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리더십 붕괴로 조폭이 통치하는 베네수엘라
  •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06.24 12:00
  • 호수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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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한 마두로 대통령, 통제력 상실
갱단이 공권력 대신 무소불위 권력 휘둘러

축구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는 남미를 뜨겁게 달굴 코파아메리카(남미축구선수권대회)가 6월14일 브라질의 브라질리아에서 개막했다. 지난해 6월로 예정됐던 아르헨티나 대회가 코로나19로 1년 연기된 끝에 열렸으니 남미 축구팬들의 반응이 열광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6월13일로 예정됐던 개막전은 예정대로 열리지 못했다. AP·AFP통신에 따르면, 12일 코로나19 검사에서 베네수엘라 대표팀 선수와 코치진 12명이 확진돼 호텔에 격리됐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대회는 하루 늦은 14일 개막 경기를 치러 브라질이 베네수엘라를 3대0으로 눌렀다.

어떻게 국제경기를 눈앞에 두고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코로나19와 백신 관련 통계를 보면 그 배경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글로벌 통계 사이트인 월드오미터에 따르면 베네수엘라는 6월16일까지 25만416명의 확진자와 2865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블룸버그 백신 트래커에 따르면 베네수엘라에서는 코로나19 백신이 6월17일까지 23만 회분 접종돼 전체 인구에서 1회 이상 접종자가 0.8%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종합하면 상황이 심각한데도 백신 접종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을 정도로 베네수엘라 정부가 손을 놓고 있다는 이야기다. 국가 마비의 전형적인 사례다.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에서 6월13일(현지시간) 광역 정전 사태가 발생한 가운데 한 주민이 휴대전화 조명을 켜 자택 입구를 비추고 있다. ⓒEPA 연합

대통령은 관저에서 대국민 연설 방송만

여기에 최근 뉴욕타임스(NYT)는 더욱 가관인 베네수엘라의 국가 마비 사례를 송고했다. NYT는 ‘바운시 캐슬(공기를 주입해 만드는 성 모양의 어린이용 놀이기구)과 수류탄: 갱들이 카라카스에 대한 마두로의 장악력을 갉아먹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갱단(조직폭력단)이 수도 카라카스의 빈민가에서 정부 역할을 대신하는 상황을 전했다.

인구 225만 명의 도시 카라카스는 베네수엘라의 수도로 행정과 문화 중심도시다. 그곳에서도 심장부는 도시 중북부에 있는 대통령 관저인 ‘팔라시오 데 미라플로레스’다. 갈색 지붕을 얹고 분홍색과 흰색으로 깔끔하게 외벽을 칠한 이 유럽식 건물은 1884년 건설된 고풍스러운 건축문화유산이다. 근처에 남미 국가들의 독립을 이끈 혁명가 시몬 볼리바르(1783~1830)의 탄생지 기념관과 군사박물관, 가톨릭 성당, 연방법원 건물 등이 즐비한 나라의 중심지다.

NYT는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이 이 관저에서 정기적으로 대국민 연설을 하며, 방송은 이를 전국에 생중계한다고 소개했다. 마두로 대통령은 주로 자신이 통치하는 베네수엘라가 얼마나 안정적인지를 강조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는 거리가 먼 프로파간다일 뿐이다. NYT는 마두로의 통치 방식을 ‘부패의 리더십’이라고 표현했다. NYT는 이 부패가 미국의 경제제재와 함께 베네수엘라를 허물고 있다고 지적했다. 베네수엘라는 사실 마두로의 본거지인 수도 카라카스에서부터 통제력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이 NYT의 지적이다.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의 라베가에서 6월7일 총격 소리에 한 무리의 시민들이 겁에 질려 달려가고 있다.ⓒEPA 연합

