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공포마저도 누른 《엔젤스 인 아메리카》
  • 조용신 뮤지컬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12.19 12:00
  • 호수 16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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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단에서 에이즈와 게이 등 민감한 주제 다뤄 눈길…코로나 팬데믹 중에도 전회·전석 매진 기록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의 일이다. 1981년 6월5일 미국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주간보고서에 희귀병 여러 개가 동시에 겹친 5건의 사례를 게재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면역력이 극도로 저하된 동성애자 남성 환자들이며, 미지의 바이러스 침투로 면역기능 저하가 의심된다는 점이었다. 몇 년 후 이것은 인간면역결핍 바이러스(HIV)로 밝혀졌고 이른바 1980년대 미국 사회를 강타한 공포의 에이즈 시대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에이즈는 초기에 ‘백인+성인+동성애자+남성’ 환자들의 공통 사례가 이목을 끌었는데 레이건 정부(1981~88)를 떠받드는 집단 중 하나인 보수 우파 기독교 세력은 에이즈가 미국 사회 내의 게이 공동체가 끼친 해악을 응징하는 신의 섭리라는 자의적이고 적대적인 해석을 내놓았다. 일반적으로 보수주의가 신봉하는 가족의 가치는 오로지 남녀의 결합만이 이룰 수 있다고 믿기에 같은 성별의 파트너 집단이 ‘공동체 개념을 해체’ 하려는 행위에 대한 당연한 형벌이라고 비난한 것이다.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 출연 배우들ⓒ국립극단 제공

에이즈 출현 초창기 혼돈스러운 시대상 반영

이들의 지지를 받으며 갓 출범한 공화당 정부에서도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하지만 이 바이러스가 최초로 아프리카에서 시작됐고 전파 범위도 유색인종과 이성애자까지 확장하자 비로소 전체 사회문제가 됐다. 치료제가 상용화되면서 통제 가능한 질병이 돼 관심사에서 점차 멀어진 1990년대 초반까지도 에이즈 위기는 지속됐다.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는 에이즈 시대 초창기 게이 커뮤니티에서 원인 모를 발병과 이로 인해 겪는 공동체의 불안감을 현실과 환상이 결합된 형식으로 고스란히 담은 특별한 명작이다. 유대인이자 커밍아웃 게이인 미국 작가 토니 커쉬너(Tony Kushner·1956년생)가 1988년부터 집필하기 시작해 1991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한 희곡으로 드라마 부문 퓰리처상과 토니상 최우수극본상 수상작이기도 하다. ‘미국의 천사들’이라는 제목에 ‘국가적 주제에 의한 게이 판타지아’(A Gay Fantasia on National Themes)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정치가, 유대인, 에이즈 환자, 남자 간호사 등이다. 이른바 천상계와 인간계가 뒤섞여 있고, 구원자(메시아)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하며, 불안한 시대임에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교류하며 동성애, 인종, 종교, 권력, 의료, 환경 이슈 등 당시 미국 사회가 가진 여러 위기 속에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논쟁하고 연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작가가 짜놓은 희곡의 기본 구조는 자신의 기반이기도 한 성경의 내용이며 작품 전반에 종교적 상징과 은유가 넘쳐난다. 그리고 개성 있는 인물들의 내면에 더해 이들의 새로운 만남과 대립이 갈등을 만들어내면서 서사의 동력을 얻는다. 유대교인 루이스와 모르몬교인 조셉, 공화당 보수정치인 로이 등 동성애자의 범주에 절대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인물들이 모두 동성애 캐릭터로 이 극을 이끈다. 유대인 청년 루이스는 동성 애인 프라이어가 에이즈에 걸려 입원하자 그를 떠나 같은 직장인 법원의 모르몬교도 서기관 조셉을 만나고 조셉은 어머니와 부인에게 커밍아웃을 한다. 조셉에게 호의를 베푸는 극우 변호사 로이 콘은 자신이 동성애이자 에이즈 환자라는 것을 숨기고 간암이라고 우긴다.

