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소비’ 공략하며 창업 정글에서 살아남은 젊은 영웅들
  • 오종탁 기자 (amos@sisajournal.com)
  • 승인 2022.03.29 10:00
  • 호수 16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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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환경·공익 등 저마다 가치 내세워 성공가도
MZ세대 입소문 타며 가치와 이윤 창출 ‘두 마리 토끼’ 잡아

코로나19 장기화로 글로벌 경제가 어두운 터널을 지나면서 기업들은 드라마틱한 변화를 겪었다. 웬만한 대·중견기업들이야 카운터펀치를 맞고 휘청이다가도 특유의 강한 맷집으로 다시 일어선 반면 중소기업 중엔 그로기 상태에 빠진 곳이 많다. 청년 세대도 마찬가지다. ‘끊긴 사다리’라든지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 같은 표현이 유행할 만큼 암담한 분위기가 팽배하다.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했던가. 팬데믹 이후 가치소비 트렌드가 확산하자, 이를 사업과 접목시킨 ‘MZ세대’(밀레니얼 세대+Z세대) 기업인들은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다. 

가치소비는 소비자가 가격과 기능, 브랜드 등에 좌우되지 않고 자신의 가치 판단을 기준으로 제품을 구매하는 소비 방식이다.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제품이 보이면 과감하게 지갑을 연다는 것이다. 가치소비의 중심에는 MZ세대를 사로잡은 벤처기업이 유독 많다. 그리고 그 기업들의 대표는 대부분 스스로도 가치소비를 하고 있는 젊은 세대다. 

동물을 착취해 만든 소재를 배제하는 비건(Vegan·동물성 소재 배제) 패션 브랜드 비건타이거는 2015년 양윤아 대표(40)가 설립했다. 비건타이거는 ‘크루얼티 프리(Cruelty Free)’라는 슬로건 아래 동물성 소재를 쓰지 않고 지속 가능한 대체 소재로 트렌드에 맞는 패션제품을 만든다. 더 나아가 수익금 일부를 동물보호단체에 기부하며 가치소비 브랜드로 확실히 각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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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건타이거·스탁키퍼·포인핸드 제공·시사저널 임준선

CEO부터 MZ세대…소비자와 가치 공유 

양 대표가 전자상거래 플랫폼 카페24를 통해 갓 사업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비건이란 개념은 패션업계에서 생소했다. 양 대표는 스스로를 ‘비건 문화를 선도하는 패션 디자이너’라고 정의하며 비건 패션을 알리기 위한 페스티벌을 1년에 두 번씩 열었다. 양 대표의 전략은 적중했다. 비건 페스티벌이 SNS를 통해 알려지면서 유명 연예인들의 협찬 요청이 잇따랐다. 모델 장윤주, 가수 선미, 방송인 전현무 등이 비건타이거의 옷을 입고 활동하자 비건 패션과 비건타이거에 대한 관심도가 급등했다. MBC 예능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의 ‘환불원정대’ 편에서 진행자 유재석이 입어 화제를 모았던 호랑이 프린트 셔츠도 비건타이거 제품이다. 저절로 홍보가 되며 매출이 고공행진했음은 물론이다.  

비건타이거의 주 고객은 가치소비에 열정적인 MZ세대다. 구매자 중 60%가 19~35세, 20%가 35~45세다. 양 대표 역시 MZ세대로서 고객들과 같은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 어릴 적부터 패션에 관심이 많았던 양 대표는 국제패션연구진흥원에서 패션디자인 과정을 밟은 뒤 5년여간 평범한 패션디자이너로 활동하다가 돌연 한 동물권 단체에 들어갔다. 착취당하는 동물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다. 양 대표는 동물권 단체에서 3년간 학대 고발 담당자로 일하며 동물 보호와 가치소비에 눈을 떴다. 패션업계 5년, 동물권 단체 3년 경험의 결정체가 바로 비건타이거다. 