경찰보다 더 중무장한 갱단이 법 집행 역할 

현장을 들여다보자. 대통령 관저에서 서남부로 불과 5km쯤 떨어진 가파른 산비탈에는 코타905와 엘세멘테리오, 그리고 라베가라는 가난한 노동자들의 거주지가 있다. 다닥다닥 붙은 판잣집과 좁디좁은 미로로 이뤄진 빈민가다. NYT가 취재한 코타905는 베네수엘라 동남부 엘발레 지역에 기반을 둔 ‘엘 코로 레오’라는 흉폭한 무장 조직폭력단이 점거하고 있었다. 이들이 지역을 장악하면서 사실상 공권력이 들어오기 힘든 ‘해방구’가 됐다. ‘레드 존’ 또는 ‘노 고 존’으로 불리는 조직폭력단의 해방구는 베네수엘라 서부 콜롬비아 국경지대를 비롯한 벽지는 물론 수도 한복판에도 버젓이 자리 잡고 있다.

NYT에 따르면 이곳은 수도에서 마두로의 통제력이 가장 덜 미치는 지역이다. 코타905는 이웃한 엘세멘테리오·라베가 지역과 함께 30만 명의 주민이 빽빽하게 사는 곳이다. 이곳에 마두로 정권의 권력 공백을 이용해 카라카스 최대의 무장 조폭인 엘 코로 레오가 자리를 잡았다.

지리 정보 매체인 월드아틀라스에 따르면 카라카스는 인구 10만 명당 연간 피살자가 100명에 이른다. 전 세계 도시 중 멕시코의 티후아나(138명)와 아카풀코(111명)에 이어 위험한 도시 3위에 올랐다.

조폭들은 느슨해진 정부를 대신해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주민들에게 식료품을 공급하고, 의약품을 제공했으며, 장례식을 도왔다. 운동팀에 스포츠 장비를 제공하고 심지어 음악회도 후원했다. 국경일에는 장난감과 거대한 바운시 캐슬을 어린이들에게 선물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국가가 아닌 무장 조폭이 ‘로빈 후드’가 된 셈이다. 카라카스는 급속도로 셔우드 숲(로빈 후드의 본거지)으로 변모했다. 

조폭은 유탄발사기와 드론, 고속 모터사이클을 갖춰 현지 경찰보다 더 잘 무장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조직원들이 베네수엘라의 그 어떤 법 집행기관원보다 더 많은 급여를 받는다는 점이다. 이들이 통제하는 지역에 법 집행기관이 접근하기 힘든 이유다.

레드 존에선 갱단이 실질적인 법 집행기관 역할을 한다. 도둑질을 하다 잡히면 총을 쏘아 손을 날린다. 율법에 따라 도둑의 손목을 자르는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나 마찬가지다. 상습범은 사살한다. 재판 따위는 없다. 주민들도 경찰을 부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심지어 경찰이 오지도 않는다. 조폭은 내부 규율이 살벌하다. 지하세계를 떠나려는 단원은 배신자로 간주하고 끝까지 추적해 처단한다. 조폭은 납치·마약 거래 등으로 수입을 올리며, 주민을 방패 삼아 공권력에 저항한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져도 이들의 통제 아래 사는 주민의 상당수는 갱단의 지배가 과거 국가권력의 공백 사태로 무법과 폭력이 판치던 때보다 낫다고 말한다고 NYT는 전했다. 주민들은 자신들은 아무런 희망이 없었고, 정부로부터 어떠한 도움도 얻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말이 갱단의 보복이 두려워서 하는 것일 수도 있다.

NYT는 지난 몇 년간 유가 하락과 석유산업 마비 등으로 경제가 피폐해지자 마두로 정권은 경찰·도로관리·보건의료·공공시설 등에 대한 정부 역할을 포기했다고 지적했다. 요새화된 관저에 웅크린 마두로는 독재에 항의하는 야당을 탄압하고, 이견을 보인 보안기구 간부들을 숙청하면서 석유 등 이권을 챙겨 자신과 친구들 배만 불려왔다.

