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아직 안 죽었어” 자존심 내세우는 푸틴
  •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12.13 11:00
  • 호수 1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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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우크라이나 “러, 내년 1월 우크라이나 침공할 것” 바짝 긴장
푸틴, 중국에 밀려 러시아 소외되는 것에 불만

러시아는 국경을 맞댄 친서방 슬라브 국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것인가. 워싱턴포스트(WP)가 12월3일 “러시아가 이르면 내년 초 약 17만5000명의 병력을 동원해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보도하면서 이런 우려가 본격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WP는 “러시아가 국경지대 네 곳에 50개 ‘전장 전술단(BTG)’을 배치하고 전차와 야포도 증강했다”고 전했다. BTG는 자동차화 보병이나 기갑대대에 지원전력을 보강해 독자 작전능력을 높인 부대다. 화력과 기동력을 강화한 러시아군 개혁의 산물이다.

우크라이나의 올렉시 레즈니코프 국방부 장관은 이날 “러시아가 내년 1월말 대규모 군사공격을 계획하고 있다”며 “러시아는 이미 우크라이나 국경에 9만4000명 이상의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가 국경 배치 병력을 차례로 증강하고 있으며, 내년 초 17만5000명까지 집결하면 우크라이나 침공 작전을 펼칠 수 있을 것이란 이야기다. 그야말로 전쟁이 다가오고 있다는 불길한 소식이다.

소비에트로부터의 독립기념일 30주년 군사 퍼레이드에 참가한 우크라이나 군이 8월24일 키예프 시내 독립광장을 행진하고 있다.ⓒEPA 연합

나토의 동진 정책이 러시아 자극해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왜 이렇게 국경에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는 것일까. 푸틴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의 공세적인 확장이다. 냉전시대 북미와 서유럽의 군사동맹인 나토는 1991년 소련이 무너지자 동진(東進)에 나섰다. 냉전 당시 소련이 주도했던 바르샤바조약기구 회원국이던 체코·헝가리·폴란드가 1999년 나토에 가입한 것이 시작이었다. 2004년에는 옛 바르샤바조약기구 회원국인 불가리아·루마니아·슬로바키아와 구(舊)유고슬라비아에서 분리한 슬로베니아는 물론 1940년 구소련에 점령돼 그 일부를 구성했던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의 발트 3국까지 나토에 가입했다.

문제는 나토의 동진으로 러시아는 나토 회원국과 바로 국경을 맞대게 됐다는 점이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러시아의 역외영토(본토와 육상으로 연결되지 않는 땅)인 칼리닌그라드(옛 독일 동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로 2차 세계대전 뒤 소련이 합병)와 접경하게 된 것은 물론 에스토니아·라트비아와는 직접 국경을 맞대게 됐다.

러시아 입장에서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국경을 맞댄 우크라이나에서 더 큰일이 벌어졌다. 수도 키에프에서 2013~14년 벌어진 유로마이단 시위 사태로 친러파 범슬라브 연합주의자였던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쫓겨나 러시아로 망명했다. 국민은 유럽연합(EU) 가입을 원했는데 야누코비치는 이에 부응하지 못했다. 이어서 들어선 새 정부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내세우며 반러·친EU 정책을 펼쳤다.

주목할 점은 한반도의 약 6배인 60만㎢의 국토에 인구 4139만의 우크라이나가 7개국과 6993km의 긴 국경을 맞대고 있다는 사실이다. 루마니아(531km)·폴란드(428km)·헝가리(103km)·슬로바키아(90km) 등 EU 회원국 4개국과 EU와 협력협정(EUAA)을 체결한 가입 희망국 몰도바(939km), 그리고 러시아(1974km)·벨라루스(891km)와 각각 접한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우크라이나가 EU나 나토에 가입하면 2000km 가까운 국경에서 서방진영과 사실상 마주하게 된다. 푸틴에겐 악몽이다.

러시아는 2014년 2월 야누코비치가 모스크바로 피신하자 우크라이나령인 크림반도를 병합했다. 1954년 소련이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로 넘긴 땅이다. 우크라이나는 병합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막을 수도 없었다. 이에 맞서 미국과 유럽은 러시아에 경제 제재를 가하고 있지만 효과는 미지수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역사적 기원을 함께하지만, 애증의 관계다. 우크라이나 일부에선 범슬라브주의를 내세워 통합을 말하지만, 상당수는 권위주의적인 러시아를 환영하지 않는다.

