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진이형, 용진이형…구단주들의 ‘요즘 소통법’
  • 김양희 한겨레신문 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05.08 16:00
  • 호수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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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통해 새로운 스토리 만들기 열중…경기장을 새로운 마케팅 실험 무대로 삼아

하얀 셔츠에 넥타이 정장 차림. 경기 전후에 근엄한 표정으로 선수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눈다. 이후 주장에게 금일봉이 건네진다. ‘회장님 방문 행사’는 으레 이랬다. 경기장도 1년에 한두 차례 정도 의례적으로 방문할 뿐이었다. 한국시리즈나 챔피언결정전에 올라야만 ‘격려차’ 구장을 방문하는 구단주도 있으니까, 구단주 얼굴을 모르는 프로 선수도 많았다. 

그런데 요즘은 많이 달라졌다. 구단주들은 ‘○○형’으로 불리기까지 한다. 대표적인 예가 김택진 NC소프트 대표이사 겸 NC 다이노스 구단주다. 김 대표는 지난해 NC가 KBO리그 정규리그 우승에 단 1승만을 남겨놓자 광주·대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팀을 따라다녔다. 창단 첫 우승을 선수단과 함께하기 위해서였다. NC는 결국 안방인 창원구장에서 우승을 확정 지었는데 당시 김 대표는 편한 청바지 차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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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진 SSG 랜더스 구단주(가운데)가 4월4일 인천 SSG 랜더스필드에서 열린 랜더스와 롯데 자이언츠의 개막경기를 관람하고 있다.ⓒ뉴스1

SNS에서도 활발한 움직임…타 구단 도발하기도 

김 대표의 청바지 차림은 한국시리즈 우승 순간에도 이어졌다. NC 우승 순간 김택진 대표는 리니지 게임에 등장하는 집행검을 손수 그라운드로 끌고 나와 주장 양의지가 검을 뽑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봤다. 전형적인 구단주라면 그 순간 아마 함께 검을 뽑았을 터. 그는 한국시리즈 내내 야구장을 찾아 팀을 응원하기도 했다. NC는 팀 창단 후 첫 우승을 일군 선수단에 두둑한 보너스를 안긴 것으로 알려졌다. 그것도 크리스마스 이브에. ‘택진이형’이 확실히 쐈다.

‘용진이형’의 등장은 급작스러웠다. 신세계그룹이 SK 와이번스를 인수할지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은 야구단 인수 뒤 적극적으로 나섰다. 평소에도 개인 SNS를 통해 적극적으로 소통했던 그다. 국내 최고 인기 스포츠인 프로야구 팬들과의 만남으로 시너지는 극대화됐다. 

정용진 부회장은 주로 오디오 SNS 플랫폼 클럽하우스를 통해 팬들과 대화한다. 구단주로는 다소 파격적인 “키움을 발라버리고 싶다”는 말까지 거침없이 한다. 히어로즈 구단 네이밍 스폰서가 넥센이었을 때 인수를 타진했는데 무시를 당했기 때문이란다. 그는 최근 자신의 SNS에 SSG 랜더스 야구단 실제 홈 유니폼을 위아래로 갖춰 입고 인증샷을 남기기도 했다. 여느 구단주도 하지 않았던 모습이다.

정용진 부회장은 이에 그치는 않는다. 다른 팀 구단주를 도발하기까지 한다. 정 부회장은 “(야구를) 본업과 연결하지 못하는 롯데를 보면서 야구단을 꼭 해야겠구나 생각했다. 게임에선 우리가 질 수 있겠지만, 마케팅에서만큼은 반드시 이길 자신이 있다”면서 “롯데는 울며 겨자 먹기로 우리를 쫓아와야 할 것”이라고 했다. 

정 부회장의 자극에 응답했는지 롯데그룹 회장인 신동빈 롯데 자이언츠 구단주는 4월27일 잠실 LG-롯데전에 모습을 드러냈다. 신 회장의 야구장 방문은 지난 2015년 9월 이후 6년여 만이었다. 정 부회장은 이에 대해 “내가 도발하니 제스처를 취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더불어 “라이벌 구도를 통해 야구판이 더 커지길 원한다”는 속내도 드러냈다. 

