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지, ‘K팝의 광폭 질주’ 길을 열다
  • 하재근 문화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04.02 11:00
  • 호수 16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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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와 아이들 데뷔 30주년…《난 알아요》로 1990년대 문화 흐름 뒤바꿔놔

1992년 3월, 서태지와 아이들 1집이 발표됐다. 올해는 데뷔 30주년이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설계자는 서태지였는데, 그의 기획에 의해 1990년대 가요계가 형성됐고 그 흐름이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이렇게 판 전체를 규정하고 오랜 세월 영향력을 유지한 뮤지션은 그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태지 신드롬이 한국 사회의 특수한 맥락 속에서 가능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1990년대는 물리적으로 1990년에 시작됐지만 문화적으로는 서태지와 아이들에 의해 1992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1990년대 문화 르네상스다. 그 1990년대의 판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지금은 ‘장기 1990년대’라 할 만하다. 그 거대한 흐름의 물꼬를 서태지가 열었다. 

ⓒ스타채널 제공
ⓒ스타채널 제공

원래부터 음악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던 것일까? 서태지의 셋째 할아버지가 정희석 전 연세대 음대학장이다. 중학교 때 음악에 빠지면서 학교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다. 중3 때는 단체기합에 반항하며 교실을 뛰쳐나간 적도 있다. 이 당시 들국화, 머틀리 크루, 본 조비 같은 밴드들을 좋아했다고 한다. 2004년 서태지가 주도한 록페스티벌인 이티피 페스트에서 머틀리 크루의 드러머 타미 리를 초청해 ‘성덕’(성공한 덕후)이 됐다. 

서울북공고 진학 후 인생 진로를 음악으로 정한 서태지는 결국 자퇴하고 만다. 당시 연예인, 특히 가수를 ‘딴따라’라고 천시하는 풍토인데도 2개월에 걸친 설득 끝에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냈다. 그 후 시나위 공연을 보러 언더그라운드 클럽에 출근하다시피 하다가 신대철의 눈에 띄어 일약 시나위 베이스기타 연주자가 됐다. 시나위는 당시 한국 최고의 헤비메탈 밴드였다. 

1994년 8월16일 서태지와 아이들 공연 모습ⓒ스타채널 제공
서태지와 아이들ⓒ스타채널 제공
1996년 1월31일 서태지와 아이들이 은퇴 선언을 하고 있다.ⓒ동아일보

딴따라로 천시받던 뮤지션의 위상도 확립 

하지만 곧 해체됐는데 보컬인 김종서는 다른 기획사에서 영입했지만 서태지는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그러다 록음악과 별도로 랩음악에도 심취했던 음악적 배경을 살려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게 됐다. 어머니가 넣어주는 밥을 먹으면서 6개월간 방에서 랩 연습과 컴퓨터 음악 작곡 공부에 매진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당시 이태원 문나이트의 대표적인 춤꾼 출신인 양현석과 이주노를 만나 서태지와 아이들을 결성했다. 

이렇게 본다면 서태지와 아이들에게는 그때까지 한국에서 이뤄졌던 여러 음악적 서구화 과정이 집결됐다고 할 수 있다. 들국화로 대표되는 언더그라운드의 흐름, 시나위가 정점을 찍은 헤비메탈, 문나이트의 미국 흑인음악과 댄스음악이다. 그 각각의 흐름이 1980년대를 거쳐 성장하면서 FM라디오를 통해 젊은 세대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김완선, 박남정, 현진영 같은 댄스 스타도 등장했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 가요계의 주류는 압도적으로 트로트와 발라드였다. 댄스음악도 완전히 서구적인 느낌은 아니었다. 당시까지는 한국어로 제대로 된 랩을 할 수 없다는 게 정설이었다. 한국어 랩이 왜 불가능한지를 설명하는 얼핏 그럴듯해 보이는 이론들도 회자됐다. 특히 록음악과 댄스음악은 서로 상극이어서 이 둘이 만난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다. 음악의 질 자체가 팝과 완전히 달라, 나이트클럽에서 모르는 노래가 나와도 전주만 듣고 가요인지 팝인지 구분할 수 있었다. 1992년 즈음에 인기곡은 김정수의 《당신》, 신승훈의 《보이지 않는 사랑》, 양수경의 《사랑은 차가운 유혹》 등이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가 등장했다.  