가슴 아픈 과거사도 있다. 미국 예일대 역사학 교수인 티머시 스나이더의 《피에 젖은 땅-히틀러와 스탈린 사이의 유럽》(글항아리)에 따르면, 소련공산당은 우크라이나에서 엄청난 살육극을 벌였다. 소련의 권력자 이오시프 스탈린은 1928~32년 첫 5개년 경제계획에 나서면서 기름진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의 농민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그는 우크라이나의 곡물을 수출해 얻은 자금으로 산업화에 나설 계획이었다.

공산주의 이념에 맞춰 사유재산 금지와 농업 집단화를 추진한 스탈린은 땅과 자유를 뺏긴 농민들이 저항할 것을 우려해 ‘클라크(부농) 청산’을 내세워 대대적인 숙청에 나섰다. 1930년 첫해에만 3만 명 이상을 처형하고 11만 명 이상을 시베리아나 중앙아시아 오지의 굴라크(수용소 담당 국가보안군 지국) 강제노동수용소로 추방했다. 기관원들은 농민들로부터 종자를 포함한 곡물을 대량으로 징발했으며, 농민들은 농사에 필요한 소를 빼앗기느니 차라리 도살했다. 이런 상황에서 흉년이 들어 1932~33년 250만~350만 명이 굶어 죽었다. 피해자가 1000만 명에 이른다는 주장도 있다. ‘홀로도모르(아사)’로 불리는 비극이다.

우크라이나는 이를 소련이 우크라이나인에 대해 벌인 인종학살로 여기며, 유럽의회는 인간 존엄성을 짓밟은 반인륜적인 범죄로 간주한다. 문제는 소련과 러시아의 이미지가 때로 중첩된다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12월7일 열린 푸틴과 조 바이든 대통령의 미·러 화상 정상회담은 말싸움으로 끝났다. 바이든은 “긴장을 고조시키면 제재를 가하겠다”고 압박했지만, 푸틴도 “우크라이나 위기의 책임을 우리에게 떠넘기지 말라”며 물러서지 않았다. 푸틴의 말에는 민주주의·인권·자유를 앞세운 EU와 나토가 러시아와 접경한 우크라이나까지 확장되는 것은 국가안보의 문제이므로 좌시하지 않겠다는 뜻이 담겨있다.

ⓒTASS 연합
푸틴 러시아 대통령(가운데)이 11월4일 우크라이나령 크림반도 세바스토폴을 방문해 내전 희생자 추모비를 둘 러보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이날 연설에서 크림반도 병합의 정당성을 재차 주장해 우크라이나의 반발을 샀다.ⓒTASS 연합

푸틴의 심리전·선전전일 수도

영국 싱크탱크인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에 따르면 러시아군은 육군(28만)·해군(15만)·공군(16만5000)과 함께 전략미사일군(8만)·공수군(4만5000)까지 기본 5군 체제에 해상항공(3만1000)·해병대(3만5000)와 국경경비대 등을 합쳐 90만 병력을 유지한다. 핵무기부터 탄도미사일, 방공미사일, 전투기뿐만 아니라 다량의 전차·장갑차·자주포를 갖춘 강력한 기동군을 운용한다. 러시아 군사력은 미국이나 나토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러시아는 여기에 더해 가짜뉴스·선전전·외교전·소송전은 물론 선거개입 등 온갖 비밀공작으로 상대국을 타격하는 ‘하이브리드 전쟁’ 능력도 상당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벨라루스가 난민 밀어내기로 서방에 타격을 준 것도 배후에 러시아가 있다는 평가다. 우크라이나 사태도 푸틴의 심리전·선전전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노림수는 더 많아 보인다. 우크라이나와 서방을 몰아치면서 국제정치에서 러시아의 전략적 가치를 높이겠다는 의도도 엿보인다. 중국의 부상 등으로 러시아가 소외되는 데 대해 불만이 많았을 푸틴이 이번 기회에 자국이 보유한 모든 힘과 능력을 동원해 러시아를 새로운 슈퍼파워의 하나로 올려놓겠다는 것이다. 벌써부터 미국과 서방이 러시아를 힘겨워하는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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