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이방원》, 정통 사극의 존재 이유
  • 정덕현 문화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01.08 16:00
  • 호수 16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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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KBS 대하드라마, 공영성과 상업성 사이

KBS 대하드라마가 《태종 이방원》으로 돌아왔다. 최근 사극들이 역사를 벗어나 상상력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일련의 흐름이 만들어낸 데 대한 반작용이다. 과연 KBS 대하드라마는 《태종 이방원》을 기점으로 앞으로도 계속 그 명맥을 이어갈 수 있을까. 

KBS 대하드라마는 지난 2016년 《장영실》을 끝으로 멈춰 섰다. KBS 대하드라마가 《태종 이방원》으로 돌아오기까지 5년이라는 시간이 소요된 데는 그만한 고민이 깔려 있다. 다른 드라마에 비해 제작비가 많이 들지만 과거에 비해 시청률은 거의 반 토막이 났던 게 당시 KBS 대하드라마가 마주한 현실이었다. 《징비록》(2015)이 최고시청률 13.8%(닐슨코리아)에 머물렀고, 《장영실》(2016) 역시 최고시청률이 14.1%였다. 과거 《태조 왕건》(2000)이 무려 60.2%라는 역대급 최고시청률을 냈던 것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질 상황이었다.  

물론 정통사극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의 상상력을 더한 것이 KBS 대하드라마였지만, 2000년대 초반부터 《허준》(1999), 《대장금》(2003), 《주몽》(2006) 같은 다양한 퓨전사극이 좀 더 과감한 상상력을 더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정통사극은 조금씩 힘이 빠졌던 게 사실이다. 역사가 스포일러일 수밖에 없는 것이 사극이다. 상상력이 아닌 충실한 고증에 더 힘을 실은 정통사극은 퓨전사극에 비해 극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불멸의 이순신》(2004)과 《대조영》(2006) 같은 작품들이 KBS 대하드라마의 체면을 세웠지만 2010년대 들어와 제작된 작품들은 현저한 추락을 겪었다. 

ⓒKBS1 제공
ⓒKBS1 제공

때론 ‘역사적 사실’이 낯설 때도 있다 

결국 KBS 대하드라마도 퓨전사극의 트렌드를 따라가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주몽》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사료가 충분하지 않은 삼국시대를 끌어와 더 많은 상상력을 더한 대하드라마들이 제작됐다. 《근초고왕》 《광개토태왕》 《대왕의 꿈》 같은 작품들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런 시도들이 생각만큼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면서 KBS 대하드라마는 역시 그 본분인 정통사극의 길을 가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정도전》(2014)은 그래서 정통사극으로서 좋은 반응을 얻었지만 후속작들이 힘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마침 새로운 미디어 환경 변화 속에서 지상파 모두가 재정적자를 겪게 되면서 대하드라마는 결국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KBS 대하드라마를 다시 부활시킨 건, 최근 사극이 퓨전화를 넘어 판타지화의 단계까지 들어간 변화 덕분이다. 역사는 그저 시공간의 배경 정도로 기능하고, 그 위에 멜로와 액션을 채우는 사극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희석된 역사를 다시 세울 정통사극에 대한 요구가 커졌다. 작년 초 《조선구마사》 사태는 상징적이었다. 시대를 빌려 쓰는 사극이라면 그 시대에 가져야 할 책임의식이 따른다는 걸 이 사태는 보여줬고, 그래서 진짜 역사적 사료에 충실한 KBS 대하드라마 《태종 이방원》의 등장은 시청자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부활한 KBS 대하드라마가 그 많은 역사적 인물 중 하필 태종 이방원을 선택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간 KBS 대하드라마가 좋은 성적을 냈던 작품들의 시기가 대부분 여말선초를 소재로 하고 있어서다. 《용의 눈물》이나 《정도전》 같은 작품이 단적인 예다. 그리고 이것은 사극 전체를 두고 봐도 그렇다. 고려 말 조선 건국 이야기는 SBS 《육룡이 나르샤》, JTBC 《나의 나라》 등으로 만들어져 화제가 된 바 있다. 특히 여말선초의 개국 이야기는 대선 같은 정치적 이슈가 떠오르는 시기에는 더더욱 힘을 발휘한다. 현재의 대중이 원하는 저마다의 리더십을 당대 인물들에 투영해 드라마를 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역사적 사실에 충실한 정통사극이라면, 그 역사 자체가 드라마틱해야 시청자들의 시선을 잡아끌 수 있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고려를 지키려는 정몽주와 조선을 세우려는 이방원의 갈등과 그로 인해 결국 살해되는 정몽주의 이야기, 그리고 형제의 난을 일으켜 가족들마저 도륙한 후 왕위에 오르는 이방원과 그 후대인 세종으로 이어지는 태평성대. 우리네 역사 속에서 이만큼 드라마틱한 순간들이 없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 시기를 다룬 사극이 너무 많이 나왔다는 건 또한 약점이 아닐 수 없다. 역사를 따로 공부하지 않은 이들이라도 그 많은 사극을 통해 어느 정도 당대 이야기들을 이미 다 꿰고 있어서다. 그러니 새로울 게 없어 보이는 《태종 이방원》의 이야기를 굳이 왜 시청자들이 찾아볼까. 10% 전후를 오르락내리락하는 시청률이 이를 잘 말해 준다. 