비건타이거는 양 대표의 별명이기도 하다. 평소 마음이 끌리는 곳이 있으면 불같은 추진력으로 도전하는 그를 보고 친구가 ‘채식하는 호랑이’라고 불렀다. 비건타이거는 국내에서의 성과를 바탕으로 해외시장 진출도 적극적으로 노리고 있다. 양 대표는 “환경이나 동물에 관심이 있어 비건 패션을 선택하는 사람뿐 아니라 패션을 좋아하고 트렌드에 민감한 일반 소비자도 유입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서 “비건타이거를 글로벌 패션 브랜드로 성장시키는 게 궁극적인 목표”라고 했다. 

이환희 포인핸드 대표(37)는 국내 최대 유기동물 입양 플랫폼 포인핸드를 9년째 이끌어오고 있다. 포인핸드는 전국 유기동물보호소에 들어온 동물들의 정보를 실시간으로 제공하는 애플리케이션이다. 매년 국내에서 입양되는 유기동물의 절반에 해당하는 1만 마리가량이 이 앱을 통한다. 현재 누적 다운로드 수 100만 건을 넘어섰고, 하루 이용자는 8만 명에 이른다. 

비건타이거의 인기 제품인 호랑이 프린트 셔츠ⓒ비건타이거 제공

공익과 이익 두 마리 토끼 잡아 

수의사인 이 대표는 공중방역수의사로 군 대체복무를 하던 2013년 꼬박 2개월간 퇴근 후 시간을 쪼개 앱을 만들었다. 대체복무를 마친 그는 2016년 4월부터 서울의 한 동물병원에서 낮에는 수의사로, 밤에는 포인핸드 운영자로 일했다. 이듬해 사용자가 10만 명을 넘어서는 등 규모가 커지자 병원에 사직서를 냈다. ‘지금이 아니면 이 일을 할 수 없겠다’는 강한 끌림이 느껴져서다. 5000만원짜리 마이너스 통장을 뚫어 본격적으로 시작한 사업은 이제 공익성과 수익성이란 두 마리 토끼를 잡으며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포인핸드는 2018년 1월부터 관련 상품(굿즈) 판매를 시작했다. 지난해엔 온라인 쇼핑몰인 포인핸드몰도 열었다. 소셜벤처지만 기업으로서 존립하려면 이윤 창출이 필요했다. 포인핸드의 수익사업에 대해 ‘반려동물 입양 문화 정착이란 본래 목표에서 멀어지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 적도 있으나 잠시였다. 포인핸드는 굿즈 기획 단계에서부터 지나치게 상업성을 띠지 않도록 고심하고, 수익은 꾸준히 환원하는 등 노력을 통해 소비자들의 신뢰를 얻었다. 

이 대표는 “단순 판매를 위한 제품은 제작하지 않는 걸 원칙으로 하고 있다. 소비자들이 가치소비에 의미를 두고 굿즈를 구매하기에 이윤 추구에 천착해선 안 된다”며 “캠페인을 먼저 기획하고, 그 캠페인의 메시지를 직간접적으로 담기 위해 기획 과정에 시간을 많이 쏟는다. 특히 ‘반려동물 입양은 가족을 입양하는 것과 같다’는 슬로건을 담은 굿즈를 지속적으로 판매해 왔다”고 전했다. 

포인핸드몰에서 최근 선보인 맨투맨 티셔츠의 경우 3차 생산분까지 며칠 만에 완판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유기동물 입양 문화를 확산하기 위해 발행한 포인핸드 매거진 11호의 크라우드펀딩은 3일 만에 목표치 100%를 달성했다. 이 대표는 “수익금 일부를 입양카페, 유기동물 보호시설 등에 기부할 때도 우리가 만들어가는 올바른 입양 문화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명확한 기준과 원칙을 갖고 집행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3월8일 경기도 성남의 사회복지시설 안나의 집 주방에 소갈비 800kg이 도착했다. 핀테크 기업 스탁키퍼의 안재현 대표(36)가 무료급식 식재료로 써달라며 기부한 것이었다. 안나의 집 대표인 김하종 신부(65)는 SNS에 안 대표의 사진을 올리며 “취약계층에 한 끼 식사로 갈비탕을 대접하려면 200kg의 갈비가 필요한데, 후원 덕분에 네 번이나 갈비탕을 준비할 수 있게 됐다”며 감사를 표시했다. 

