정규직 전환을 실시했다. 2018년에 과기정통부 산하 출연연 내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된 인원은 2178명으로 집계됐다.

공공기관 경영정보 공개 시스템 알리오(Alio)에 따르면, 화학연도 2018년 135명의 계약직 직원에 대한 고용 형태 전환에 나섰다. 다만 이 135명은 완전한 정규직이 아닌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됐다. 무기계약직은 정년이 보장되는 등 고용 안정이 되기 때문에 현재 정부에선 ‘정규직’으로 분류하고 있지만, 처우나 환경은 엄연히 정규직과 다르다.

현재는 ‘전문원’이라 불리는 무기계약직 연구원들 입장에서 정규직 전환은 불완전했다. 다수의 전문원에 따르면, 전환 당시 화학연에선 전환에 대한 구체적인 방침이나 안내가 거의 없었다고 했다. 정부의 방침에 맞춰 매우 황급히 정규직화가 이뤄지는 분위기였으며, 우선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한 뒤 빠른 시일 내 일반 정규직으로 전환할 것이라는 말들도 연구원 측에서 나왔다고 했다. 그러나 막상 무기계약직 전환 이후엔 그러한 말들은 다 사라졌다.

인천국제공항 보안검색서비스노조원들이 2020년 8월 종로구 예금보험공사 앞에서 공사의 일방적 정규직 전환에 반대하는 집회를 벌이고 있다.ⓒ시사저널 최준필

정규직인 줄 알았더니 ‘무기계약직’

마치 신분처럼 정규직 연구원과 전문원은 명확히 구분됐다. 전문원은 아무리 잘해서 승진해도 정규직 연구원이 맡는 책임·선임 연구원이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규정상 전문원은 ‘업무 보조’ 역할로 직접 연구를 따 수행하거나 주도적으로 연구를 진행할 수도 없다. 정규직 연구원과 달리 역량 강화를 위해 학위 공부를 하는 것도 제한된다. 정규직 전환이라는 말에 연구원으로서의 미래를 꿈꿨던 전문원들은 실망감에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이들 중에는 애초부터 그러한 꿈을 품고 경력을 쌓기 위해 계약직으로 화학연에 들어와 노력하던 이가 꽤 있다는 전언이다.

한 전문원은 “연봉을 더 높여 달라거나 대우를 더 잘해 달라거나 무조건 모두가 승진해야 한다는 주장은 당연히 아니다. 적어도 ‘정규직 전환’이라고 표현했다면 노력하고 자격이 있는 사람들에겐 기회가 열려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마치 신분제처럼 다 막아놓고 분리해 놨다”고 토로했다.

게다가 전환이 이뤄진 지 3년째 됐지만, 화학연 내에선 여전히 전문원 제도에 대한 정비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새롭게 생긴 영역이니만큼 명확한 역할이나 정체성 등에 대한 정립 및 정리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과정이 없었다. 최근에야 화학연은 TF를 만들어 전문원들에 대한 평가방식 등 일부분에 대해서만 의견을 모았다. 고용만 보장됐을 뿐 비정상적인 제도 운영과 편견 어린 시선 등으로 인한 심리적 불안정감은 여전하다는 것이 다수 전문원의 호소다.

반면 기존 정규직 연구원들 사이에서도 현 상황에 대한 불만이 적지 않았다. 정부 방침에 따른 대거 정규직 전환이 이들에게 허탈감을 가져다줬다는 것이다. 화학연은 국내 최고 수준의 연구기관으로 입사하기가 굉장히 까다로운 곳으로 알려져 있다. 기본적으로 연구원들은 대부분 박사 학위를 갖고 있다. 그러나 전환된 전문원들은 애초부터 보조 역할을 하는 계약직 연구원으로 들어왔기에 석사 학위 소지자가 다수다. 공채에서 힘들게 경쟁을 뚫고 입사한 이들에겐 정규직 전환과 그 이상의 요구가 오히려 불공정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한 정규직 연구원은 “외부에서 더 실력 있는 사람들도 들어오지 못하는데 무기계약직으로 수많은 혜택을 누리면서 그 이상의 기회를 더 달라는 것은 오히려 불공정하고 욕심인 것 아닌가”라고 지적했다.

