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사망] 전두환과 같고도 달랐던 노태우의 ‘빛과 그림자’
  • 박성의 기자 (sos@sisajournal.com)
  • 승인 2021.10.26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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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2인자’로 12·12 군사 쿠데타…시민군 진압 주도
대통령 취임 후에는 5공 청산…임종 전 5‧18 유족에 사과

노태우 전 대통령의 삶은 ‘군부 독재’와 ‘민주화’라는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관통한다. 군부 쿠데타 주동 세력이라는 오명과 직접선거로 당선된 첫 대통령이라는 영광 모두, 노 전 대통령 앞에 붙는 수식어였다.

노 전 대통령은 생을 마감하기 전 5·18민주화운동 유족들에게 사죄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 5·18 피해자들에게 사과를 거부하고 있는 전두환 전 대통령과는 다른 행보를 보이며, 과오를 일부 씻어냈다는 평가도 받는다.

 

‘하나회’에 몸담았던 쿠데타 주동세력

노 전 대통령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군인 출신 정치인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과는 육사 동기다. 전 전 대통령과는 제4공화국 당시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결성해 79년 12·12 군사 쿠데타와 이듬해 5·17 내란을 주도했다.

노 전 대통령은 79년 12·12 군사반란 당시 자신이 지휘하던 제9보병사단에서 2개 보병연대를 동원해 반란을 지원했다. 이튿날 쿠데타에 저항하다 쫓겨난 장태완의 후임으로 수도경비사령관(현 수도방위사령부)에 올랐다.

80년 5월 광주민중항쟁 당시 수경사령관으로 5월21일 계엄군의 자위권 발동을 결정했던 회의에 전 전 대통령과 함께 참석했다. 회의 후 수경사의 지휘 통제를 받는 502대대 소속 공격헬기를 광주에 투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나회와 대한민국을 장악했던 노 전 대통령은 전두환 정권의 2인자에 오르며 승승장구한다. 당시 여당인 민정당 대표를 거쳐 13대 대통령으로 권력의 1인자에 올랐다. 대통령 선거 당시 내세운 슬로건이 ‘보통 사람의 위대한 시대’였다. 신군부 출신으로, 군사정권 수혜자라는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한 선거 전략이었다.

1994년 7월6일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식사를 마친 후 어깨동무를 하며 손을 흔들고 있다. ⓒ시사저널 우태윤
1994년 7월6일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식사를 마친 후 어깨동무를 하며 손을 흔들고 있다. ⓒ시사저널 우태윤

첫 직선제 대통령…외교‧대북정책 긍정적 평가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큰 오점을 남긴 노 전 대통령. 그러나 ‘정치인’으로서 일부 긍정적 평가를 받기도 했다. 실제 내치와 외교 정책에 있어서 성과를 내기도 했다. 특히 전 전 대통령의 ‘2인자’라는 오명을 떨치기 위해 ‘5공 청산’을 시작하기도 했다.

민정당 대표 시절 6·29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전격 도입했다. 또 5공 청문회를 개최하는 등 민주화 진전에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시 ‘5공 숙청’이라는 명분으로 전 전 대통령을 백담사로 보내면서, 둘 사이가 틀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에도 능통했다. 노 전 대통령은 취임 후 북방 외교 정책을 폈다. 노태우 정부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1989년 헝가리를 시작으로 공산권 국가들과 외교를 시작했다. 1990년 소련에 이어 1992년에는 중국을 방문해 장쩌민 총서기와 양상쿤 국가주석 등을 만나 수교를 맺었다.

대북정책에서도 일정 부분 성과를 거뒀다. 1988년 7·7선언으로 ‘민족자존과 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다음해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발표했으며, 1990년에는 남북한이 동시에 유엔(UN)에 가입했다. 임기 중 남북고위급회담을 진행해,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선언 채택으로 이어졌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천문학적 비자금 실체가 드러나자 여론은 들끓었고 ‘12·12 및 5·18’ 책임자 단죄로 이어졌다. ⓒ공동취재단
노태우 전 대통령의 천문학적 비자금 실체가 드러나자 여론은 들끓었고 ‘12·12 및 5·18’ 책임자 단죄로 이어졌다. ⓒ공동취재단

장남 통해 5‧18 사과…건강 악화에 별세

그러나 대통령 퇴임 후 말로가 좋지 못했다. 14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김영삼 대통령의 금융실명제로,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 은닉 사실이 밝혀졌다.

박계동 민주당 의원은 1995년 국회 대정부 질의에서 신한은행 서소문 지점에 예치된 110억원 계좌 조회표를 제시하며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 400억원설’을 제기했다. 검찰 수사로 비자금의 실체가 드러났고, 결국 노 전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를 통해 “재임 기간 중 5000억원을 기업으로부터 받았고 1700억원이 남았다”고 실토했다.

결국, 노 전 대통령은 1995년 5·18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신군부 핵심 인사 18명과 함께 구속돼 재판을 받았다. 검찰과 법원은 12·12, 5·17, 5·18을 군사 반란과 내란 행위로 판단했고 전두환 무기징역, 노태우 징역 17년형 등 핵심 관련자들에게 실형을 선고했다. 이후 1997년 12월 퇴임을 앞둔 김영삼 대통령의 특별사면 조치로 석방됐다.

그러나 2002년 암 수술을 받으면서 건강이 악화됐다. 투병 중이던 노 전 대통령은 지난해 5월29일, 장남 노재헌씨를 통해 40년 만에 5·18민주화운동 학살에 대한 사죄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

지병으로 오랜 병상 생활을 해온 노 전 대통령은 최근 병세가 악화되며 의료진의 집중 치료를 받았지만,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결국 현대사에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남긴 노 전 대통령은 26일 향년 89세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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