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로에서] 우리 말·글이 살아있어야 할 곳
  • 김재태 편집위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10.11 08:00
  • 호수 1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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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시절 한동안 한자 공부에 빠진 적이 있었다. 선생님이 칠판에 적은 내용을 노트에 옮기면서 한자로 쓸 수 있는 단어를 모조리 한자로 바꿔 적었으니 말 그대로 ‘참’ 독학이었다. 1년쯤 지나니 한자어를 찾을 때 썼던 국어사전은 거의 폐지처럼 구겨졌고, 한자 실력은 눈에 띄게 늘어났다. 당시는 신문 기사마다 한자가 가득했던 때여서 시사를 깨우치는 데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됐다. 한자가 표의어인지라 단어의 뜻을 이해하기도 용이해졌다. 이른바 문해력(文解力)이 한자 독학 전후로 크게 달라진 셈이다. 하지만 그뿐이다. 이제 한자어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나이가 들면서 알고 있던 한자어의 획이 가물가물해져 곤욕을 치르기 일쑤다.

이건 어디까지나 지극히 개인적인 평가이고 체험일 뿐이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한자어를 많이 알고 쓰는 사람이 대우를 받는 일이 드물지 않다. 관공서나 일반 기업에서 기안서라를 것을 작성할 때도 마찬가지다. 한자어를 적당히 섞어 써야 문장을 잘 작성한 것으로 인정받기까지 한다. ‘의견을 모으다’라고 하면 될 것을 한자어를 섞은 ‘의견을 취합하다’로 쓰는가 하면, ‘보내다’를 ‘송부하다’라고 적어 잘난 체를 한다.

그런데 이 이해하기 어려운 ‘유식함’을 가장 크게 뽐내는 곳 중 하나가 다름 아닌 법조계다. 검찰의 공소장이나 법원의 판결문을 보면 대체 자신들의 이해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인지, 보는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인지 헤아리기 어려울 때가 많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부동산 점유권원의 성질이 분명하지 않을 때에는 민법 제197조 제1항에 의하여 점유자는 소유의 의사로 선의, 평온 및 공연하게 점유한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며, 이러한 추정은 지적공부 등의 관리주체인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점유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고 점유자가 스스로 매매 또는 증여와 같이 자주점유의 권원을 주장하였으나(이하 생략)’. 이 글은 대한민국 대법원의 인터넷 사이트에 ‘국가가 취득시효의 완성을 주장한 사건’이란 제목으로 공개된 한 판결문의 일부분이다. ‘점유권원’이니 ‘자주점유’니 하는, 명색이 한자 공부 좀 한 사람이 보기에도 알아채기 힘든 단어들이 매복병처럼 여기저기서 불쑥 튀어나와 머리를 아프게 한다. 좀 더 자세하게 풀어서 설명해주면 더 많은 사람이 뜻을 쉽게 이해할 수 있으련만, 이 글의 어디에도 그런 친절함이나 배려의 의사는 배어 있지 않다. 이는 물론 법조문에 쓰인 용어를 그대로 따라 쓴 사례이므로 그 주체인 판검사 등의 잘못이라고 몰아붙일 수만도 없다. 법률용어 자체를 쉬운 말로 바꾸는 일이 그만큼 긴요하다는 얘기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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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이 나갈 즈음이면 한글날 제575돌을 맞는다. 우리가 이처럼 한글날을 국가 기념일로 정해 해마다 의미를 되새기고 있긴 하지만 우리말, 우리글이 처한 현실은 아직도 앞서 본 판결문만큼이나 어지럽고 답답하기만 하다. 어떤 생각이나 소리도 아름답고 부드럽게 표현해낼 수 있고, IT 시대에서도 앞서 나가는 ‘능력자’ 한글을 이제는 자유롭게 해주어야 한다. 좀 더 당당하게 사람들의 눈과 귀, 입에서 제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우리말·우리글의 실상을 바로 보고, 바꿀 것은 바꿔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도 여러 곳에서 고통받고 있는 우리 글과 말을 잘못의 수렁에서 빼내는 것이 중요하다. 판결문이든, 기안서든 각자의 자리에서 바르게 고쳐 다시 쓰는 일부터 시작하면 된다. 우리 말·글의 진정한 해방이 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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