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켈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책임이 있을까
  • 이수민 독일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04.20 11:00
  • 호수 1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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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렌스키 우크라 대통령, ‘메르켈 전 독일 총리 책임론’ 제기…독일 여론은 양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대략 5주가 지난 4월초 우크라이나 대통령 볼로디미르 젤렌스키는 독일 전 총리 앙겔라 메르켈을 ‘공개 저격’했다. 그는 메르켈과 프랑스의 사르코지 전 대통령이 2008년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에 반대한 일을 시초로 독일 정부가 고수한 ‘친러시아’ 외교관계 때문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결과가 초래됐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대두된 메르켈 책임론은 독일 내 다양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메르켈은 대변인을 통해 당시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아울러 우크라이나 참상에 대해 독일 정부를 비롯한 국제기구들이 우크라이나 편에 설 것을 촉구했다.

이와는 반대로 2005~09년, 2013~17년에 외무부 장관을 맡았던 프랑크 발터 슈타인마이어 현 독일 대통령은 과거에 러시아를 잘못 봤다며 공영방송에서 사과했다. 독일은 현재 유럽을 지배하고 있는 전쟁에 대한 공포에 책임이 있는가. 독일인들은 이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취하는가.

독일 주류 매체에선 메르켈의 공식 입장 표명과 그에 이은 슈타인마이어의 사과에 대해 대체적으로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먼저 지적되는 바는 독일인들이 메르켈 정권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었다는 점이다. 작년 메르켈 사임 때만 해도 ‘애도’ 즉 그가 관직을 떠남으로써 한 나라가 좋은 수장을 잃는다는 느낌의 사회적 분위기가 팽배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독일의 문제점들이 하나씩 드러나며 현재는 그의 리더십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유명 주간지 슈피겔의 온라인 편집장 알렉산더 노이바허는 독일 연방군이 무용지물일 정도로 엉망인 상태와 러시아에 과하게 의존적인 독일의 에너지 정책(시사저널 1693호 참조) 등을 지적했다. 우크라이나 난민들이 독일에 도착하자마자 낙후된 인터넷 설비와 관료주의적으로 더디게 진행되는 일처리 등 독일의 후진적 시스템에 놀라는 상황까지 날카롭게 꼬집었다. 메르켈이 집권한 16년간 독일 사회가 이렇게 후퇴했으리라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 AP 연합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메르켈 책임 론’을 두고 독일 여론은 양분됐다. 독일에서는 우크라이나에 인도적 지원뿐만 아니라 무기를 지원해야 한다는 여론도 높다.ⓒ AP 연합

메르켈 정부 새롭게 바라보는 독일인들

메르켈을 두둔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그가 집권했던 시기에 국방비를 올리자는 주장은 야당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어차피 무산되었을 것이고,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의 청사진은 메르켈 정권이 아니라 그 이전 사민당 소속의 슈뢰더 정권에서 시작된 사업이라는 반박이다.

독일 신문 ‘쥐트도이체차이퉁’은 좀 더 원론적인 문제를 건드렸다. 결정을 내려야 하는 정치인에게 선택의 갈림길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해도 끝에는 후회가 있을 수 있다는 정치의 속성을 지적한 것이다. 아울러 메르켈의 사과가 요구되긴 하지만 이는 도덕적인 제스처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라고 반문한다. 물론 메르켈의 사과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정치인의 유감 표명은 실질적으로 현재 상황에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다.

독일의 다른 언론 매체인 베를리너차이퉁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사과가 소용없고 과거의 잘못을 되돌릴 수는 없을지라도 성찰과 반성이 있어야 하고, 그 결과를 현실에 재빨리 반영해야 하는데 그 역시 없다고 지적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노출된 독일의 낙후되고 후진적인 상태는 메르켈 정권이 특정 문제들에 대해 국민을 호도했기 때문이고, 국민 역시 정치에 대해 눈을 감은 ‘정치적 수면 상태’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라는 진단이다.

여기에 더해 메르켈을 계승한 숄츠 총리는 심지어 더 무력하다고 비판했다. 이웃 국가의 전쟁으로 인명 피해가 발생하는데도 국방력 지원 등 중대한 사안에 대해 필요한 순간에 결단을 제대로 내리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메르켈의 소속당인 기민당 대표 프리드리히 메르츠는 최근 독일 제2 공영방송에 출연해 ‘메르켈도 사과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현재 관직에 있지 않은 이들의 사과는 개인이 결정할 일”이라고 했다. 반면 사민당 소속인 현 국방부 장관 크리스티네 람프레히트에 대해서는 날 선 비판을 내놨다. 메르츠는 람프레히트 장관이 우크라이나 전쟁을 감당하기에는 그릇이 작고 부적합하다고 평가하며 ‘응급 처치’ 격으로 그 자리에 앉은 것이라고 말했다.

상대방에게 책임 미루는 독일 정치권

숄츠 총리에 대한 비판도 이어졌다. 우크라이나에 신속하게 무기를 제공해야 하는 상황에서, 전 국민이 이에 동의함에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유일하게 막고 있는 인물이 결정권자인 숄츠라며 총리로서 그의 능력에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러면서 현재 여당을 구성하는 신호등 연정 내각이 내부적으로 매우 불안정하고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는 견해를 내비쳤다.

메르츠의 언급에서도 엿볼 수 있듯 독일 정치권은 우크라이나 전쟁 책임을 상대 정당에 미루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예컨대 ‘독일 국방력이 왜 이렇게 낙후되었나’라는 질문에 ‘전쟁과 무기 없는 세상’을 모토로 삼았던 녹색당이 비난을 받는다. 녹색당 정치인들은 불과 몇 년 전에는 독재국가로 지정하고 교류를 중단했던 카타르 같은 국가와 에너지 수입계약을 맺으면 자신들의 신념을 버렸다는 비판을 받는다.

‘애초에 독일은 왜 러시아에서 그렇게 많은 에너지를 수입하게 되었나’라는 질문에는 노르트스트림 가스관 설치를 추진했던 사민당의 슈뢰더 내각에 비난의 화살이 돌아간다. 특히 지난 선거에서 대패를 경험한 좌파당은 다시 한번 고개를 들지 못하게 되었는데, 좌파당 주요 당원들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직전까지 러시아가 그럴 이유가 없다며 친러시아적인 입장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특히 그레고르 기지, 자라 바겐크네히트처럼 좌파당에서 잘 알려진 정치인들은 여전히 러시아를 완전히 배척하면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저격으로 세계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메르켈은 최근까지 이탈리아 여행을 하다가 급히 귀국했다. 자신에게 일정한 책임이 있을 수도 있는 전쟁이 진행 중인 와중에 한가로운 해외 휴가가 무슨 말이냐고 분개하는 시민들도 있지만, 은퇴한 정치인의 사생활이 전쟁과 무슨 상관이냐는 입장도 있다. 메르켈은 유럽 전역에 악영향을 끼친 전쟁에 책임이 있는가. 그는 더 이상의 공식 입장을 발표하지 않고 있다. SNS 여론을 살펴보면 그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독일인들의 의견은 분분해지고 있다. 메르켈 책임론에 대한 평가는 역사가 해줄 것이란 믿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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