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간 김정일 경호…김정은 생모는 김옥이라 생각”
  • 오종탁 기자 (amos@sisajournal.com)
  • 승인 2021.10.10 10:00
  • 호수 1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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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면과 철조망⑬] 北 974부대 출신 강진씨, 탈북 5년 만에 최초 인터뷰

분단 후 76년이 흘렀다. 북한 권력구조가 하나도 움직이지 않는 사이 북한 주민들은 참 많이 변했다. 이와 관련해 증언해 주고 있는 탈북민들은 “변하고 있는 북한 주민들에게 남한이 관심을 기울여야만 한다”고 입을 모은다. 결코 통일불가론을 주장할 만큼 늦지 않았다는 것이다. 시사저널은 대한민국에 정착한 뒤 남북 간 가교 역할에 앞장서온 탈북민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어본다.(편집자 주)

“탈북민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곳이 아직 있긴 있네요.”

탈북민 강진씨(48)가 인사 대신 건넨 말이다. 그는 북한 최고지도자 경호 담당인 974부대 출신이다. 974부대는 북한 최정예 비밀 조직, 특수부대 중의 특수부대로 알려져 있다. 강씨는 13년간 974부대에 복무하고 제대해 직장 생활 등을 하다가 2016년 탈북했다. 지금은 국내 최대 탈북민 봉사단체인 숭의동지회를 이끌고 있다.    

앞서 974부대원들은 남북·북미 정상회담 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녀 화제가 됐다. 김정은 위원장이 은둔 생활을 탈피하면서 974부대의 존재도 수면 위로 부상했다. 그러나 협상이 결렬된 후 김정은 위원장은 다시 974부대와 함께 국제무대에서 자취를 감췄다.

북한 지도부가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는지는 누구도 알 길이 없다. 악순환이다. 북한의 전향적인 태도가 유일한 희망인 가운데 핵· 인권 등 문제 해결은 더욱 요원해졌다. 더구나 화해 무드에서 ‘남북 관계 개선의 걸림돌’로 치부됐던 탈북민들은 여전히 혼란과 어려움을 겪고 있다. 

ⓒ시사저널 최준필
ⓒ시사저널 최준필

17세에 발탁돼 30세까지 복무 

북한에서 최고지도자 일가를 근거리에서 직접 봤고, 남한에서는 탈북민들을 이끄는 강씨에겐 요즘 상황이 그 어느 때보다 안타까울 따름이다. 강씨를 만나 그동안 삼켜둔 심경을 들어봤다. 그가 언론 인터뷰에 응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북한 974부대 복무 기간은.

“1990년 17살에 병사로 입대해 2003년 30살 되는 해에 특무상사로 제대했다.”

어떻게 입대하게 됐는지 궁금하다.

“북한에서 974부대에 입대한다는 건 대단한 특권이자 가문의 영광이었다. 연줄이 있어 중등반 4학년(졸업반)이던 15살에 후보군에 들어갔다. 북한 당국은 출신성분과 외모, 체격 등을 따져 974부대원 후보를 뽑아 입대 전 2년여간 관리한다. 후보 500여 명 중 17살에 최종적으로 입대한 사람은 나를 포함해 16명밖에 안 됐다. 그만큼 바늘구멍이었다.”       

974부대는 국제사회에 ‘김정은 위원장 밀착 경호 조직’으로 각인됐다. 그런 임무를 맡았나.

“974부대는 단순히 보디가드 역할만 수행하는 곳이 아니다. 근접 경호는 물론, 평양과 그 외 지역을 막론하고 최고지도자 동선이 닿는 곳이라면 주둔해 신변안전에 관한 모든 일을 수행한다. 총 부대원만 5만여 명에 달했다. 나는 평양의 55과에서 신병훈련을 받고 16과에 소속돼 원산, 송남, 창성, 정방 등 4개 초소를 거치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경호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평양의 노동당 중앙위원회 본부 청사보다 지역의 특각(별장)에 머물며 주요 사업을 이끄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자주 드나들었던 원산 특각에는 974부대원 6000명가량이 주둔해 있었다고 강씨는 전했다. 이 밖에 송남 70여 명, 창성 3500여 명, 정방 2000여 명 등 특각 규모와 김정일 위원장 방문 빈도 등에 따라 병력이 배치됐다.