ⓒ스탁키퍼 제공
스탁키퍼의 뱅카우 서비스ⓒ스탁키퍼 제공

수익에 ‘시장 선순환’ 가치 더하자 투자 밀려들어 

안 대표가 운영하는 스탁키퍼는 2020년 10월 농가와 투자자를 연결해 최소 금액 4만원으로 송아지의 소유권 일부를 살 수 있는 플랫폼인 뱅카우를 출시했다. 농가가 한우 1마리를 사육하려면 최소 800만원이 든다고 알려져 있다. 높은 비용과 자금 조달 문제로 인해 농가는 사육 두수를 쉽사리 늘리지 못한다. 생산량이 정체된 상황에서 수요는 늘어나니 한우 가격은 날로 상승했다. 

안 대표는 경기도 여주에서 한우 목장을 하는 어머니가 이런 문제를 겪는 것을 보고 사업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됐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한화에서 ‘상사맨’으로 일하던 그는 저축금을 어머니 목장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2018년 3월부터 매달 1마리씩 400만원 상당의 송아지를 사서 어머니 목장에 넣어줬고, 어머니는 안 대표가 투자한 소를 24~30개월 동안 전문적으로 키웠다. 안 대표의 투자로 2020년부터 출하되기 시작한 한우는 30마리였다. 800만원을 들여 키운 한우 1마리는 1000만원 이상에 팔린다. 결과적으로 안 대표가 얻은 수익률은 평균 35%, 최대 52%에 이르렀다. 

한우 투자시장의 잠재력을 알아본 안 대표는 2019년 퇴사 후 스탁키퍼를 설립했다. 스탁키퍼의 플랫폼 뱅카우는 지금껏 네 번의 크라우드펀딩을 성공적으로 진행했다. 1차에서 290명이 9918만원, 2차에서 614명이 1억8912만원, 3차에서 462명이 1억5300만원, 4차에서 1538명이 5억4042만원을 투자했다. 농가 6곳에서 200마리의 한우 사육이 시작됐고, 첫 수익은 올해 말쯤 나올 전망이다. 안정적이고 높은 수익이 기대되는 투자를 하면서 한우 가격 안정이라는 공익에도 보탬이 될 수 있는 뱅카우 크라우드펀딩에는 20~40대 MZ세대가 대거 몰렸다. 

안 대표는 한우 시장 선순환과 더불어 나눔의 가치를 전파하는 일에도 열정적으로 나선다. 기회가 닿을 때마다 각종 사회복지시설에 소고기를 기부하며 스탁키퍼의 지향점이 수익 추구에만 있지 않음을 알리고 있다. 

패션 액세서리 브랜드 델릭서의 이상봉 대표(30)는 2019년 회사를 설립해 2021년부터 본격적으로 가치소비 마케팅을 펼쳐왔다. 델릭서 제품에는 ‘유기동물 후원 기부’라는 문구가 쓰여있다. 매출의 일부도 유기동물 보호단체에 기부하며 MZ세대, 특히 10·20대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 고객 중 70%가 1020세대다. 온라인에서 입소문을 타고 연예인들의 제품 착용도 이어지면서 올해 1월 기준 델릭서 온라인 쇼핑몰의 누적 회원 수는 지난해보다 8배, 방문자 수는 17배 급증했다. 

이 대표는 가치소비 마케팅을 펼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직접 대구, 일산, 파주 등에 위치한 유기동물 보호시설을 방문해 동물을 돌보고 사육 환경을 개선하는 봉사활동에 참여한다. 대학생 때부터 기부단체에 정기적으로 후원을 하고, 봉사활동을 해온 그의 경험이 델릭서의 창업과 운영 과정에 녹아있다. 아울러 델릭서는 SNS를 통해 봉사 관련 콘텐츠를 꾸준히 게시한다. 많은 소비자가 델릭서가 추구하는 가치에 공감하고, 그 공감을 통해 사회가 좀 더 나아질 수 있도록 하는 게 이 대표와 델릭서의 목표다. 

