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로에서] ‘남들 하는 거 말고’
  • 김재태 편집위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12.20 08:00
  • 호수 16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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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살다 이제는 ‘AI(인공지능) 선거’까지 보게 된다. 얼굴이며 몸집, 목소리까지 완전히 똑같다. 누가 보아도 영락없이 그 모습 그대로다. 인공지능 기술이 결국 선거판에까지 파고들었다. 국민의힘 대선 캠프는 ‘AI 윤석열’이 등장하는 영상 유세를 선보였고, 민주당은 AI 기술을 활용해 후보의 공약 등 궁금한 점을 물으면 바로 답을 해주는 서비스 ‘이재명 챗봇’(대화 로봇)을 내놓아 화제를 모았다. ‘제3지대’ 김동연 후보도 이른바 ‘AI 대변인’과 자신의 아바타를 만들어 공개했다.

메타버스에 올라탄 이 시대에 선거용 AI의 출현이 새삼스러울 일도 아니고, 자칫 딱딱해질 수 있는 선거판에 새로운 재미와 활력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반갑기는 하지만, 부작용이라는 걸림돌이 만만치 않다. AI 후보 탄생을 도운 ‘딥페이크(Deepfake)’ 기술을 둘러싼 논란들이 이미 곳곳에서 불거져 있는 데다, 이미지를 조작해 단점은 없애고 장점만 극대화한 ‘인공 후보’가 유권자들의 판단과 선택을 왜곡시킬 수 있다는 비판도 적지 않은 상황이다. 하지만 이런 정치 윤리 문제를 떠나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람 냄새’다. 선거는 모름지기 사람의 향기가 나야 제격이다. 잘 꾸며진 AI 후보가 아무리 용을 써도 버퍼링 없이 바로바로 소통할 수 있는 진짜 사람을 이기긴 어렵다.

(왼쪽)11월27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순천 연향상가 패션거리에서 유세를 하고 있다. (오른쪽)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10월23일 울산시 남구 신정시장을 방문해 지지자들에게 화답하고 있다.ⓒ이재명 캠프 제공·연합뉴스
(왼쪽)11월27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순천 연향상가 패션거리에서 유세를 하고 있다. (오른쪽)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10월23일 울산시 남구 신정시장을 방문해 지지자들에게 화답하고 있다.ⓒ이재명 캠프 제공·연합뉴스

그래서 후보들은 오늘도 사람 냄새를 만나기 위해 시장으로, 시장으로 달려간다. 시장만큼 단시간에 많은 사람을 접할 수 있고 세상 이야기가 대량으로 유통되는 곳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AI 출연이든 시장 나들이든 좀 더 많은 대중과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나름 괜찮은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접근 방식이 고루하다. 전개되는 동선(動線)이나 내용이 누구나 예측 가능할 만큼 빤하다. 인지도를 더 올리려는 계산에서라면 모르겠으나, 이미 이름과 얼굴이 알려질 대로 알려진 후보들이 택할 방법으로는 진부하기 그지없다. 게다가 시장에서 벌이는 ‘먹방’에는 별다른 감흥도 감동도 없다. 오히려 사진이나 영상 찍기에만 열중한다고 눈총 받는 사례만 허다할 뿐이다. 이미 수십 년 전부터 보아온 시장 나들이 풍경에 식상한 유권자의 허전함은 또 어찌할 것인가.

미국 골든글로브 작품상 후보에까지 오른 《오징어 게임》을 비롯해 올해 여러 K드라마가 큰 인기를 얻었는데 지난 11월에도 주목할 만한 드라마 하나가 OTT를 통해 대중에게 공개됐다. 한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어쩌다 장관이 되어 제목 그대로 정치의 큰 무대를 향해 나아간다는 내용을 담은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라는 작품이다. 이 드라마는 정치를 다루지만 여타 빤한 정치 드라마와는 결이 많이 다르다. 전해진 바에 따르면 이 작품을 연출한 감독은 기획 단계에서 ‘정치’ ‘블랙코미디’라는 장르와 ‘남들 하는 거 말고’라는 콘셉트 말고는 아무것도 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고, 코미디보다 더 코미디 같다는 말을 허구한 날 듣는 정치의 현실을 제대로 담아낼 수 없어서다.

선거도 마찬가지다. 빤한 접근, 빤한 전개로는 유권자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 늘 하던 대로 아무 특별함 없이 시장을 맴돌다가는 사람 냄새도 민심도 다 놓칠 수 있다. 빤한 동선이나 내용이 아닌, ‘남들 하는 거 말고’가 더 많이 필요한 것이 21세기 선거운동이다. 민심은 이미 후보들의 머리 위에 올라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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