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불사’ 낡은 신화 깨는 이재용·정의선의 도전 성공할까
  • 엄민우 시사저널e. 기자 (mw@sisajournal-e.com)
  • 승인 2021.12.22 10:00
  • 호수 16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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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격 인사로 순혈주의와 연공서열 타파 나서
전문가들 “탈(脫)제조업과 생존 위한 불가피한 선택”

성공적으로 기업문화 혁신을 이루고 있는 현대자동차에 이어 삼성전자의 새로운 인사제도 도입에 업계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크고 돈만 잘 버는 제조업체로는 더 이상 살아남기 힘들다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의 위기의식이 반영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정설처럼 여겨져온 ‘대마불사(大馬不死, 대기업은 망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쓰이는 용어)’를 믿지 않고 ‘큰 기업은 변화하기 어렵다’는 편견과 맞서고 있는 것이다.

지난 11월29일 삼성전자는 새로운 인사제도를 도입하겠다고 공언했다. 승진하기 위해 일정 시간을 채워야 했던 ‘표준체류연한제도’를 폐지해 나이와 무관하게 승진 기회를 제공하고, 호칭을 단순화하는 것이 골자다. 한마디로 기업문화를 수평적으로 만들고 연공서열을 폐지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12월 초 단행된 임원인사는 삼성전자의 이 같은 선언이 단순한 선언적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줬다. 30대 상무 4명, 40대 부사장 8명 등 젊은 임원을 승진시키고 전진배치했다.

ⓒ뉴시스

역대급 매출에도 삼성전자 주가수익률 저조

삼성전자의 이번 인사가 눈길을 끄는 이유는 제조업에 기반을 둔 위계질서와 연공서열이 확실한 조직이기 때문이다. 지난 2014년 33세의 인도 출신 천재 과학자 미스트리를 상무로 영입한 바 있지만, 내부 30대 직원 4명을 한 번에 상무로 승진시킨 것은 삼성전자 문화를 고려할 때 획기적 사건으로 여겨진다.

이 같은 인사 방향은 단순히 세대교체를 떠나 그룹 체질을 바꿔야 한다는 이재용 부회장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현재 시장의 변화와 삼성전자의 상황 등을 고려할 때 지금의 상태를 유지해선 안 된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최근 미국에서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버라이즌, 모더나 등의 최고경영자(CEO)를 연달아 만난 이 부회장은 귀국 직후 “냉혹한 현실을 보고 오니 마음이 무겁다”고 소회를 전한 바 있다.

이 부회장의 무거운 마음은 회사의 현재보다 미래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는 지난 3분기 역대 최고 매출에 역대 두 번째 많은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이처럼 돈은 잘 벌지만 미래가치를 평가하는 주가는 좀처럼 반등하지 못하고 있다. 이승우 유진투자증권 센터장은 “전 세계 시가총액 300조원이 넘는 회사 중 올해 주가수익률이 가장 저조한 곳이 알리바바와 텐센트, 그리고 삼성전자”라며 “‘관리의 삼성’을 벗어나는 변화가 필요한 시점인데, 이번 임원인사와 인사제도 개편은 현 체제로는 변화를 이끌어가기 어렵다는 판단하에 불가피하게 내린 결정으로 파악된다”고 분석했다.

이 부회장의 행보는 특유의 기업문화인 ‘패스트 팔로워(fast follower)’ 정책에서 벗어나야 살아남는다는 위기의식이 반영된 것이란 해석이 지배적이다. 선대 때 추구하던 효율적 생산을 추구하기 위한 수직적, 연공서열 문화는 제조업을 넘어 새로운 부문을 개척해야 하는 삼성전자에 장애가 됐다. 이와 더불어 하드워킹(hard working)만 강조하는 관료적 문화는 합리적 문화에 익숙한 MZ세대(1980~2000년대생)가 일하기에도 적합하지 않다. 이번에 삼성전자가 경계현 사장을 반도체 부문 총괄 자리에 앉힌 것도 이런 부분을 고려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경 사장은 직원들과도 합리적 소통을 하는 것으로 유명해 반도체 부문 직원들이 기대감을 갖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정의선 현대차 회장 역시 이런 부분들을 고려해 이미 이전부터 기업문화 혁신을 이뤄오고 있었다. 현대차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순혈주의’와 ‘엄격한 위계문화’ 등을 바꿔나갔다. 국내 대기업들이 도입하려다 번번이 실패하거나 반쪽짜리 성공을 거둔 복장 자율화도 가장 성공적으로 정착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과감한 외부 영입으로 조직에 새 바람

정 회장은 사실상 그룹의 지휘봉을 잡기 전부터 순혈주의 타파에 공을 들여왔다. 현대차그룹이 정몽구 회장 체제였던 지난 2006년 경쟁사 폭스바겐의 독일인 피터 슈라이어 사장을 기아차 디자인 최고책임자로 영입한 것도 정의선 당시 기아차 대표였다. 회사 내에선 당연히 내부 인사가 맡을 것으로 예상했던 자리였다고 한다. 슈라이어 사장은 오랜 기간 조직에 몸담으며 현대차와 기아차의 디자인을 지금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평을 듣는다.

정몽구 회장에서 정의선 회장 체제로 완전히 넘어간 이후 이 같은 흐름은 더욱 광범위한 부문에서 빠르게 이뤄지고 있다. 정 회장은 미국항공우주국(NASA) 본부장 출신인 신재원 사장, 삼성 출신 장재훈·지영조 사장 등 외부에서 온 이들에게 주요 사업을 맡겼다. 과거 현대차에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평가다.

또 현대차는 포티투닷 등 우수한 기술을 지닌 자율주행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고 필요하면 인수·합병(M&A)에 나섰다. 전기차 전환을 위해 경력직 끌어들이기에 공을 들이고 오랜 기간 유지해온 공채도 없앴다. 경력으로 현대차에 입사한 한 직원에 따르면 확실히 경력직 직원들의 전직 회사도 다양해지고 평가, 인사 등에서 경력직에 대한 차별도 거의 느낄 수 없다고 한다. 김필수 한국전기자동차협회장은 “차만 잘 만들어 팔면 됐던 시대와 달리 전기차 및 자율주행차 개발을 위해선 다양한 사람과 함께해야 하는 것이 필수”라며 “정의선 회장이 시대 변화를 읽고 과거 강조됐던 순혈주의를 버렸다는 부분은 국내 미래차 발전 측면에서 보면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이전에도 몇몇 대기업이 젊은 임원 발탁 등으로 화제를 모은 바 있지만 삼성전자와 현대차의 변화는 단순히 ‘보여주기식 세대교체’가 아닌 생존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차별화된다는 분석이다. 박주근 리더스인덱스 대표는 “기술 축적형 제조업체로서 글로벌 기업들을 따라가야 했던 과거 삼성전자와 현대차는 극도의 효율을 추구할 수밖에 없었고 이를 위해 공채 순혈주의, 연공서열이 생긴 것”이라며 “글로벌 1위로서의 전략을 펴야 하는 삼성전자와 모빌리티 솔루션 기업으로 변모하는 현대차가 기존 문화를 버리는 것은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분석했다.

한 현대차 인사는 “대마불사라는 말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시대”라며 “큰 기업일수록 더욱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기업 환경 속에서 모두 노력하고 있는 것”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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