ⓒ롯데칠성음료·현대백화점 제공
롯데칠성음료 ‘아이시스’의 무라벨 제품(왼쪽)과 현대백화점이 도입한 친환경 쇼핑백ⓒ롯데칠성음료·현대백화점 제공

■ 대형 유통사도 “가치소비 잡아라” 

가치소비 트렌드가 확산함에 따라 대형 유통사들도 관련 마케팅에 더욱 집중하는 모습이다. 

롯데칠성음료는 올해 들어 제품의 생산 단계에서부터 재활용과 자원 순환을 도모하는 등 가치소비 트렌드에 발맞춘 경영전략을 펴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기존 대비 약 20% 무게를 줄인 생수 페트병 경량화와 대표 생수 브랜드 ‘아이시스 8.0’의 무라벨 제품군 확대를 추진 중이다. 

지난해 롯데칠성음료의 무라벨 생수 제품 판매량은 2억9000만 개(2425만 상자)로 전년보다 1670% 증가했다. 롯데칠성음료가 2020년 1월 국내 최초로 선보인 무라벨 생수는 플라스틱 라벨 사용량과 라벨을 떼어내는 번거로움은 줄이고 분리배출 편의성과 페트병 재활용률은 높인 친환경 제품이다. 

현대백화점은 지난 2월부터 매장에서 제공하는 쇼핑백을 100% 재생 용지로 만든 친환경 제품으로 교체했다. 격식을 차려온 백화점업계가 식품관이 아닌 매장에서 제공하는 쇼핑백을 100% 재생 용지로 전면 교체한 것은 사실상 처음이다. 

연간 800만 장가량 사용되는 쇼핑백을 모두 친환경으로 교체하면 나무 1만3200그루를 보호하고 이산화탄소 배출량도 3298t 정도 절감할 수 있을 것으로 현대백화점은 추산하고 있다. 현대백화점은 친환경 쇼핑백을 개발하기 위해 지난해 2월부터 서울대 산학연구팀, 강원대 제지공학과, 페이퍼 코리아 등 외부 전문기관과 머리를 맞댔다. 

편의점 기업 CU는 소셜벤처 끌림과 손잡고 수제맥주 판매 수익금 일부를 활용해 자원 수집 리어카를 지원하는 공익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끌림은 2016년부터 자체 개발한 경량형 리어카에 광고판을 부착해 얻은 광고 수입을 재활용 자원 수집 어르신에게 제공해 왔다. 캠페인을 통해 CU는 수도권, 충청도, 전라도 등에서 활동하는 총 26명의 재활용 자원 수집 어르신의 리어카에 광고를 싣게 된다. 이에 대해 박정권 BGF리테일 커뮤니케이션실장은 “고객의 가치소비가 어려운 이웃은 물론 지역 경제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했다. 

CJ온스타일(CJ ENM 커머스부문)은 3월22일 생활용품 전문 브랜드 생활공작소에 대한 투자계획을 밝혔다. 이번 투자를 계기로 생활공작소에서 출시되는 신제품과 인기 제품을 CJ온스타일 내에서 소개하는 한편 향후 친환경 가치소비에 주목한 공동 상품을 개발하는 등 협업할 예정이다. 

이 밖에 신세계면세점은 최근 본점 매장 개편 과정에서 비건 및 클린뷰티(인체에 유해한 성분을 배제한 화장품) 브랜드를 대거 선보였다. 위메프도 유기농·천연재료 립밤·립스틱 브랜드인 율립과 함께 캠페인 영상을 제작하고 립밤 재고분을 크레용으로 재활용(업사이클링)한 사은품을 제품 구매 고객에게 선착순으로 제공했다. 

김형종 현대백화점 사장은 “환경보호와 자원 재순환이 점차 중요해지는 만큼 기업이 진정성과 지속 가능성을 갖춘 친환경 경영활동에 적극 나서야 한다”며 “앞으로도 다양한 친환경 활동과 지원 사업을 이어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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