《난 알아요》는 가요 역사상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노래일 것이다. 이 한 곡을 기점으로 가요계가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기성 가요인들이 이 노래를 저평가했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다. 1992년 4월 11일, 임백천이 진행했던 MBC 《특종! TV연예》 첫 회의 신인 발굴 코너에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했다. 당시 패널들이 혹평했다고 알려졌는데, 사실은 혹평까진 아니고 미지근한 반응 정도였다. 하지만 이것이 기록적으로 뜨거웠던 대중의 반응과 너무나 대비됐기 때문에 혹평했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서태지에 대한 기성세대 반응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회자됐다. 

한국은 유례없는 압축성장의 나라다. 그것은 세대 차이도 유례없는 수준이라는 걸 뜻한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는 문화적으로 전혀 다른 세상에 살았다. 젊은이들은 점점 서구문화를 따라갔고 그럴 때마다 기성세대는 ‘말세야 말세’라며 탄식했다. 해방 후에 패티김 등이 일차적으로 서구화를 주도했고, 1970년대 청년문화가 한발 더 나갔다. 정권은 장발, 퇴폐, 대마초를 이슈로 탄압했다. 

2000년 8월29일 귀국하는 서태지를 맞이하는 팬들로 가득 찬 김포공항ⓒ시사저널 임준선
9월14일 서태지가 서울 정동 A&C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시사저널 임준선

《난 알아요》 이후 10·20대가 가요계 점령  

1980년대 정치적으론 억압하지만 문화적으론 일부분 풀어주는 전두환 정권의 정책 기조, 3저 호황 경제성장에 따른 여유, FM라디오 확산 등으로 서구화는 더욱 거침없이 진군했다. 어차피 우리 현대화는 바로 서구화였고, 미국이 우리 맹방이자 롤모델이었기 때문에 서구화·미국화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다. 이 흐름에 화룡점정을 찍은 것이 1980년대 말 민주화다. 

1980년대 서구화의 세례를 받은 젊은 세대는 경제성장과 정치 자유가 이룩된 상황에서 자신들만의 새로운 소비문화를 찾았다. 이들은 서구문화를 실시간으로 받아들인 세대이기 때문에 당연히 더 서구적인, 특히 미국적인 것을 원했다. 이 젊은이들은 기성세대와 전혀 다른 행태를 보여 한국 사회에 충격을 줬고, 그래서 신세대 운운하는 세대론이 등장했다. 우리 사회는 이 이상한 신세대를 엑스세대라 명명했다. 

《난 알아요》는 바로 엑스세대가 원했던 새로운 음악, 서구적인 음악이었다. 20대 이상으로 자신들만의 새로운 문화를 찾던 10대들도 열광했다. 그 전에 뉴 키즈 온 더 블록이 인기를 끌었는데, 서태지와 아이들이 그 팝 아이돌을 완전히 대체했다. 이후 한국 10대들은 더 이상 팝 아이돌을 찾지 않게 됐다. 2000년대에 배철수는 “요즘 젊은이들이 팝송을 안 들어서 걱정이다”라고 하기에 이른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순식간에 엑스세대의 대표주자, 시대의 아이콘이 됐다. 이때 이후 ‘보는 음악’의 시대가 이어졌는데 미국에서 보는 음악의 시대를 연 마이클 잭슨은 ‘팝의 황제’로 불렸다. 서태지는 ‘문화 대통령’으로 불렸다. 보는 음악이라고 사운드가 빈약한 것도 아니어서 서태지 이후 나이트클럽에서 전주만 듣고는 팝송과 가요를 구분할 수 없게 됐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음반 제작은 서태지가 직접 지휘했다. 결국 그가 한국 가요의 사운드를 바꾼 셈이다. 《난 알아요》 이후 가요계는 10·20대가 완전히 점령한다. 이 구도는 《미스터 트롯》 중장년의 반격이 전개되기까지 30년 천하를 이어갔다. 