강씨는 각 초소에서 김정일 위원장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고 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자신의 안전을 책임지는 974부대원들을 ‘우리 아이들’이라 부르며 아꼈다. 강씨는 “김정일 위원장이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하고 있어?’ ‘우리 아이들 명절은 잘 쇄?’라는 식으로 974부대원들을 살갑게 챙겼던 기억이 난다”면서 “우리는 우리대로 김정일 위원장을 ‘장군님’이라 부르며 어버이보다 더 높은 존재로 받들었다”고 말했다.

2018년 4월27일 남북 정상회담 당시 북한 974부대원들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탑승한 차량을 호위하고 있다.ⓒ한국공동사진기자단
2018년 4월27일 남북 정상회담 당시 북한 974부대원들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탑승한 차량을 호위하고 있다.ⓒ한국공동사진기자단

김정일 위원장과 관련해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특각에서 김정일 위원장이 아침에 확성기를 들고 ‘빨리 안 나오냐’고 소리친 적이 있었다. 수행원들과 함께 운동하려고 부른 것이다. 김정일 위원장이 식구들과 말이나 배를 타는 모습도 흥미로웠다. 가장 많이 눈에 띈 사람은 김정일 위원장 넷째 부인인 김옥이다. 김옥은 김정일 위원장과 팔짱을 끼고 산책하는가 하면 974부대 초소 책임자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등 실세처럼 굴었다.”

김정은 위원장도 찾아왔겠다.

“김정일 위원장 장남인 김정남과 차남 김정철만큼 자주는 아니지만, 본 적이 있다. 너무 어려 그가 후계자가 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이 대목에서 강씨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그는 “10년 넘게 974부대원으로서 북한 최고지도자 일가를 지켜본 바에 따라 판단하자면, 현 북한 권력의 주도권은 김정은 위원장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강씨가 실권자로 지목한 사람은 바로 군 복무 중 수없이 목격했던 김옥이다. 더 나아가 강씨는 김정은 위원장의 생모가 고용희가 아닌 김옥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지금껏 대외적으로는 김정일 위원장의 셋째 부인 고용희가 정철·정은 등 두 아들과 딸 여정을 낳았으며, 2004년 프랑스 파리에서 유선암 치료를 받다가 숨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정은 하사’ 선물, 김옥이 챙겨줘”

고용희가 김정은 위원장의 생모가 아닐 수 있다는 의혹은 처음 제기된 게 아니다. 2017년 2월 김정남 피살 사건 직후 《동아일보》는 대북 소식통을 인용해 김정남이 2010년 6월쯤 마카오에서 “김정은은 김옥의 아들로 1984년생이다” “김정은을 고용희가 데려다 키웠는데, 이를 아는 사람은 김경희(김정일 위원장 여동생)와 장성택(김경희의 남편) 등 몇 명뿐”이라고 지인들에게 말했다고 보도했다.

북한 당국은 고용희가 김정은 위원장의 생모란 정보도 적극 알리지 않고 있다. 고용희가 김정일 위원장의 셋째 부인인데다 재일교포 출신이란 약점을 안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김정은 위원장에게 이보다 더한 ‘김옥 생모설(說)’은 그야말로 역린을 건드리는 주장이고, 김정남 살해로까지 이어졌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성 편력이 심했던 김정일 위원장이 사망 때까지 30년 넘게 김옥과 같이 산 점, 김옥이 김정은 위원장 집권 후에도 1년 가까이 공식석상에 나타난 점 등이 해당 가설을 뒷받침했다. 강씨는 이에 더해 정방 초소에서 청소년이던 김정은 위원장을 만난 기억을 떠올렸다.

