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너 시대 가고 전문경영인 전성시대 오나
  • 오종탁 기자 (amos@sisajournal.com)
  • 승인 2022.03.24 10:00
  • 호수 169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삼성·미래에셋·교촌·퍼시스 등 전문경영인에게 회장직 주며 힘 실어
일각에선 “오너 소유 구조 불변, 전문성·투명성 제고까지 갈 길 멀다”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겸 SK그룹 회장은 지난해 공개 석상에서 “우리나라도 차차 전문경영인 체제로 바뀔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가족경영 중심인 재벌그룹들이 해외 주요 선진국 기업들처럼 전문경영인 체제로 전환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재계 일각에서는 ‘국내 현실과 맞지 않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지만, 최근 분위기를 보면 전문경영인의 약진이 확연히 두드러진다. 새로운 환경 속에서 전문경영인 전성시대가 활짝 열린 것일까. 

시사저널 취재를 종합한 결과, 현재 재계에선 전문경영인이 단순히 오너의 리더십을 보완하는 역할을 넘어 그룹을 실질적으로 이끄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가장 선명한 부분은 바로 ‘회장’ 직함을 단 전문경영인의 증가다. 

ⓒ연합뉴스

늘어나는 ‘월급쟁이 회장님’

최현만 미래에셋증권 회장은 올해 ‘신성장동력 발굴 및 추진’ ‘고객·사회와의 동반성장’ ‘글로벌 톱티어 투자은행(IB) 도약’ 등 미래에셋그룹 전체를 아우르는 목표를 제시하며 경영 고삐를 바짝 죄고 있다. 최 회장은 지난해 12월 수석부회장에서 회장으로 승진했다. 국내 금융투자업계에서 전문경영인이 회장 자리에 오른 건 처음이었다. 미래에셋 창업 멤버인 최 회장은 미래에셋의 주요 계열사인 증권과 자산운용, 생명, 캐피털 등에서 최고경영자(CEO)를 역임했다. 2016년에는 미래에셋증권과 대우증권의 통합을 진두지휘했다. 그가 25년 동안 미래에셋그룹 성장에 기여한 점을 인정받아 회장이 됐다고 미래에셋 측은 밝혔다. 

이로써 미래에셋에는 오너인 박현주 미래에셋증권 홍콩법인 회장 겸 글로벌경영전략고문(GISO)과 함께 회장 직함을 가진 임원이 두 명이 됐다. 미래에셋 관계자는 해당 인사에 대해 “전문경영인들이 회사를 이끄는 역동적인 문화를 갖춘 미래에셋을 만들어가겠다는 박현주 회장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며 “계열사별로 전문경영인 체제를 구축해 독립경영을 강화해 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미 미래에셋은 지난해 11월 전면적인 조직개편으로 전문경영인 체제 구축을 본격화했다. 당시 50대 초중반 임원들을 부회장으로 승진시키는 파격 인사를 단행했다. 향후 증권뿐 아니라 다른 계열사에서도 전문경영인 출신 회장이 나올 전망이다. 

재계 1위 삼성그룹에는 회장이 1명인데, 오너 일가가 아니다. 주인공인 김기남 삼성전자 종합기술원 회장은 지난해 12월 삼성전자 DS(디바이스솔루션) 부문 부회장에서 회장으로 승진하며 다른 업무를 맡게 됐다. 회사 경영의 최전선에서는 물러났지만, 반도체 사업의 역대 최대 실적과 글로벌 1위 도약 등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최고위 직급에 올랐다. 현재 그는 삼성전자 종합기술원에서 인공지능(AI), 차세대 컴퓨팅 플랫폼, 첨단 소프트웨어 등 미래 혁신기술 개발을 총괄하고 있다. 

지금껏 삼성에서 오너 일가를 제외하고 회장직에 오른 인물은 김 회장을 비롯해 8명이다. 김 회장 이전에는 권오현 전 삼성전자 종합기술원 회장, 강진구 전 삼성전자·삼성전기 회장, 박기석 전 삼성종합건설 회장, 이수빈 전 삼성증권 회장, 김광호 전 삼성그룹 미주본사 회장, 임관 전 삼성종합기술원 회장, 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 등이 있었다. 