그렇지만 《태종 이방원》은 일정한 고정 시청층을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는 맛이 더 무섭다고 했던가. 이미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라도 드라마로 어떻게 재연되는가에 따라 또 다른 재미를 줄 수 있다는 걸 《태종 이방원》은 보여주고 있다. 또한 퓨전사극이 재해석한 역사와 이 드라마가 고증을 통해 재연한 실제 역사 사이의 간극은 심지어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역사적 사실 또한 낯설게 느껴지는 면이 있다. 예를 들어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명으로 철퇴에 맞아 죽은 정몽주의 이야기는, 《태종 이방원》에서는 더 잔인하게 묘사된다.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백성들이 다 보는 저잣거리에서 대낮에 의도적으로 살해되고, 모두가 볼 수 있게 효수된 장면이 고스란히 그려진다. 태종 이방원을 다루지만, 극적으로 미화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잔인함과 그러면서도 인간적인 고뇌를 모두 담으려 한 균형 잡힌 노력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KBS1 제공
KBS1 드라마 《태종 이방원》의 한 장면ⓒKBS1 제공

대중성 잣대에 휘둘리지 않는 역사 드라마 필요 

모든 드라마가 시청률 같은 대중성과 상업성의 지표로 재단되고 평가되지만, 그럼에도 그 잣대에서 벗어난 공영성으로 추구돼야 할 콘텐츠도 분명 존재한다. KBS 대하드라마가 그렇다. 사극들이 저마다 역사의 갑옷을 벗어버리고 상상의 나래를 펼쳐 나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콘텐츠의 흐름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이 아니라면 똑같은 역사만을 재연하는 드라마들이 무한 반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국내만이 아닌 글로벌한 위상을 갖기 시작한 K드라마에서 사극이라는 독특한 로컬 색깔을 가진 장르는 더 많은 가능성을 내포한 콘텐츠로서 상상력의 틈입을 허용하는 게 맞는 방향이다. 물론 그것이 지나쳐 중대한 역사 왜곡으로 나아가지는 않아야 하겠지만. 

따라서 사극에 상상력을 허용하는 만큼, 진짜 역사적 사실에 충실한 역사 드라마는 더더욱 필요해진다. KBS 대하드라마는 그런 의미에서 다른 사극들의 조류를 따라가기보다는 좀 더 보수적인 차원에서 고증에 충실한 역사 드라마를 지향해야 한다. 대중성이나 상업성을 따라가기보다는 충실하게 진짜 역사를 알린다는 공영성에 무게중심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시청률에 의해 제작이 좌지우지 않고 상시적으로 공영성을 추구하는 역사 드라마가 되려면, 일단 제작에서도 상업성을 추구하는 과한 투자나 연출은 피하는 편이 현명하다. 시청자들이 KBS 대하드라마에 요구하는 건 엄청난 제작비를 투입해 시청률을 목표로 삼는 블록버스터 사극이 아니다. 다소 작은 규모라도 진짜 역사를 드라마라는 장치를 통해 제대로 알려줄 수 있는 사극이다. 《태종 이방원》으로 다시 열린 KBS 대하드라마가 그 길을 계속 이어갈 수 있을지 여부는 바로 이 지점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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