 

정방 초소에서 어떤 일이 있었나.

“김정은 위원장이 16~17살 때쯤 정방산 특각에 놀러와 974부대원들과 즉석에서 농구경기를 펼쳤다. 이긴 팀이 선물을 받게 됐다. 담배, 오리 등이었는데, ‘어머니 선물’이라며 김옥이 주더라. 평소 김옥의 강한 성격과 영향력을 모르지 않았으나, 이 일을 통해 더욱 느꼈다. 이후 김정은 위원장이 집권해 빠르게 권력을 장악하는 모습을 보면서 당연히 김옥의 ‘치맛바람’이 작용했으리라 확신했다. 김옥이 김정일 위원장 말년부터 974부대는 물론 당, 국가보위성, 외교 관계 등을 전방위로 주물러 놓지 않았다면 김정은 위원장이 그렇게 쉽게 입지를 구축하기 힘들었을 듯하다. 김옥은 김정일 위원장이 사망하기 석 달여 전 러시아 방문길에도 동행했다. 김정은 위원장으로의 권력 승계 작업을 진두지휘하고 있었을 것이다.”

김옥이 모든 보직에서 물러났고, 심지어 장성택과의 커넥션이 드러나 숙청당했다는 설까지 돌았는데.

“내 경험과 직감에 비춰볼 때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중에라도 진실은 드러날 것이다.”

 

특별한 군 생활을 보낸 강씨는 2003년 제대한 후 충격적인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974부대원들에겐 휴가가 아예 없다. 정확히 13년 만에 찾은 고향(양강도 혜산)은 입대 전보다 더 낙후돼 있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불어닥친 이른바 ‘고난의 행군’(식량난) 탓이었다. 아들에게 따뜻한 밥이라도 지어주고 싶었던 강씨 어머니는 쌀을 살 돈도, 꿀 곳도 없어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강씨는 군 생활 동안 차곡차곡 모은 생활비 2만 원을 들고 어머니와 장마당으로 나갔다. 2만 원으로 살 수 있는 쌀은 23kg에 불과했다. 강씨는 “장군님(김정일 위원장)을 위해 10년 넘게 충성했는데, 당장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이후 강씨는 당국의 제대군인 지원으로 4년6개월간 대학 교육을 받았다. 팍팍한 생활 중에도 그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며 행복한 미래를 꿈꿨다. 희망은 오래가지 않았다. 결혼한 지 4년 만에 아내가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버렸다. 대학을 채 졸업하기도 전이었다. 또다시 남은 건 지독한 가난뿐이었다.

974부대 제대 후 대학에 입학해 공부하던 시절의 강진씨. 군 복무 중 사진은 일절 찍을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강진 제공
974부대 제대 후 대학에 입학해 공부하던 시절의 강진씨. 군 복무 중 사진은 일절 찍을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강진 제공

제대 후 나쁜 일이 한꺼번에 닥쳐왔다.

“같이 대학에 다니는 친구들 가운데는 학교 측에 뇌물을 주고 학점을 대충 따는 이가 많았다. 공부할 시간에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나는 그러지 않고 공부를 하면서 아내 치료까지 신경 써야 해 너무 힘들었다. 결국 아내를 지켜주지도 못했다. 군 복무 중엔 몰랐는데, 현실에 맞닥뜨리니 ‘가난은 임금도 구제하지 못 한다’는 말이 절절하게 와닿았다. 동시에 희망이라곤 보이지 않는 북한 사회에 대해 불신이 생기기 시작했다. 위에서 하라는 대로 했다간 나와 내 가족을 지키지 못하겠구나 싶더라.”

