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 돌아 이제야 ‘야구인 총재’ 등판…허구연, KBO 24대 총재로 추대돼
  • 김양희 한겨레신문 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03.21 11:00
  • 호수 16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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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만 총재’에서 ‘일하는 총재’로 기대치 높여

한국프로야구 출범 40년 만에 경기인 출신 KBO 총재 시대가 열릴 것으로 보인다. 허구연 MBC 야구해설위원은 3월11일 KBO 이사회에서 10개 구단 대표와 사무국으로부터 24대 총재로 추천됐다. 25일 열리는 구단주 총회에서 최종 확정되지만 이사회 결과가 뒤집힌 사례는 거의 없었다.

‘야구해설위원’ 직함을 오랫동안 갖고 있었으나 허구연 총재 후보는 프로야구 최연소 감독 기록을 갖고 있다. 상업은행·한일은행 등에서 내야수로 선수생활을 하다가 은퇴 뒤 방송 해설위원으로 프로야구와 연을 맺었고, 1985년 10월 만 34세에 청보 핀토스(키움 히어로즈의 전신) 감독으로 선임됐다. 하지만 이듬해 8월 팀 성적 부진(15승40패2무)으로 경질돼 재임기간은 짧았다. 롯데 자이언츠 코치, 미국프로야구 토론토 블루제이스 마이너리그 유급 코치 등을 거쳐 방송 해설위원으로 복귀해 지금껏 마이크 앞에 있었다.

행정 경험도 물론 있다. 대한야구협회 이사를 역임하고 KBO 규칙위원장, 기술위원회 부위원장, 야구발전위원장, KBO 총재 고문 등을 지냈다. 그러나 KBO 총재 후보로 추천된 것은 그 자신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도 그럴 것이 KBO 역대 총재들의 면면을 보면 수긍이 간다.

ⓒnew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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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 등에 업고 낙하산 총재들이 줄줄이 자리 차지

1982년 군사정권 영향 아래 태동한 KBO리그에는 그동안 14명의 총재가 있었다. 서종철 초대 총재(~2대)는 군인 출신으로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육사 시절 교관이었다. 이후 현직 국회의원이었던 이웅희(3~4대), 국방부 장관 출신 이상훈 총재(5대)가 계보를 이어갔다. 이후에도 교통부 장관 출신 오명(6대), 국방부 장관 출신 권영해(7대), 법무부 장관 출신 김기춘(8대), 재경원 장관 출신 홍재형(9~10대), 5선 국회의원 정대철 총재(11대)가 한국 야구를 이끌었다. 당시 정권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면서 야구에 관심이 많은 정치인이 KBO 총재로 추대됐다.

낙하산 정치인들이 점유했던 KBO 총재 계보는 1998년부터 달라졌다. 각 구단주가 돌아가면서 KBO 총재를 맡기로 합의한 것이다. 첫 기업인 총재가 박용오 전 두산그룹 회장이었다. 두산그룹 자체가 프로야구 출범 당시부터 팀 창단에 아주 적극적일 정도로 야구 사랑이 컸다. 박 총재는 1998년 9월부터 2005년 11월까지 재임했으며 두산그룹 경영권 분쟁과 맞물려 사임했다. 당시 일각에서는 정치권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이후 다시 구단주가 아닌 정치인 출신 총재 시대로 회귀한 탓이다. 국회부의장을 지낸 신상우 총재는 현대 유니콘스 (키움 히어로즈의 전신) 매각 과정에서 여러 입길에 오른 뒤 역시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물러났다.

신 총재에 이어 명지학원 전 이사장인 유영구 총재가 경제인으로 바통을 이어받았고, 이후 희성그룹 회장이던 구본능 총재가 맡았다. 야구 사랑이 지대했던 구 총재는 적극적인 KBO 사무국 쇄신으로 리그 수익 증대와 800만 관중 시대를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구 총재 이후 국무총리 출신 정운찬 총재가 수장 자리에 올랐고, 가장 최근에는 정지택 전 두산중공업 부회장이 총재직을 수행했다. 경제 전문가였던 정 총재는 코로나19 대응 등 이런저런 구설에 오르면서 지난 2월 자진 사퇴했다.

