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박신양은 왜 뒤늦게 미술학도가 됐나
  • 반이정 미술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12.05 13:00
  • 호수 1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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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완성도 떠나 시도 자체에 의미
조직생활에선 얻을 수 없는 자기성찰 기회

11월 중순께, 영화배우 박신양이 인스타그램에 아무 설명 없이 국립안동대학교 미술대학 석사 과정에 응시한 자신의 수험표를 올려 여러 매체가 짧게 기사화한 일이 있었다. 올해 54세인 그는 미술을 전공하지 않고 연기만 해왔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올여름 용인에 위치한 벗이미술관에서 자체 창작센터에 입주한 작가들을 멘토링해줄 수 있냐는 요청을 내게 해왔다. 그곳은 미술 비전공자의 창작을 지원하는 데 특화된 미술관으로 아시아 최초라고 한다. 입주 작가들 중에는 과거 의뢰를 받아 시안을 제작하던 디자이너, 미대를 거치지 않고 창작의 길을 스스로 택한 대안학교 출신자, 그리고 흉부영상의학 계통에서 활동하는 현직 의사도 있었다.

ⓒ연합뉴스
박찬욱 감독이 10월1일 부산 수영구 망미동 국제갤러리에서 자신의 첫 개인 전 ‘너의표정’ 기자간담회를 열고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연합뉴스

미술 비전공자 작가 중엔 디자이너와 의사도

하나 더 소개하자. 12월19일까지 장장 3개월 동안 국내 굴지의 상업화랑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선 영화감독 박찬욱의 첫 개인 사진전이 열리는 중이다. 감독으로 입문하기 전까지 그의 전공은 미술이나 사진이 아니었다. 앞서 언급한 박신양이나 미술 비전공 입주 작가를 박찬욱 감독과 대등하게 비교하기는 어렵다. 그의 사진 작업이 영화의 연장선에 있지 않더라도, 그는 영화감독이 되기 전부터 틈틈이 사진 촬영을 가까이해 왔다고 털어놨을 뿐 아니라, 실제로 CGV용산 아이파크몰에 ‘박찬욱관’으로 표기된 상영관 복도에는 그가 찍은 사진이 순차적으로 교체될 만큼 작업의 양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미술 비전공자의 창작 행위라는 희소한 경험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이들은 같다.

미술 비전공자들이 창작에 뒤늦게 눈뜨는 일은 전공자로선 주목할 사건이다. 전국에서 매해 배출되는 미대 졸업자 수가 적지 않다. 미대 입시를 준비시키는 미술학원 역시 상당수다. 하지만 이들 전공자 가운데 정작 미술계에 잔류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극소수 비전공자의 창작은 희소함을 넘어 기특하고 고무적인 인상까지 남긴다.

작품 완성도는 어떨까. 미술 전공자에게 기대할 수 없는 비전공자 고유의 미감이란 존재할까. 아마 다들 이 같은 반전을 기대할 테지만, 내 경험칙으론 대체로 ‘그렇지는 않다’ 혹은 ‘미흡하다’이다. 내 답변이 김빠지고 무표정한 것으로 보일 테지만 사실이 그렇다. 예술이 평가될 때도 엄연히 ‘트렌드’와 ‘진도’라는 잣대가 작동한다. 느리게나마 변화하는 미적 트렌드와 함께해 오지 못한 비전공자의 작품은 당사자나 주변인이 볼 땐 열과 성이 밴 남다른 성취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미술업계가 지나온 진도의 차원에서 볼 땐 이미 한 철 지난 작업 트렌드인 경우가 비전공자 작품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전공자가 괜히 전공자인 게 아니다.