 

보위성 탈락 후 탈북 브로커 활동

아내와 사별한 뒤 강씨는 974부대 복무 이력을 내세워 보위성에 지원했다. 결과는 탈락이었다. 친척 중 탈북민이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얼굴도 모르는 5촌 고모였다. 북한 정권을 향한 반발심은 더욱 커졌다. 나중에 연락이 닿은 5촌 고모는 미안하다며 강씨에게 한국 돈 200만 원을 중국 위안화로 바꿔 보내줬다. 강씨는 “한국 돈 100만 원이면 북한에서 세 식구가 배를 곯지 않고 1년 동안 살 수 있는 액수”라며 “말로만 들었지, 남한이 잘 산다는 걸 비로소 체감했다”고 했다.

강씨는 협력사업 교원, 양곡장 직원 등으로 일하며 따로 장사를 했다. 당국에 충성하고 사회주의 계획 경제 체제를 믿던 강씨는 이제 없었다. 강씨는 북한 주민의 탈북을 돕거나, 남북 이산가족이 중국에서 만날 수 있도록 해주는 브로커 활동도 병행했다. 이 브로커 일로 그는 북한 당국의 추적을 받게 됐고, 결국 탈북하기에 이르렀다.                       

 

브로커 활동을 하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나.

“북한 당국이 허용하지 않는 일을 하면서 나는 오히려 ‘흩어진 가족 만나게 해주는 게 진정한 애국이 아닌가’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이 일이 탈북으로 이어지리란 생각은 못 했는데, 운명처럼 이렇게 되어버렸다.”

2016년 5월 탈북해 그 해 10월 남한 사회로 나온 강씨는 환경업체, 마트 등에서 일하다가 현재는 배송 일을 하고 있다. 그의 주업(主業)은 따로 있다. 바로 봉사다. 그가 이끄는 숭의동지회는 전국 16개 지부를 갖췄고 회원 수만 9000여 명에 이르는 국내 최대 탈북민 봉사단체다. 탈북민은 물론 비(非)탈북민 소외 계층에 대해서도 어디든 찾아가 봉사한다. 

강진씨가 숭의동지회의 최근 봉사활동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시사저널 오종탁
강진씨가 숭의동지회의 최근 봉사활동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시사저널 오종탁

봉사에 매진하는 이유는 뭔가.

“상상도 못했던 탈북을 하면서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이 많았다. 하나원 등을 거쳐 대한민국 사회로 나올 때는 ‘밥이나 먹고 살 수 있을지’까지 걱정됐다. 그러다 정부로부터 지원받은 집에 들어가는 순간 쌀, 기름, 조미료 등이 다 갖춰져 있어서 북받쳐 펑펑 울었다. 고향 집에서 어머니를 만난 느낌이랄까. 냉난방도 잘 돼 있어 마치 별천지 같았다. 국민 전체가 다 이렇게 사는지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다. 다른 탈북민들과 함께 봉사활동을 하면서 정말 어렵게 사는 취약계층을 많이 봤다. 깜짝 놀랐다. 한국에 대한 고마움을 안고 나보다 힘든 사람들을 위해 살리라 다짐하게 됐다. 봉사를 제대로 해 보기 위해 사회복지를 공부하고 있고 사회복지사 자격증도 취득할 계획이다.”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당장의 생계도 중요하나,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동안 봉사만은 죽을 때까지 놓지 않을 것이다. 탈북민 봉사단체 회장으로서 남북이 대화하고 협력하는 일에도 보탬이 되고 싶다. 곧 탈북민과 비탈북민이 함께 모여 봉사하고 소통하는 행사를 열 예정이다.”

통일에 관한 생각은.

“북한 당국이나 주민들이 단결된 듯해도 뚜껑을 열면 그렇지 않다. 나와 같은 탈북민들이 산증인이지 않나. 특히 북한 지도부를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자. 그들이 통일을 원하지 않는 다는 사실을 금방 간파할 수 있다. 대북 지원이나 남북 교류를 아예 하지 말자는 말이 아니다. 정부에서 지금처럼 탈북민들과 ‘거리 두기’ 할 게 아니라 함께 머리를 맞대 진정한 통일의 길을 모색해 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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