야구판이 커진다는 것은 유통기업의 마케팅 대상이 더 확장된다는 뜻도 된다. 정용진 부회장은 스포츠라는 거대 콘텐츠를 통해 유통의 진화를 꿈꾸고, 이를 위해 MZ세대의 눈높이에 맞춰 적극적으로 마케팅을 펼친다. 분명 앞선 세대의 대그룹 총수에게서는 볼 수 없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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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2020년 11월24일 NC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축하하고 있는 김택진 NC 구단주 (오른쪽)2020년 11월1일 전북 현대가 K리그1 우승을 확정 지은 후 정의선 구단주가 이동국을 포옹하고 있다. ⓒ뉴스1·연합뉴스

선수 은퇴식까지 참석한 정의선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의 스포츠 사랑은 익히 잘 알려져 있다. 정 회장은 프로야구 KIA 타이거즈, 프로축구 전북 현대 모터스 구단주다. 그는 자주 전주월드컵경기장(전북 현대)과 광주 챔피언스필드(KIA)를 찾아 직관을 한다. 

지난해 11월 있었던 전북 현대 이동국의 은퇴식에도 참석했다. 비가 오는 궂은 날이었지만 킥오프 때부터 경기가 끝난 후 진행된 은퇴식까지 모두 지켜봤다. 이 과정에서 30분 넘게 우산 없이 비를 맞기도 했다. 정 회장은 이날 이동국에게 미니밴 교환권도 전달했는데, 이는 현대차가 후에 선보인 MPV(다목적 차량) 스타리아였다. 스포츠팬들의 관심이 집중된 ‘라이언 킹’의 은퇴식에서 자연스럽게 기업의 미래 전략 모델을 노출시킨 것. 정 회장 또한 스포츠 행사 참석을 통한 미디어 노출로 딱딱한 ‘회장님’ 이미지에서 벗어나고 있다. 

정태영 현대캐피탈 대표이사 부회장 겸 프로배구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 구단주의 배구 사랑도 남다르다. 정태영 부회장은 천안에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배구 전용 클럽하우스, 캐슬 오브 스카이워커스를 지난 2013년에 지었다. 팬 중심 이벤트와 감각적인 마케팅으로 천안을 배구특별시로 탈바꿈시키기도 했다. 

조원태 대한항공 회장 또한 선대 회장의 대를 이어 프로배구 대한항공 점보스 구단주가 되면서 배구장 나들이가 잦아지고 있다. 지난 시즌에는 특별한 행사가 없는데도 1주일에 두 차례 코트를 방문하기도 했다. 조 회장은 현재 한국배구연맹(KOVO) 총재까지 맡고 있다. 앞서 언급한 다른 구단주에 비해 아직은 정장 차림의 사무적 느낌이 강하지만 조금씩 변화할 것으로 보인다. 

스포츠는 스토리다. 보통은 선수와 감독, 그리고 팬이 스토리를 만들어간다. 하지만 최근 들어 구단주가 추가됐다. 김택진·정용진 등 구단주들은 분명 이전과는 다른 행보를 보인다. 이들의 탈권위적 모습에 여타 구단주들도 조금씩 꿈틀댄다. 스스로 장기판 위의 말이 되어 게임을 주도하려 한다고 할까.

어쩌면 구단주들이 가장 먼저 깨우쳤는지 모른다. 옛 시대의 근엄과 존엄만으로는 그들의 새로운 고객인 MZ세대를 설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조금 더 개방적이고 오픈된 모습으로 지속 가능한 기업의 로드맵을 짜야만 한다는 것을. 이를 실험할 수 있는 무대가 바로 스포츠 판일 것이다.

참고로 미국프로농구(NBA) 댈러스 매버릭스 구단주인 ‘억만장자’ 마크 큐반은 홈경기가 있는 날이면 일찍 농구장을 찾아 림을 향해 공을 던지는 것을 즐긴다고 한다. 그는 “사업을 스포츠 경기처럼 생각하고 이기는 것에 집중하다 보면 성공 가도를 달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국내 프로 스포츠 구단주들의 생각은 과연 어떨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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