천사들로부터 예언자의 역할을 부여받은 사람은 여장 드랙을 즐겨 했던 에이즈 환자 프라이어이고, 그 친구는 남성 게이 간호사인 밸리즈다. 조셉의 부인이자 동성애자 남편을 둔 부인 하퍼는 환각에 빠진 약물중독자로 그려지는데 이 또한 에이즈 시대 남성 게이 중심의 동성애자 가정에서 소외받은 여성에 대한 상징적인 캐릭터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에이즈 발발 40주년, 초연 30주년이 된 현시점에 이 작품이 다섯 명의 남성 게이 이외에 제대로 된 레즈비언 혹은 연대하는 여성의 캐릭터를 독립시키지 않고 조력자나 희생자 그리고 천사 이미지에 합산해 처리한 점에 대해서는 그 시대의 한계라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 연극 무대에서 종종 공연됐지만, 폭발적으로 대중화된 계기는 2003년 미국 HBO 채널에서 드라마 영화로 방영된 시점이었다. 《졸업》 《버드케이지》 《클로저》 등 무대와 영화 버전으로 모두 소개된 작품들로 유명한 마이크 니콜스 감독의 연출로 알 파치노, 메릴 스트립, 엠마 톰슨 등 당대 최고의 배우들이 열연했고 토니 커쉬너가 직접 각색을 맡아 골든글로브상과 에미상을 휩쓸었다.

이 작품은 러닝타임만 8시간이 넘다 보니 드물게 두 번으로 나누어 공연하는 작품으로 유명하다. 각각의 파트도 네 시간이 넘는다. 첫 번째는 ‘밀레니엄 접근’(Millennium Approaches)이며 두 번째는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재건)다. 이 중 첫 번째가 현재 국립극단 제작으로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 중이다. 두 번째는 내년 2월 시즌에 초연 예정이다. 1980년대 미국의 게이와 에이즈 환자의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다룬 이 명작이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동성애 문화에 적대적인 보수 기독교 세력이 존재하는 한국에 제대로 소개되는 것부터가 놀랍고도 다행스러운 일인데, 특히 공공기관인 국립극단에서 안정적인 프로덕션으로 제작했다는 점이 그 놀라움을 배가시킨다. 그것도 전파력이 강한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불안감과 고통을 전 세계적으로 느끼고 있는 팬데믹 시대에 기획하고 준비하고 무대에 올렸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엔젤스 인 아메리카》의 한 장면ⓒ국립극단 제공
《엔젤스 인 아메리카》의 한 장면ⓒ국립극단 제공

정경호라는 걸출한 스타도 발굴

이 작품은 실력 있는 국립극단 단원들을 비롯해 박지일, 전국향 등 베테랑 연극배우들로 채워져 있다. 특히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등 매체에서만 활동하다 연극 무대에 처음 데뷔한 정경호 배우의 열연이 돋보였다. 죽어가는 에이즈 환자이자 게이 연인에게 실연까지 당하는 비참하고도 불행한 역할이지만 아름다운 외모와 천사들이 선택한 예언자로서의 소명 의식을 가진 특별한 캐릭터로서의 프라이어를 잘 소화해 냈다. 매체 연기와는 다르게 연극 무대에 필요한 연기와 발성을 습득하고 이를 캐릭터와 일체화해 연기 범위를 무대까지 확장시키는 좋은 사례를 보여줬다.

무엇보다 《엔젤스 인 아메리카》는 올해 국립극단의 여정을 마무리하는 연말 작품이자 최고의 기대작이었기에 티켓 오픈과 함께 전회·전석 매진을 기록했다. 극장에서는 거리 두기 좌석제로 띄어앉기를 하다가 위드 코로나 정책으로 방역패스 제도가 시행되면서 전 좌석 관람으로 바뀌어 팬데믹 시대 들어 드물게 연극 무대에서 극장을 가득 메우는 공연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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