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차별 없다”는 영국 보고서, ‘백인 우월주의’ 민낯 드러내다
  • 방승민 영국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05.12 12:00
  • 호수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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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정부 “가장 취약한 계층은 소수인종 아닌 백인 남성”…유엔 등 “보고서, 제대로 된 현실 파악에 실패”

코로나바이러스가 유럽 전역으로 본격 확산하기 전인 지난해 2월, 영국 런던 번화가 옥스퍼드 거리에서 영국 유학 중인 싱가포르 국적 대학생 조나단 목이 ‘묻지마 폭행’을 당했다. 영국 국적의 15세 소년과 그 무리는 피해자를 향해 ‘코로나바이러스’와 ‘질병 덩어리’라고 외치며 무차별적으로 폭행을 가했다. 1년간 재판이 이어진 끝에 올해 1월, 재판부는 이 사건에 대해 ‘피해자의 인종적 외모’가 아닌 ‘정당한 이유가 없는’ 폭행 사건이라고 결론지었다. 가해자는 우발적 폭행임을 시인하면서도 인종차별적인 이유로 폭행을 가한 것은 결코 아니라고 거듭 주장해 왔다. 그러나 현장에 있던 목격자들의 증언을 통해 가해자가 당시 피해자에게 인종차별적 발언들을 쏟아냈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재판은 유죄 분위기로 기울었다.

그 무렵 영국 정부는 미국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을 계기로 전 세계에 퍼진 ‘Black Lives Matter(흑인 인권도 소중하다, 이하 BLM)’ 운동에 대한 현황 점검 차원에서, 영국 내 인종차별에 관한 보고서 작성을 시작했다. 정부는 최근 증가한 영국 안팎의 인종차별적 폭행 사건 현황을 파악하면서, 비단 폭행뿐 아니라 그 기저에 작용하는 일부 인종의 사회경제적 불이익과 인종들 간의 관계 또한 다루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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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7일(현지시간) 영국 남서부 브리스틀 시내에서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17세기 노예무역상 에드워드 콜스턴의 동상을 강물에 던지고 있다.ⓒAP연합

빈약한 통계 내세워 “증오범죄 줄었다” 주장

지난 3월 보고서를 공개하며 인종차별에 대해 영국 정부가 내린 결론은 큰 파장을 낳았다. “영국에는 더 이상 인종을 차별하는 구조적인 제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더불어 소수인종 시민들이 현재와 같은 차별적 일상을 갖게 된 데는, 인종보다 개개인의 가정 및 소속 문화권 내 계급구조가 훨씬 큰 영향을 미쳤다고 밝혔다. 보고서가 발표된 직후부터 유엔을 비롯해 유럽 인권 평등 감시기구 등의 비판이 끊이지 않고 있다. 특히 유엔의 인권 전문가들은 이 보고서가 ‘백인 우월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시도라고 강도 높게 비난했다.

이 보고서의 전체적인 방향성을 정리해 놓은 메인 챕터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모든 소수인종이 동일한 운명을 갖고 태어나 불이익을 받고 있다는 생각은 시대착오적이다.’ 보고서는 그 근거로 런던 지역과 기타 지역 간 기회 불평등 논리를 꺼내들었다. 즉 영국 내 소수인종의 40%가 수도인 런던 지역에 거주하면서 이익을 누리고 있으며, 이 거주 비율은 백인 영국인 9%에 비해 높은 수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곧 수치 해석에서부터 오류가 있다는 지적을 받았다. 2020년 7월을 기준으로 영국 총인구 6600만 명 중 87.2%가 백인이며 소수인종 비율은 단 9.2%에 그친다. 이 비율을 바탕으로 런던에 거주하는 인구수를 다시 계산하면 백인 영국인은 510만 명, 소수인종은 240만 명이다.