정지택 총재 사임 이후 다급해진 것은 KBO 사무국과 구단들이었다. 정권 교체기에 정치인 낙하산 인사에 대한 부담도 있었다. 정치인 출신 총재의 경우 야구 자체에 집중하기보다는 향후 정치활동을 더 염두에 두고 활동한 전력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적 인맥이 있다고 해서 일련의 사건이 생길 경우 야구계의 바람막이가 돼주는 것도 아니었다. 일례로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때 국가대표 선수 발탁 문제로 선동열 대표팀 감독이 국정감사에까지 불려나갔는데, 정운찬 당시 총재는 오히려 정치권 편에 선 듯한 뉘앙스를 줬다. 야구계가 실망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98년에 정한 원칙대로 구단주들이 번갈아가며 총재를 맡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현재 야구단을 운영 중인 기업 오너 중에는 야구 자체에 관심이 없는 이가 꽤 된다. 또한 온라인 야구 커뮤니티 발달로 문제 발생 시 KBO 총재는 팬들 불만의 총알받이가 돼야 한다. ‘총재 구단’이라는 이유로 LG·두산 등은 심판 판정의 모호성이 있을 때 팬들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정치인과 경제인이 배제될 경우 선택의 폭은 좁아진다. 최초의 야구인 출신 KBO 총재 선임이 초읽기에 들어간 배경이다.

일단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선수협)와 일구회, 한국프로야구은퇴선수협회(한은회)는 3월14일 “현역 선수와 은퇴 선수를 대신해 허구연의 신임 총재 추대를 지지한다”는 공동 성명서를 냈다. 선수협·일구회·한은회는 성명서에서 “허구연 총재 후보는 선수·감독 출신으로 누구보다 현장 상황을 잘 이해한다. 선수와 현장을 중심으로 한 제도 개선과 야구인들의 권익 향상에도 힘써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구단 이기주의, 가장 먼저 풀어야 할 숙제

‘일하는 총재’로서의 허구연 총재 후보에 대한 기대치는 그만큼 높은 편이다. 하지만 KBO 총재는 메이저리그 커미셔너와 결이 약간 다르다. 메이저리그는 높은 중계권료와 물품 판매 수입으로 사무국이 구단들을 압박할 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모그룹 의존도가 높은 KBO리그는 사무국보다는 구단 논리대로 흘러간다. KBO 사무국이 야심 차게 준비한 통합 마케팅도 목소리 큰 구단들에 의해 좌절되기 일쑤였다. 동상이몽의 10개 구단 목소리를 하나로 통합하는 것조차 어려울 수 있다. 구단 이기주의는 허구연 총재 후보가 가장 먼저 풀어야 할 숙제다.

KBO리그는 현재 위기에 봉착해 있다. 도쿄올림픽 4위의 성적으로 팬들의 실망은 극에 달했고, 프로야구 시청률은 해마다 떨어지고 있다. 코로나19 탓에 2년간 정상적인 관중 유입이 없던 터라 일부 구단을 제외하고 구단 재정 상황도 악화됐다. 이래저래 돌파구를 마련해야 할 시점이다.

허구연 총재 후보는 누구보다 야구에 관해 가장 많이 아는 전문가다. 스스로도 “재임 동안 야구 발전을 위한 중장기 플랜을 만들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구단들 도움 없이는 ‘일하는 총재’도 공염불에 그칠 공산이 크다. 한 원로 야구인은 “지금은 프로야구가 죽느냐, 사느냐 갈림길에 있다. 10개 구단이 허구연 총재 후보가 자신이 뜻한 바대로 열심히 일할 수 있게끔 도와줘야만 야구의 미래가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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