서태지와 아이들ⓒ스타채널
서태지가 2014년 10월20일 정규 9집 ‘콰이어 트 나이트’ 발매 관련 기자회견에 참 석한 모습ⓒ시사저널 임준선

K팝, 이제 세계가 즐기는 음악으로   

서태지는 2집에서 더욱 랩에 깊게 들어가는 한편, 록은 물론 국악까지 접목하는 실험을 감행했다. 바로 《하여가》다. 당시 주류 음악계에서 이 정도 실험을 할 만한 이는 서태지밖에 없었다. 이 곡마저 대히트를 치면서 가히 역사적인 규모의 팬덤이 형성됐고, 이것이 아이돌 팬덤의 시초가 됐다. 

3집에선 록음악을 더욱 강하게 내세우는 한편 사회적 발언까지 했다. 《발해를 꿈꾸며》와 《교실 이데아》다. 거친 록은 한국 기성사회가 기본적으로 불편하게 느끼는 음악이다. 그렇지 않아도 서태지 신드롬에 대한 반발이 있던 터에 록과 사회적 발언까지 나오자 백래시가 터졌다. 대표적인 것이 악마 논란이다. 서태지 노래에서 악마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황당한 논란이 번졌다. 

4집에선 힙합곡 《컴백홈》을 내세웠다. 이로써 서태지는 흑인음악과 댄스음악, 일렉트로닉이 기본 뼈대인 K팝의 원형을 완성했다. 여기에서 아이돌이 등장하고 한류가 터졌다. 그것이 바로 우리 가요계의 현대다. 서태지가 K팝과 현대의 출발인 것이다. 그 K팝이 지금은 지구촌 젊은이들의 새로운 음악언어가 됐다. 

서태지는 딴따라로 천시받던 뮤지션의 위상도 확립했다. 서태지 이전에 가수는 제대로 된 자기 몫을 정산받거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서태지는 절대 갑이었던 방송사에 자기주장을 할 정도로 권리를 하나하나 찾아나갔고 그것이 바로 한국에서 후배 뮤지션들이 누리는 권리가 됐다. 

서태지의 행보에 “거만하다” “유난을 떤다” 등 비난이 방송가와 일부 언론에서 쏟아지기도 했다. 바로 그렇게 기성사회와 충돌하며 거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문화 대통령이라고까지 불리게 된 것이다. 이 호칭이 정당한가에 대한 TV토론이 진행됐는데, 일개 연예인의 호칭을 놓고 TV토론까지 했다는 것 자체가 그가 왜 문화 대통령으로 불리는지를 보여준다. 

서태지는 사전심의제도 철폐에도 영향을 미쳤다. 4집에서 《시대유감》이 심의를 통과하지 못하자 항의의 뜻으로 가사를 모두 빼고 반주만 실었다. 그러자 팬들이 즉각 반발하고 정태춘 등의 운동이 합쳐져 마침내 사전심의제도가 폐지됐다. 새 앨범을 준비하는 동안 방송을 쉬는 관행도 그가 만들었다. 그 전까지 가수는 방송사의 부속품 같은 존재였다. 

앞에서 서태지 신드롬은 한국 사회의 특수한 맥락 속에서 가능했던 일이기 때문에 이런 일이 앞으로 또 나타나긴 어려울 거라고 했다. 우리 사회문화가 본격적으로 서구화하려는 딱 그 시점에 서구문화를 한국화한 이가 서태지이기 때문에 가요계 판을 규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이미 우리 문화의 서구화가 완료됐기 때문에 서구문화 수입으로 국가 문화계를 송두리째 뒤집어엎는 일이 또 생기진 않을 것이다. 바로 그래서 서태지가 유일무이한 문화 대통령이다. 

그랬던 서태지가 이제 30주년을 맞았다. 사실상 K팝 탄생 30주년이기도 하기 때문에 더 의미가 크다. 서태지는 한국 젊은이들이 팝송 아닌 한국 노래를 듣게 만들었고, 그 후예들은 세계의 젊은이들이 한국 노래를 듣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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