정부는 런던이 다문화를 기반으로 한 비즈니스·문화·예술 산업의 중심지임을 줄기차게 홍보해 그 수혜가 소수인종에게 대부분 돌아가는 듯한 뉘앙스로 인종 문제에 접근했다. 또한 정부는 실질적으로 가장 취약한 계층은 소수인종이 아닌 젊은 백인 남성군이라는 입장도 펼쳤다. 특히 공업·해안 지역에 거주하는 젊은 백인 남성들의 경우 대다수가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으며, 중·고등학교를 마치지 않은 비중도 상당히 높다는 점을 근거로 삼았다. 정부의 이러한 주장은 인권 전문가들 사이에서 인종차별 문제의 논점을 흐리는 것이란 비난을 받고 있다.

전문가들은 보고서가 인종과 관련된 뿌리 깊은 문제의 본질을 잘 파악하지 못하고 발표한 것이라 지적하며 그 대표적인 예로 ‘증오범죄’를 꼽았다. 2020년 3월 기준, 경찰이 기록한 영국 내 증오범죄는 9년 전과 비교해 약 131% 증가했다. 그러나 정부는 이와 같은 증오범죄 증가율에 대해, 과거에 비해 정교해진 경찰의 기록 프로세스와 증오범죄에 대한 인식 증가의 영향이라고 분석했다. 동시에 잉글랜드 및 웨일스 지역 범죄 데이터를 근거로 들며 “2010년부터 2012년까지 인종차별적 범죄는 14만9000건에 달했으나 2018년부터 2020년 3월까지의 동일 범죄 건수는 10만4000건으로 오히려 줄어들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 수치에는 구체적인 범죄 집계 기준이 설명되어 있지 않았다. 게다가 영국 내 코로나19 사태가 악화되며 동양인에 대한 인종차별 범죄가 본격적으로 늘어난 최근 1년의 데이터도 정부는 언급하지 않았다.

보고서는 과거 노예제도로 인해 강제로 영국에 정착하게 된 아프리카계 흑인들의 2세대와 3세대들이 영국 사회 내 아프리카계 영국인으로 얼마나 잘 적응했는지도 설명했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 유엔은 ‘비난받아 마땅한 논리’라고 강하게 지적했다. 이러한 언급은 마치 아픈 과거는 잊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만 주목하자고 주장한 일본 정부의 위안부 입장을 상기시킨다는 비판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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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3일(현지시간) 영국 런던에서 미국 백인 경찰의 가혹행위로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사망한 데 항의하는 시위대가 ‘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고 쓰인 팻말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EPA연합

“보고서에서 우리 이름 빼 달라” 요구 이어져

영국의 주요 언론들도 이 보고서가 발표된 후 그 내용에 대한 사회 각계의 비판을 앞다퉈 전했다. 특히 가디언지는 이 보고서에 대한 독자들의 서한을 모아 기사로 전했다. 영국 남서부 웨이머스에 거주하는 존 오렐 박사는 이 보고서가 “영국에 실존하는 제도적 인종주의를 부인하고 있다”면서 “정부의 이러한 부인은 되레 인종주의가 실존하고 있음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라고 전했다. 아프리칸 보건정책 네트워크의 데릭 브라운은 아프리카계 흑인들이 얼마나 영국에 잘 적응했는지를 논하는 보고서 내용을 반박하며, 백인 중심 시각에서 독단적 설명이 이뤄져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흑인들의 관점에서 이들이 겪었던 납치·인신매매·고문·아동학대·강간 및 살인과 이로부터 이어진 백인과의 극명한 차이를 논의해야 한다고도 꼬집었다.

계속되자 해당 보고서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전문가 중 20여 명이 보고서에서 자신들의 이름을 철회하겠다고 밝혔다. 이들 중 대다수는 자신들의 증언이 보고서 작성 위원회에 의해 일부 무시됐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영국 정계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적지 않다. 특히 노동당은 정부가 분명하게 현존하는 구조적 인종차별을 경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버밍엄 지역 의원들은 “이 보고서는 매우 방어적이며, 현실 문제를 파악하는 데 실패했다”고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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