“정부의 무책임한 정규직 전환 정책 야속해”

아울러 무기계약직의 대거 증가로 인한 정규직 연구원들의 부담이 커진 부분이 있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정규직 전환 방침에 따라 정부에서 추가 예산이 배정됐지만, 인건비의 100%를 보장하진 않기 때문이다. 원래도 화학연 내 연구원 인건비는 정부 예산 일부에 각 연구팀이 과제를 수행해 따낸 연구비를 통해 구성된 원내 예산을 더해 보장한다. 다만 무기계약직이 대거 늘어난 상태에서 당장은 큰 문제가 없어도 시간이 흐를수록 인건비 증가는 필연적이고, 각 연구팀이 더 많은 과제를 수행해야 하거나 혹은 연구에 들어가는 비용이 줄어드는 등 영향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측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러한 양측의 입장 차가 계속되며 불만은 커지고 갈등이 자라나고 있는 상황이다. 겉으로 드러내 다투지 않아도 보이지 않는 불신이 팽배해 보인다. 문제 해결의 출구는 딱히 보이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도 양측 집단에서 공통적으로 나오는 우려는 구성원들 간 갈등과 인력 고착화 등으로 인한 화학연 연구 역량의 질적 하락이다. 또 정규직 전환 방침을 내놓았지만, 이후 터지는 문제들에 대해선 손을 놓고 있는 듯 보이는 정부의 무책임함에 대한 원망과 질책도 나온다.

한 연구원은 “결국은 함께 연구를 해 나가야 할 동료들인데 서로에 대한 오해와 불만, 불신이 쌓여가는 것이 안타깝다. 어쨌든 이미 전환됐고 앞으로는 각각의 입장을 충분히 반영하고 조율해 최선의 환경이 조성됐으면 한다”면서도 “정부의 대책 없고 황당한 정책이 과학기술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무분별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정말 어이가 없다”고 비판했다. 또 다른 연구원은 “모두가 먹고살 만한 처우를 받아야 하는 것은 맞지만 이렇게 졸속으로 할 수가 있나. 정부가 방침만 내려놓고 그 이후로는 ‘나 몰라라’ 하는 것도 야속하다. 결과적으로 정부의 정규직 전환은 실패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갈등과 부작용을 겪고 있는 출연연은 비단 화학연만이 아닌 것으로 전해진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수의 출연연이 정부의 정규직 전환 방침 시행 이후 내부에서 노사 간 혹은 노노 간 갈등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조명희 국민의힘 의원이 지난해 10월 과기정통부 산하 25개 출연연 연구원 300명을 대상으로 정규직 전환에 대한 인식을 조사한 결과, 72.7%(218명)가 ‘부정적 영향을 줬다’고 답했다. ‘긍정적 영향’은 26%(78명)에 불과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선 정부도 인식하고 있다. 다만 여전히 정규직 전환은 필연적인 것이었으며 갈등 등 부정적 기류는 정상화를 향한 과정 중 일부라는 입장이다. 과기정통부 관계자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다소 시간이 걸리고 갈등은 있지만, 똑같이 일함에도 처우 등에서 차별을 받는 비정규직 문제는 반드시 해결이 필요하다”며 “과기정통부 산하에 국가과학기술연구회가 있고 그 밑에 또 각 기관들이 있는데, 그들 각각이 자기 의사 결정 과정을 갖고 있다. 기관들마다 상황도 다르니 정부가 개입하기보다는 탄력적으로 개선해 나가야 하는데 예산 문제 등으로 인해 조금 시간이 걸리고 있는 것 같다. 이런 문제가 단번에 해결되기는 쉽지 않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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