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 대접’ 받은 노금석부터 ‘비운의 망명객’ 황장엽까지 
  • 이유준 북한전문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12.13 10:00
  • 호수 1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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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76년 동안 북한 탈출한 고위급 인사들의 면면
황장엽 이후 망명처가 미국 등 서방국가로 바뀌기도

분단 76년의 세월 동안 북한 체제를 탈출해 망명한 고위 인사의 면면에는 남북 분단의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체제가 치열하게 맞선 과거 냉전 시기 탈북·망명은 그 자체가 영웅적 결단일 수밖에 없었다. ‘귀순용사’라는 표현을 훌쩍 뛰어넘는 찬사와 환대를 받았고 많은 보로금과 주택, 승용차 등이 제공됐다.

본격적인 탈북은 6·25 전쟁 종전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는데, 가장 극적인 망명으로 많은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건 북한군 전투조종사 노금석 상위(우리의 중위와 대위 사이 계급)다. 노금석씨는 포성이 멎은 지 3개월도 되지 않은 1953년 9월21일 당시로선 최신예 기종이라 할 소련제 미그(MiG)-15 전투기를 몰고 왔다. 21세 나이의 노씨는 북한 체제에 반감을 가졌고, 막 공사를 마친 순안비행장의 첫 전투비행에서 이탈해 휴전선 통과 4분 만에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김포공항에 착륙했다.

ⓒ뉴스뱅크이미지
남한 귀순 직후 미국으로 건너간 지 16년 만에 1970년 6월14일 어머니와 함께 한 국을 찾은 노금석씨ⓒ뉴스뱅크이미지

노씨, 6·25 직후 최신형 미그기 몰고 귀순

사흘 동안 노씨를 신문한 주한 미 제5공군은 기자회견장으로 노씨를 안내했는데 그 자리에는 먼저 월남해 있던 노씨의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의 극적인 상봉은 당시 큰 화제가 됐다. 최신형 미그기는 정보 가치도 높아 당시로서는 천문학적 금액인 10만 달러의 보로금이 주어졌고, 노씨는 미국으로 건너가 정착했다. 노씨는 2015년 자유아시아방송(rfa)과의 인터뷰에서 “델라웨어대학에 들어가 처음부터 공부를 다시 했다”며 “졸업 후 듀폰(글로벌 화학기업)에서 일했다”고 말했다.

1967년 3월 발생한 이른바 ‘이수근 위장간첩 사건’은 오랜 기간 많은 사람에게 회자됐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사 부사장이던 이수근씨는 판문점 취재 도중 유엔군 대표인 밴 크러프트 장군의 세단에 올라 귀순했다. 영웅 대접을 받으며 반공강연 등에 나섰던 그는 1969년 1월 위조여권으로 홍콩으로 출국해 캄보디아로 향하다 기내에서 중앙정보부 요원에게 체포됐다.

이씨는 위장간첩으로 지목돼 1969년 사형을 당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7년 이씨가 중정에 의해 위장간첩으로 조작됐다고 밝혔다.

탈북 1호 박사로 알려진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이사장은 1979년 7월27일 자신이 소대장으로 근무하던 서부전선을 넘어 귀순했다. 남산 국립극장에서 대대적인 기자회견을 하고 말 그대로 ‘귀순용사’ 대접을 받았다. 당국의 보호 아래 조사를 받던 중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당하는 10·26사태가 터지면서 “하이고, 잘못 왔구나. 김일성이 곧 밀고 내려오겠네” 하는 불안감이 들기도 했다고 한다.

1983년 2월 미그-19기를 몰고 온 이웅평 북한군 대위의 망명 스토리는 지금도 방송 아이템으로 등장할 정도다. 개천비행장을 이륙한 이웅평씨는 편대를 이탈해 해주와 서해 상공을 지나 우리 공군기에 날개를 흔들어 귀순 의사를 밝힌 뒤 수원비행장에 착륙했다. 훤칠한 외모로 관심을 모은 그는 한국군 공군 소령으로 임관해 근무했으나 2002년 지병으로 숨졌다.