ⓒ연합뉴스
ⓒ연합뉴스

2선으로 물러난 중견기업 오너들 

세간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아온 이재용 부회장의 회장 승진은 또 차후로 미뤄졌다. 이 부회장은 2018년 2월 국정농단 사건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석방된 후 같은 해 5월 공정거래위원회의 대기업집단 동일인 지정에 따라 공식적으로 삼성 총수에 올랐다. 인사나 경영 전략 측면에서 이 부회장의 ‘뉴 삼성’ 비전이 구체화하고 있는 반면 회장 승진은 감감무소식이다. 이런 가운데 삼성전자는 기존 부사장과 전무의 임원 직급을 모두 부사장으로 통일하고, 임직원 승진 시 직급별 체류기간을 폐지하는 인사제도 혁신안을 발표했다. 능력 있는 30대 임원과 40대 CEO 발탁을 가능케 한, ‘전문경영인 저변 확대’ 플랜이라 할 수 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이 부회장이 ‘자녀에게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선포한 이후 그룹을 더 냉철한 성과주의에 기반한 전문경영인 체제로 리뉴얼하고 있는 과정”이라고 해석했다. 

중견기업에서는 전문경영인 회장의 활약이 더욱 두드러진다. 국내 치킨 프랜차이즈 업계 1위 교촌치킨을 운영하는 교촌에프앤비는 2019년 4월 업계 최초로 경영권을 전문경영인에게 넘겼다. 교촌의 변화와 혁신을 위해 좀 더 투명하고 전문화된 경영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나온 결정이었다. 창업자 권원강 전 회장으로부터 회장 자리를 물려받은 이는 소진세 전 롯데그룹 사회공헌위원회 위원장이다. 소 회장은 40여 년간 롯데맨으로서 축적한 유통 노하우를 십분 발휘해 교촌의 체질을 개선했다. 덕분에 교촌은 2020년부터 매년 사상 최대 실적을 경신하고 있다. 소 회장은 매일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소유와 경영을 분리한 교촌의 선택은 창업자가 오랜 고민 끝에 내린 변화”라면서 “교촌은 30년간 빠르게 성장했지만 일하는 방식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측면이 있었다. 그간 업무 속도를 올리고 경영 관리 시스템을 대대적으로 개선하는 작업에 주력했다”고 전했다. 

가구 기업 퍼시스그룹은 2018년 12월 이종태 부회장을 회장으로 승진시켰다. 이 회장은 1985년 사원으로 퍼시스에 입사해 그룹 회장 자리에까지 올랐다. 퍼시스는 이 회장을 “남다른 성과와 혁신을 주도한 인재”라고 평가하며 “앞으로도 책임경영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가구업계 1위 한샘에선 2009년부터 전문경영인인 최양하 전 회장에게 회장직을 맡긴 바 있다. 최 전 회장 역시 1979년 한샘에 입사한 샐러리맨 출신이다. 회사 성장을 주도하는 그에게 창업자 조창걸 전 명예회장은 1994년 대표이사직과 함께 경영 전권을 이양했다. 최 전 회장의 리더십에 힘입어 한샘은 부엌과 가구, 종합 인테리어 분야에서 연이어 최고 기업이 됐다. 2019년 11월 최 전 회장이 25년 CEO 생활을 마무리하고 퇴임한 뒤에도 한샘은 전문경영인 강승수 전 회장에게 바통을 넘겼다. 한샘이 올해 1월 사모펀드 IMM프라이빗에쿼티에 인수되자 강 전 회장은 퇴진했다. 지금은 김진태 전 지오영그룹 총괄사장이 대표집행임원 직함으로 한샘을 이끌고 있다. 

