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절친’ 슈뢰더 전 총리도 빈손으로 돌아와…독일 사회 실망
  • 클레어함 유럽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03.23 07:30
  • 호수 16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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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 침공 이후 그에 대한 역할 기대와 강한 비판 공존
모스크바서 푸틴 직접 만났지만 ‘평화 중재 노력’ 실패

국제사회에서 큰 기대를 모았던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전 총리(77)의 우크라이나-러시아 양국 간 평화 중재 노력이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슈뢰더 전 총리는 최근 모스크바를 방문해 직접 푸틴과 만남을 가진 바 있다. 유럽 유력 정치인 중 푸틴과의 친분이 각별한 인물이었기에 세계는 우크라이나 전쟁 중단에 대한 일말의 희망을 가졌다. 특히 미하일 로스 독일연방의회 외교위원장은 공영방송 ZDF와의 인터뷰에서 “평화를 위해 모든 기회를 다 사용해야 한다. 게르하르트 슈뢰더나 다른 특정인에 관한 것이 아니라 우크라이나 국민을 위해서이고, (슈뢰더에게) 행운을 빈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측에서는 이미 실망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최근 슈뢰더 전 총리가 양국의 중재에 나서야 한다고 제안했던 안드리 멜리니크 주독일 우크라이나 대사는 그의 노력은 실패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독일 최대 통신사 dpa를 통해 “이 평화 중재 노력은 슈뢰더 전 총리 스스로 제안한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결과에 대해 희망을 가졌었다고 말했다. 멜리니크 대사에 따르면 슈뢰더 전 총리는 푸틴과의 모스크바 미팅 결과에 대해 3월13일 우크라이나 측 중재인에게 직접 알렸다.

멜리니크 대사는 “그러나 전혀 소용없는 결과였다. 우리가 러시아 측과의 회담을 통해 이미 알고 있던 것 외에 새로운 것은 없었다”며 “이제 이 문제는 확실히 결판이 났다. 앞으로 슈뢰더의 추후 미팅은 우크라이나에 의미가 없다고 본다”고 판단했다. 또한 “이 기회가 낭비된 것이 아쉽고, 상황이 틀어진 것을 보니 슬프다”며 이를 “비극”이라고 규정했다. 독일 정부는 슈뢰더 전 총리의 평화 중재 계획에 대해 사전에 통보받지 못했다고 밝힌 바 있으며, 올라프 슐츠 총리는 베르사유에서 열린 EU 정상회담에서 이에 관한 언급을 거부했다.

ⓒAP연합
2018년 5월7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축하 인사차 방문한 슈뢰더 전 독일 총리와 악수하고 있다.ⓒAP연합

사민당, 슈뢰더 전 총리 제명 요청하기도

2월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독일 사회에서는 푸틴과 관계가 깊은 슈뢰더 전 총리에 대한 역할 기대와 강한 비판이 공존해 왔다. 사민당 출신 슈뢰더 전 총리(1998~2005년 재임)는 퇴임 이후 러시아 국영 최대 에너지 회사인 가스프롬의 노드스트림 담당 자문위원장직을 맡았고, 현재는 정유회사 로스네프트의 이사회 의장도 맡으면서 돈독한 비즈니스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전쟁 발발 이후에도 경제제재를 받고 있는 이 회사의 직책을 아직 사임하지 않고 있어 독일 사회로부터 강력한 퇴사 압박을 받고 있다.

같은 사민당 소속 슐츠 총리는 그의 퇴사를 요청했고, 하이델베르크 사민당은 그의 제명을 신청했다. 독일축구협회(DFB) 등 다수의 기관은 그의 명예회원 자격을 박탈하고 있고, 노동자사회복지협회(AWO)는 ‘하인리히 알베르츠 평화상’도 회수했다. 슈뢰더가 자신의 고향인 하노버의 명예시민 자격을 자발적으로 반납한 것에 대한 NDR공영방송 보도를 보면, 대다수 시민은 이를 당연한 처사로 평가했다. 다만 한 여성은 “그를 이렇게 공격하는 것은 옳지 않다. 우리는 민주사회에 살고 있지 않다”는 반대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복수의 언론매체는 사설을 통해 “품위가 없다” “여론을 인식하지 못하고, 정치적 감각을 잃었다”며 비판하는 목소리가 다수다. 이뿐만 아니라 슈뢰더가 원색적인 코미디의 소재가 되고 있는 등 전반적인 여론은 결코 우호적이지 않다. 그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에는 러시아 화석연료 업계와의 관계에 대해 기후운동가들로부터 지탄을 받기도 했다.