ⓒEPA ·AP 연합

석유로 인한 일시적 호황에 취해 경제 붕괴

그러는 사이 벽지에선 범죄 조직과 반란자들이 힘을 얻어갔다. 급기야 자신의 관저에서 불과 5km 떨어진 수도 카라카스의 코타905 지역까지 로빈 후드 행세를 하는 갱단이 통제하기에 이른 셈이다. 마두로 정권의 베네수엘라 통제가 한계에 달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상황이다. 베네수엘라 전역에 걸쳐 가난한 노동자 거주지역이나 빈민가를 무장단체가 접수해 가고 있다는 게  NYT의 현지 보도다. 

마두로 정권은 지난 1월8일 조폭이 정부를 대신하는 지역을 무력으로 수복하려고 시도했지만 ‘국가 폭력’의 잔혹상만 보여줬을 뿐이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당시 베네수엘라의 국립경찰, 경찰 특수행동부대(FAES), 그리고 국립경비대 등 이 나라의 다양한 보안조직이 힘을 합쳐 코타905의 이웃인 라베가 지역을 급습했다. 지역의 통제권을 둘러싸고 국가권력과 조폭이 충돌한 셈이다. 현지 탐사보도 기자들은 이 습격으로 23명의 주민이 숨졌다고 보도했지만 마두로 대통령 정부는 아무런 발표도 하지 않았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희생자 가족은 사망자들이 집에서 저항하지 않고 체포된 뒤 초법적으로 처형됐다고 주장했다. 베네수엘라 인터넷 매체인 ‘룬루네스(소문)’는 비정부기구(NGO)의 희생자 모니터링을 인용해 사망자들이 장례식도 없이 공동묘지에 묻혔다고 전했다. 모니터링은 23명 중 10명만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이 중 3명은 미성년자라고 밝혔다.

FAES는 ‘베네수엘라 게슈타포’로 불리는 조직으로 반체제 운동과 국가 전복 기도를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2016년에 설립된 경찰 특수부대다. 작전 중 저항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도 재판 없이 초법적인 처형과 부당한 구속을 일삼아 ‘국가 폭력조직’으로 악명이 높다.

영국 BBC에 따르면 2019년 6월 유엔 인권고등판무관사무소(OHCHR)의 미셸 바첼렛 대표(현 칠레 대통령)는 수십 건의 초법적인 살해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FAES의 해산과 독립적인 조사를 베네수엘라 정부에 요구했다. 하지만 마두로 대통령은 FAES 지휘관들과 함께 대중 앞에 나타나 이들을 칭찬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FAES야말로 마두로 정권을 수호하는 ‘국가폭력의 기둥’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국가폭력기구의 힘으로 정권을 유지하고 있음을 만천하에 밝힌 셈이다. 로이터에 따르면 유엔도 2020년 마두로 정권이 조직적인 인권 침해와 반인륜 범죄를 저질러왔다며 초법적인 처형을 저질러온 FAES의 해체를 요구했다.

베네수엘라에는 우고 차베스 대통령(1954~2013, 재임 1999~2013) 시절부터 콜렉티보스로 불리는 ‘볼리바르 혁명 자경단’이 존재해 왔다. 정권에서 불법적으로 무기와 자금을 제공해 야당이나 시위대가 권력에 도전하면 맞불을 놓는 게 임무다. 정권이 나라 전역을 폭력의 장으로 만든 셈이다.

조폭들이 지역을 장악한 현실은 차베스 전 대통령과 그를 이은 마두로 대통령의 포퓰리즘 정권이 망친 베네수엘라의 현실을 생생히 보여준다. 세계 1위의 석유 매장량이 오히려 비극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자원 수출에 따른 일시적 경제 호황에 취해 제조업을 비롯한 산업 다양화를 게을리한 ‘네덜란드 병’의 전형이다. 여기에 정치적인 목적으로 정부 재정 퍼주기까지 일삼다 결국 통화가치 상승으로 국가경제가 무너진 게 베네수엘라 비극의 본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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