 

“승계 전까지만 CEO 두는 사례도 많아” 

전문경영인 회장 체제를 택한 기업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키워드는 ‘전문성’과 ‘투명성’이다. 이를 위해 오너 일가의 영향력을 대폭 줄이는 모양새를 취하지만, 일부 다르게 판단될 여지도 있다. 금융투자업계 일각에서는 미래에셋 박현주 회장이 2018년 국내 사업에서 2선으로 물러나고, 애초 회장직을 한사코 고사했던 최현만 회장을 기어이 승진시킨 데는 여러 가지 포석이 깔려있다고 풀이한다. 대외적으로 밝힐 수 있는 지위에 있지 않아 익명을 요구한 한 증권사 간부는 “박 회장은 2인자를 두지 않는 경영 방식을 오랫동안 유지해 왔고, 최 회장도 오랜 기간 ‘보스’로 모신 박 회장에게 깍듯하다. 흔히 말하는 전문경영인의 책임경영이 실현될 여지는 크지 않다고 생각한다”면서 “지배구조 문제 등 골치 아픈 국내 리스크를 회피하고 오너로서의 권한과 영향력은 그대로 유지하려는 전략이 아니냐는 시선이 많다”고 지적했다. 

권원강 교촌에프앤비 회장은 경영권을 내려놓았던 결정을 3년 만에 번복하고 3월15일 사내이사 복귀 계획을 밝혀 화제를 모았다. 퇴임 직전 해에 친척의 갑질 논란이 불거졌던 과거가 소환되며 ‘전문경영인 체제 전환 선언이 잠깐의 자숙을 위한 도구에 불과했느냐’는 의문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됐다. 퍼시스그룹을 두고는 창업자 손동창 회장의 용퇴가 사실 손 회장 장남인 손태희 퍼시스 부사장으로의 경영 승계를 위한 사전 정지작업 격이란 해석이 끊이지 않는다. 그룹의 지배구조도 오너 2세 체제로의 전환에 대비해 2016년부터 개편해 왔다고 업계에선 파악하고 있다. 

이한상 고려대 경영대학 교수는 “오너가 복잡한 이슈를 피해 뒤에서 조용히 숨어있으면서 자녀로의 승계가 준비되기 전까지만 전문경영인을 두는 사례가 많다. 지배주주이면서 경영진에는 속하지 않고 이사회 의장으로 빠지거나, ‘숨은 오너’로 활동하는 재벌가 구성원도 있다”며 “아직 공고한 우리나라의 재벌 소유구조하에서 사실 가족경영 체제니 전문경영인 체제니 하는 논의 자체가 무의미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 중견기업 오너는 “LG생활건강(차석용 부회장), 한샘(최양하 전 회장) 등 전문경영인 기용의 성공 사례가 분명히 있고 전문경영인의 비중이 과거에 비해 늘어난 건 맞지만 기업, 특히 중견기업 이하 회사들 입장에선 능력 있는 전문경영인을 구하거나, 급변하는 경제 환경 속에서 전문경영인이 당장 실적을 내지 못하더라도 기다려주기 어려운 게 사실”이라며 “전문경영인 회장이 등장하는 건 경영 선진화 측면에서 고무적인 일이나, 좀 더 지켜봐야 이것이 근본적인 변화 추세인지 일시적인 현상인지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상자기사] 대기업 CEO 10명 중 8명이 전문경영인…오너 일가 줄어 

국내 대기업 대표이사 가운데 오너 일가가 차지하는 비중이 최근 10년간 대폭 줄어든 대신 전문경영인 비중은 늘어난 것으로 조사됐다. 

기업데이터연구소 CEO스코어가 2012~22년 국내 500대 기업 중 조사가 가능한 411개 기업의 대표이사 출신을 조사한 결과 올해 기준 이들 기업의 대표이사 총 563명 중 오너 일가는 16%, 전문경영인은 84%로 각각 나타났다. 오너 일가는 2012년 147명(26%)에서 올해는 90명으로 감소했고, 전문경영인은 418명(74%)에서 473명으로 증가했다. 업종별로는 건설·건자재(-10명), 석유화학(-9명), 유통(-7명), 전기·전자(-6명), 철강(-6명) 등 13개 업종에서 오너 일가 수가 줄어들었다. 늘어난 업종은 서비스 업종뿐이었다. 

전문경영인들의 출신 분야를 보면 재무·회계를 담당했던 전문경영인 수가 2012년 34명에서 2022년 73명으로 2배 이상 늘어났다. CEO스코어 관계자는 “글로벌 업황이 저성장 국면에 접어들면서 기업들이 신사업 등 성장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안정적인 재무 관리에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인물을 대거 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면서 “또한 2·3세로 경영권이 넘어가는 과정에 대비한 포석으로 해석할 수 있는 측면도 있다”고 분석했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