1987년 11월 대한항공 858기 폭파테러범으로 사형 판결을 받은 김현희씨는 사면된 후 망명을 선택했다. 테러 당시 김씨는 일본 국적의 하치야 마유미로 위장했고, 유창한 일본어를 구사했다. 조사 결과 납북 일본인 ‘이은혜’로부터 일본어를 배운 것으로 파악됐고, 북·일 사이에는 납치 일본인 문제로 큰 갈등이 빚어졌다. 김씨는 1997년 자신의 경호를 담당하던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출신 요원과 결혼해 화제를 모았고 현재는 은둔생활을 하고 있다.

1997년 4월 귀순한 뒤 약 80일간의 서울 생활을 마친 황장엽씨가 7월10일 안기 부청사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오른쪽은 같이 귀순한 김덕홍씨ⓒ연합뉴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에 북한 암살 시도 이어져

1997년 2월 터진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탈북과 망명은 한국뿐 아니라 국제사회에 큰 충격을 던졌다. ‘주체사상의 망명’으로 해석되면서 김정일 정권의 붕괴가 임박했다는 관측이 나올 정도였다. 김영삼 정부는 역대 최고위급 탈북 인사인 황 전 비서에게 최고의 예우와 강연·출판은 물론 북한 민주화운동 지원을 약속했다. 하지만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남북 정상회담 등 대북 유화정책을 추진하면서 황 전 비서는 부담거리가 됐고, 국정원 안가에서 퇴출당하는 등 분란이 일었다. 북한 당국의 암살 시도가 이어지는 가운데, 2010년 10월 자택에서 심장질환으로 사망했다. 망명 당시 품었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한국 정부의 대북 성향에 따라 표류할 수밖에 없었던 황 전 비서는 결국 ‘비운의 망명객’이 됐다.

황장엽 전 비서에 대한 한국 정부와 정보 당국의 홀대 논란이 번지면서 북한 고위층의 망명처가 미국이나 서방국가로 바뀌는 양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노동당 간부 출신 탈북자 이영호씨는 외신 인터뷰를 통해 북한의 독재와 인권 문제를 제기하면서 국정원과 갈등을 빚었고, 결국 미국으로 떠났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이모인 고용숙씨도 남편과 함께 탈북했는데, 최종 망명지로 미국을 택해 현재 뉴욕시에서 세탁소를 운영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평양 로열패밀리 출신으로 여러 정치적 부담 때문에 한국 망명을 선택하기 쉽지 않다는 점이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 공사는 2016년 7월 가족과 함께 런던을 떠나 한국으로 망명했다. 태 전 공사는 2015년 김정은 위원장의 친형 김정철이 에릭 크랩턴의 공연을 보기 위해 영국을 방문했을 때 안내를 맡을 정도로 북한의 내밀한 정보를 알고 있는 것으로 평가됐다. 하지만 국정원 산하 국가안보정책연구원에 근무하면서 대북 비판 성향의 외부활동 등으로 제약을 받았고, 결국 퇴직했다. 2020년 4월 총선에서 21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는데, 탈북자가 지역구(서울 강남갑) 의원으로 당선된 건 태영호가 처음이다.

의원처럼 신분이 공개된 고위 탈북 인사들은 경찰의 철저한 신변경호를 받는다. 북한의 위해 시도가 감지되거나 공개적인 위협이 이뤄지는 경우에는 더욱 강화된다. 하지만 이들보다 훨씬 더 고위급이거나 비중 있는 비공개 탈북 인사도 적지 않다는 게 정보 당국 관계자의 귀띔이다.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북한 최고위급 인사의 자제나 친인척들이 당국의 보호 아래 한국에 정착해 있다는 것이다. 국가안보정책연구원 연구진 가운데 이른바 ‘NK그룹’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대표적이다. 시사저널과의 인터뷰를 통해 베일을 벗은 김국성씨도 이 그룹에 있다가 퇴직한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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