업계의 외면을 받다가 사후 수십 년이 지나서야 재발견된 반 고흐의 사례가 동시대에서 반복되긴 여러모로 어렵다. 반 고흐가 늦게 신화화된 현상도 트렌드와 진도라는 키워드로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 반 고흐 생전에 외면받았던 작품이나 사후에 주목받은 작품은 물리적으로 변한 게 없다. 그의 작품의 진도는 생전 미술계의 트렌드와 어긋나서 주목받지 못한 경우랄 수 있다. 정교한 사실적인 재현이 지배적인 트렌드였던 시대에, 어딜 봐도 데생력에선 떨어져도 작가 제멋대로의 스타일에 가산점을 매기는 현대 미술계의 트렌드를 앞서 시행한 경우이니 말이다. 반 고흐 사후에 그가 신격화된 현상은 그것만으로 설명되진 않는다. 그에 덧붙여 시장의 수요와 가치를 부풀리는 마케팅이 결합한 결과, 오늘날 반 고흐의 작품은 실제 가치보다 몇 갑절 이상 부풀려져 유통되고 있으며, 그 점에선 정당한 평가일 순 없다고 나는 믿는다.

자신의 작업실을 처음 공개한 2017년 방송에서 박신양은 러시아 유학 시절이던 27세 때 미술관에서 만난 그림 앞에서 몸이 굳는 감동을 받아 창작을 시작했다고 고백한다. 그에게 영감을 준 화가는 러시아의 니콜라스 레리히였다. 웅장한 자연과 전능한 신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경외감에 방점을 둔 낭만주의 회화를 일러스트풍으로 번안한 화가다. 이 러시아 화가의 몽환적인 화풍이 감수성 예민한 20대 후반 박신양에게 각인시킨 자극은, 방송에 비친 박신양의 표현주의적인 창작 행위로 이어진 것 같았다.

‘너의 표정’이란 제목을 건 박찬욱 감독의 첫 개인전은 영화라는 스토리텔링과 대비되는, 스토리가 비어있는 평범한 사물들의 초상을 모은 사진전이다. 세월의 때를 타고 외롭게 놓인 의자, 흰 타일벽과 대비되는 홀로 놓인 비누, 얼핏 유령처럼 보이는 야외에 무심히 걸린 우비. 전시에 출품된 30여 점만으론 완성도나 독창성을 평하긴 어렵지만, 일상 사물을 심미적인 구도로 잡으려 노력한 사진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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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27일 열린 한·중 차세대 대가 예술인 교류전 개막식에서 배우 박신양씨가 자신의 작품 《Bluestone》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자기만족과 성찰 얻는 데 제약은 없다

최근 자서전 집필이 장년이나 노년층 사이에서 버킷 리스트 상위권에 거론된 현상을 보자. 극소수 명망가의 전유물이다시피 한, ‘남에게 들려주는 자기 사연’ 격인 자서전 집필에 일반인이 눈을 돌린 건, 이유야 제각각일 테지만 조직의 일원으로 살아오면서 구현하지 못한 자기애와 인정욕구도 한 이유이겠다. 극소수의 전유물로 간주되는 미술창작에 비전공자가 도전하는 사례도 생업과 무관하다시피 한, 이 ‘자기목적적인 수행’으로부터 조직생활에선 경험하기 어려운 자기성취감을 얻기 때문일 게다.

박찬욱은 첫 개인전의 소회에서 “여러 스태프와 동행해야 하는 영화와 달리 홀가분하고 자유롭게 몰입할 수 있기에 카메라를 놓지 못한다”고 답했다. 박신양도 수년 전 방송에서 서울 자양동의 작업실을 두고 ‘무한한 자유의 공간’으로 표현했다.

일반인 미술 비전공자의 창작이나 영화인의 전시 소식에서 우리는 어떤 의미를 발견해야 할까. 대견하다고 찬사를 보내거나 작품의 완성도를 제 안목으로 따져보는 재미가 있을 게다. 한데 그런 일차원적인 반응은 잠시 제쳐 두고, 영영 망각하고 있던 스스로를 홀가분하게 응시하는 기회로 삼으면 어떨까. 앞서 언급한 이들처럼 그림이나 사진을 미숙하나마 시도해볼 수도 있겠으나, 그 밖의 여아한 시도여도 무방할 것이다. 창작의 효과란 당사자의 성취감이나 수용자의 감동으로 이어지곤 하지만, 창작의 근본은 주변의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온전히 자기만족과 자기성찰을 얻는 것에 있고, 그 방편은 제약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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