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희 7시간 통화, ‘제2 최순실 사태’ 되지 않은 이유
  • 박성의 기자 (sos@sisajournal.com)
  • 승인 2022.01.21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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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 외 핵심증거나 정황 없자 MBC 후속보도 보류
유동규 등장한 李 녹취에 與도 ‘녹취 정국’ 키우기 부담

지난 한 주 여의도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의 아내 김건희씨가 서울의소리 기자와 통화한 7시간 분량의 통화 녹음본이 공개되면서다. 여야는 파장에 주목했다. 여권에서는 김씨가 ‘제2 최순실(개명 후 최서원)’이라며 강도 높게 비난했다. 야권에서도 행여 김씨 녹취가 국민들의 국정농단 트라우마를 꺼낼까 노심초사했다.

그러나 대선판을 흔들 것 같던 녹음본은 ‘찻잔 속 태풍’에 그치는 모양새다. 녹음본을 1차 공개했던 MBC가 2차 방송을 돌연 취소하고, 여권 역시 추가적인 논평은 삼간 채 대선 이슈를 토론으로 이동시키는 모양새다. 왜 김씨의 통화 녹취는 대선판을 흔드는 뇌관이 되지 못했을까.

16일 오후 서울 상암동 MBC 사옥에 걸린 전광판에서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의 배우자 김건희씨의 '7시간 전화 통화' 내용을 다루는 MBC 프로그램 《스트레이트》가 방영되고 있다. ⓒ연합뉴스
16일 오후 서울 상암동 MBC 사옥에 걸린 전광판에서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의 배우자 김건희씨의 '7시간 전화 통화' 내용을 다루는 MBC 프로그램 《스트레이트》가 방영되고 있다. ⓒ연합뉴스

‘증거‧영상‧등장인물’이 없었다

7시간 통화 녹취와 박근혜 정부 시절 국정농단 사태에는 공통점이 있다. 두 사건 모두 방송이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특히 그간 감춰졌던 ‘실세의 목소리’를 직접 내보냈다는 점에서 대중의 이목이 쏠렸다. 다만 ‘스케일’이 달랐다. 김씨 녹취의 경우 기자와 1:1로 통화한 내용이 전부인 반면, 국정농단 사태에 경우 구체적인 비위 정황과 이에 동조한 권력가의 실명이 같이 담겼다.

최순실·박근혜 국정농단 국면의 시작은 2016년 7월26일 TV조선 리포트였다. TV조선은 “미르재단이 설립 두 달 만에 대기업에서 500억원 가까운 돈을 모았는데, 안종범 대통령 정책조정수석비서관이 설립 모금과정에 깊숙이 개입한 정황이 드러났다”고 보도했다. TV조선은 다음날인 7월27일 “안 수석 말고도 미르재단에 영향력을 행사한 막후 실력자가 있었다”며 CF감독 차은택을 거론했다.

구체적인 정황은 의심을 낳았고 다른 언론사의 취재를 불렀다. 한겨레는 두 달 뒤인 9월20일 “박근혜 대통령의 비선 실세인 최순실씨가 K스포츠재단 설립과 운영에 깊숙이 개입한 정황이 드러났다”고 단독 보도했다. 최순실이라는 이름이 박근혜 정부 비선실세 의혹 전면에 등장한 순간이었다.

10월24일은 국정농단 국면의 하이라이트였다. 이날 JTBC는 최씨가 사용한 태블릿PC에 담긴 국정농단 증거를 공개했다. JTBC는 “박근혜 정부의 국정철학이 가장 잘 녹아있다고 평가받는 2014년 3월 독일 드레스덴 연설문을 최순실씨가 하루 전에 받아본 것으로 확인됐다”고 보도했다. 비선실세를 향한 심증은 물증이 나타나며 확신으로 바뀌었다. 여론이 급격히 나빠진 10월25일, 박 전 대통령은 대국민사과를 발표하며 일부 의혹을 인정했다.

국정농단 사태는 각 언론사가 취재팀을 꾸리고, 장기간에 걸쳐 확보한 증거 영상을 같이 보도하며 발화력이 커졌다. 반면 김씨의 녹취는 서울의소리 기자 1인이 김씨와 개인적인 연을 맺은 뒤 통화한 음성이 전부였다. 결국 해당 음성을 최초 보도했던 MBC 시사 프로그램 《스트레이트》는 후속 보도를 취소했다. 추가적인 취재를 거쳐 관련 내용을 다루겠다는 설명이다.

진보 성향의 류근 시인은 16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소문난 잔치 불러놓고 결국 김건희 실드(방어)”를 했다며 “누이도 매부도 면피에 성공했다”고 꼬집었다. 이어 “김건희 악재를 호재로 바꿔주는 이적행위를 시전(펼쳐 보임)했다. MBC가 000(뻘짓)을 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맞불 ‘李 욕설 녹취’에 민주당은 딜레마

이에 민주당이 딜레마를 안게 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녹취 공개 후 김씨의 ‘팬덤’이 커지는 기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포털사이트 네이버에 개설된 ‘김건희 여사 팬카페(건사랑)’의 회원 수는 21일 오후 2시 기준 4만5000명을 넘어섰다. 지난해 12월19일 개설된 해당 카페의 회원 수는 지난 15일까지 200여 명에 불과했지만 녹취록이 보도된 이후 신규 가입자가 폭증했다.

박상병 인하대 정책대학원 교수는 “김건희 팬덤 현상은 김건희 리스크를 우려했던 야권 지지층이 다시금 모이기 시작한 것”이라고 말했다. 녹취록의 파장이 생각보다 크지 않자, 되레 국민의힘의 ‘집토끼’가 결집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야권은 ‘녹취 맞불’로 국면 전환을 노리고 있다. 지난 18일 장영하 변호사는 대장동 사건 핵심인물인 유동규씨의 이름이 등장하는 ‘이재명 욕설 파일’을 공개했다. 녹취에는 이 후보의 형인 이재선씨가 유씨가 이 후보의 ‘핵심 측근’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대목이 있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시사저널과 만나 “녹취 내용만 보면 김씨 관련 녹취는 논란에 대한 해명에 가깝다”며 “반면 이 후보 녹취에는 유동규씨 이름이 등장하고 욕설 과정에서 부인인 김혜경씨의 웃음소리도 담긴다. 유권자들을 더 크게 실망시킬 수 있는 부분”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기본적으로 이 같은 녹취를 여야 정당이 먼저 나서서 공개하고 공격하는 행태에 반대한다. 다만 김씨 녹취가 후보 검증을 위한 정당한 절차라고 주장할 것이라면, 이 후보 욕설 녹취도 같은 기준으로 다뤄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반면 김씨의 녹취록은 반드시 공개됐어야 한다는 반론도 있다. 민주당 한 초선의원은 “후보의 배우자가 정치에 대한 관심을 넘어 개입하려 했다는 의심을 충분히 살 수 있는 내용이 (녹취에) 담긴 것”이라며 “사생활이라고 야권이 반론한다면 반대로 이 후보의 개인사야말로 가슴 아픈 가족사다. 어느 것이 더 심각한 사안인지는 국민이 현명히 판단할 문제”라고 강조했다.

민주당 선거대책위원회는 20일 “형과 형수는 수많은 통화를 모두 녹음한 후 이중 극히 일부를 갖고 이 후보가 형수에게 폭언한 것으로 조작 왜곡해 유포했다”며 “이미 법원은 해당 음성파일의 유포를 금지한 바 있다. 후보자의 공직 수행과 무관한 사생활 영역의 대화내용 공개는 인격권 침해라는 것이 가처분 및 손해배상 판결문의 핵심 요지”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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