슈뢰더 전 총리는 2월24일 비즈니스 네트워킹 소셜미디어 사이트인 ‘링크드인(LinkedIn)’에서 “러시아는 최대한 빨리 전쟁을 끝내 우크라이나 국민의 고통을 멈추게 해달라”면서도 동시에 “(러시아) 제재가 필요하더라도, 유럽과 러시아 간 정치경제적 관계 및 시민사회 간 교류를 완전히 단절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슈뢰더의 한국인 배우자 김소연씨도 소셜미디어에 “저는 저희 남편이, 사민당이나 독일축구협회 같은 단체의 최후통첩과 무관하게, 이 전쟁을 끝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을 믿는다”고 밝혔고, 부부 동반으로 모스크바 방문 당시에는 크렘린궁을 배경으로 기도하며 평화를 기원하는 메시지를 올리기도 했다.

ⓒ레어함
2월27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반전평화집회 모습. 한 시 민이 슈뢰더 전 총리 사무실 근처에서 ‘슈뢰더, 얼굴을 보 여주세요’라는 항의 문구를 가슴에 달고 시위하고 있다.ⓒ클레어함

러시아, ‘전쟁’ 대신 ‘특별군사작전’ 용어 사용

러시아 푸틴 정권의 2014년 크림반도 침공과 이번 우크라이나 선제공격은 1994년 체결된 ‘부다페스트안전보장각서’에 대한 명백한 위배라는 지적이 나온다. 우크라이나는 이 각서를 통해 핵 포기의 대가로 러시아·미국·영국으로부터 자국 주권과 영토에 대한 보장을 받았고, 미국으로부터 경제 지원을 약속받았다.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소련에 소속돼 있던 우크라이나·벨라루스·카자흐스탄 3국이 핵확산금지조약에 가입하는 과정에서 체결됐다.

재한 벨라루스 핵물리학자인 올렉 메텔리차는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소련이 개발하고 생산했던 거대한 규모의 핵무기가 우크라이나·벨라루스·카자흐스탄에 잔존했는데, 우크라이나만 세계 3위권에 해당하는 핵무기를 보유했었다”며 “미국은 ‘협력적 위협 감축(CTR)’ 프로그램을 통해 핵무기 감소 대가로 우크라이나에 막대한 경제 지원을 했고 우크라이나의 핵과학자와 기술자 4500여 명을 민간 직업으로 전환하는 데 1억8000만 달러의 비용을 지출했다. 핵무기는 모두 1996년까지 러시아에 이관됐다”고 설명했다. 또한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은 러시아가 약속을 깬 ‘부다페스트안전보장각서’를 재검토하겠다는 입장을 지난 2월 밝히기도 해 지역의 군사적 긴장이 더 고조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유엔난민기구(UNHCR)에 따르면 전쟁 발발 후 우크라이나 난민 수는 약 300만 명을 넘었고, 국경 부근 여성과 소녀의 인신매매 범죄도 보도되고 있다. 러시아 정부도 채무불이행으로 국가부도 위기에 놓였다. 러시아 가스에 크게 의존하는 유럽연합(EU) 국가들의 에너지 가격과 물가도 치솟는 가운데 전쟁에 대한 전망이 불투명한 분위기다. 이런 가운데 EU는 전쟁에 대한 허위정보를 양산하다는 이유로 러시아 관영매체 RT와 스푸트니크를 금지시키는 등 유례없이 적극적 대응을 하고 있다.

, 러시아 정부는 ‘전쟁’ 대신 ‘특별군사작전’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고, 전쟁에 대한 허위정보를 유통하면 최고 징역 15년에 처한다는 법도 통과시켰다. 전쟁 이후 자국 내 야권 성향 매체 및 200여 개 웹사이트를 폐쇄하고, 시민들의 인스타그램·트위터 및 페이스북 접근 등을 차단하는 등 초강경 대응을 하는 등 물리전 이외에도 전면적인 정보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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