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 전쟁 속 ‘추운 겨울’, 에너지 대란 앞에 뭉치는 유럽 
  • 이동진 프랑스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03.09 07:30
  • 호수 1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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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천연가스 의존도 40%인 유럽, 의존도 낮추고 ‘대러 제재’ 반격 감행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양상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기대대로 흘러가지 못하는 모습이다. 러시아군의 전격전(블리츠크리그·blitzkrieg) 전술이 우크라이나인들의 불굴의 저항으로 속도를 못 내고 있다. 이런 가운데 2014년 우크라이나 유로마이단 혁명의 염원이었던 유럽연합(EU) 가입 신청이 3월1일 전례 없는 지지 속에 제출됐다. EU 또한 역사상 처음으로 실질적 위협에 맞서 하나의 안보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EU는 6100억원가량의 의료물자와 무기 및 군사물품을 우크라이나에 지원할 예정이다. EU집행위원장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은 “역사상 처음으로 EU가 전쟁 중인 다른 국가를 위해 무기를 구매하는 것”이라며 우크라이나를 향한 EU의 확고한 지지를 나타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선 전쟁의 장기화 가능성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특히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유럽의 에너지 위기가 심화될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EPA 연합
EU 회원국 에너지 장관들이 2월28일 벨기에 브뤼셀에 모여 우크라이나 사태 관련 대화를 나누고 있다.ⓒEPA 연합

푸틴, 에너지 자원을 정치적 압박 수단으로 활용

유럽은 최근 높아진 에너지 가격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원인은 복합적이다. 코로나19 이후 침체됐던 내수 경제가 회복되면서 전력 수요가 큰 폭으로 증가했지만, 유럽 자체의 전력 생산능력은 수요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추세다. 프랑스·독일 등은 탈원전 정책을 펴면서 풍력발전에 대대적 투자를 했지만, 지난해 말 북해 지역 풍속 저하로 대규모 해상풍력단지가 가동을 멈추는 등 악재가 겹쳤다.

이런 와중에 터진 우크라이나 사태는 에너지 대란을 더욱 심화시키는 원인이 됐다. 유럽은 천연가스의 대외 의존도가 상당히 높다. 2000년대부터 EU는 에너지 시장에 자유경제 시스템을 도입했다. 그 결과 전력 가격을 공급자가 결정하는 구조다. 당초 유럽은 전력 생산비가 가장 높고 운영비가 저렴한 석탄화력발전소로 전력을 생산했지만, 이는 탄소 배출권 가격을 높이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국 전력회사들은 석탄 대신 천연가스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구조 속에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유럽의 천연가스 공급 부족 우려를 키우고 있는 것이다. 유럽은 천연가스 상당량을 러시아에서 가져온다. 러시아 최대 국영 에너지회사 가스프롬(Gazprom)은 유럽 국가들이 역외에서 수입하는 천연가스의 대략 46%를 공급하고 있다. 수천km의 가스프롬 송유관들이 러시아를 출발해 벨라루스 혹은 우크라이나를 거쳐 동유럽 및 서유럽까지 뻗어있다.

푸틴 대통령은 에너지 자원을 유럽 국가들에 대한 정치적 압박 수단으로 활용해 왔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푸틴은 부인했지만, 지난해 말부터 러시아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가스 공급량이 감소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전쟁으로 인해 푸틴이 가스관 밸브를 아예 잠글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는 가운데 천연가스 가격이 급등하면서 유럽 산업계가 큰 타격을 입고 있다. 많은 전력을 필요로 하는 금속 제련소들은 벌써 생산량 감축에 들어갔다. 유럽에서 가장 큰 프랑스의 덩케르크 알루미늄 제련소는 최근 생산량을 15% 줄였다. 유럽 최대 아연 제련업체인 니르스타도 프랑스 북부에 위치한 대규모 아연 제련공장 가동을 중단했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현재 유럽의 가스 가격은 800% 이상 뛰었고 전력비용은 500% 급등하고 있다. 에너지 대란으로 인해 유럽인들은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다. 프랑스 정부는 이번 겨울을 견뎌내기 위해 가스와 전력요금 인상률을 동결했다. 다른 유럽 국가들은 부족한 전력을 메우기 위해 비환경적인 석탄발전소까지 재가동하고 있는 실정이다. 전문가들은 전쟁이 지속될 경우 공장 폐쇄 등으로 유럽의 에너지 대란은 더욱 커질 것이라고 전망한다.

어느 때보다 추운 겨울이지만 유럽 국가들은 오히려 러시아에 대해 강경한 대응을 하고 있다. 서유럽 국가 중 러시아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가장 높은 독일은 약 13조원 규모인 러시아와 독일 사이 직통 송유관 노르트스트림2(Nord Stream2) 사업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독일의 행보는 에너지 안보 차원에서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또한 유럽이 하나로 뭉쳐 에너지 위기에 대한 해결책과 대(對)러시아 전략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이 희망적이다.

 

EU,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우크라이나에 전력 공급하기로

2월28일 벨기에 브뤼셀엔 EU 회원국 에너지 장관들이 모였다. 이 자리에선 유럽의 에너지 대란 및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폭넓은 협의 및 합의가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카드리 심슨 에너지 정책담당 EU 집행위원은 회의 뒤 “현재 EU 가스 비축률과 액화천연가스(LNG) 수입 증가로 이번 겨울은 날 수 있다”면서도 “하지만 다가오는 겨울이 가장 큰 도전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 자리에 모인 국가들은 에너지 대란 극복을 위해 추후 러시아에 대한 에너지 공급 의존도를 낮추고 수입 다원화 등을 위해 노력하기로 뜻을 모았다. 특히 유럽의 부족한 전력 상황에도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기 위해 EU 전력 시스템을 우크라이나 배전망에 긴급히 연결하는 데 합의했다. 또한 대러시아 제재에도 박차를 가하기로 했다. 2월25일 EU 외무부 장관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에너지 제재 등 러시아에 대한 각종 제재가 채택된 바 있다.

EU는 에너지 안보를 위해 미국과도 긴밀히 협력 중이다. 2월7일 호세프 보렐 외교안보정책 고위대표와 카드리 심슨 에너지 정책담당 EU 집행위원이 워싱턴DC를 방문해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과 면담을 가지며 유럽의 에너지 안보 문제를 의논하기도 했다. 미국은 유럽을 향해 활발하게 에너지 외교를 펼치고 있다. 1월31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직접 카타르 왕세자에게 잉여분 LNG를 유럽에 수출하라고 무언의 압박을 가하기도 했다. 일본도 2월 미국의 요청으로 일본 내수용 LNG를 실은 선박 여러 대를 유럽으로 보냈다. 미국 또한 국내에 반대 의견이 적지 않음에도 많은 양의 LNG를 유럽에 수출 중이다. 유럽이 역외로부터 수입하는 LNG의 40%를 미국 셰일가스가 차지하고 있다.

한편 이러한 흐름 속에 유럽에선 원전 재가동 움직임도 눈에 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2월10일 프랑스 동부 벨포르에서 2017년 취임 당시 원자력 의존도를 낮추겠다던 공약을 뒤엎고 앞으로 2050년까지 새로운 원자력발전소 14기를 추가 건설함과 동시에 기존 원자로도 폐기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탈원전 정책 막바지에 다다른 독일에서도 현재 에너지 대란을 극복하기 위해 탈원전을 연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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