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앵커》가 주시하는 세계
  •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04.19 15:00
  • 호수 1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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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심연을 들여다본 적이 있습니까

수면 아래에서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고고하게 헤엄치는 백조의 분주한 발, 쓰임새를 빼앗긴 채 진흙 속에 가라앉은 물건 같은 것들. 4월20일 개봉하는 《앵커》가 주시하는 세계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성공한 아나운서이자 방송국 간판 뉴스 프로그램을 책임지는 앵커 세라(천우희)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미스터리의 실체를 파헤친다. 겉보기에 세라의 상황은 안정적이다. 그에겐 사회적 지위와 자산 그리고 명예가 보장돼 있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파고들면 전혀 다른 풍경들이 보인다. 세라에게 벌어지는 일들은 그의 마음속 폐허를 들여다보기 위해 통과하는 일종의 진입로다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에이스메이커 제공
ⓒ에이스메이커 제공

모녀라는 관계, 욕망하는 여성

뉴스 생방송을 앞둔 보도국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신상을 밝힌 제보자는 세라를 지목해, 자신의 집에 무단으로 침입한 ‘그 사람’이 자신의 딸을 해쳤으며 이내 자신마저 죽일 것이라고 말한다. 다급해 보이는 상황 설명과는 달리 세라가 보도해 주면 기쁠 것이라고 덧붙이는 제보자의 말은 어딘가 신빙성이 떨어진다. 세라는 단순한 장난전화로 판단한 뒤 방송을 마치지만 개운치 않은 기분에 휩싸인다. 이야기를 전해 들은 세라의 어머니 소정(이혜영)은 “진짜 앵커가 될 기회”라며 직접 취재해 보라는 조언을 건넨다. 그날 밤, 홀로 제보자가 남긴 주소지를 방문한 세라는 죽어있는 모녀를 발견한다.

세라가 단독으로 취재해 내보낸 ‘지천동 모녀 살인 사건’은 곧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다. 방송국에서 세라에게 거는 기대는 점차 높아만 간다. 개편을 앞두고 후배들을 의식해야 하던 세라 역시 이것이 자신에게 좋은 기회임을 감지한다. 그러나 죽은 모녀를 눈앞에서 목격한 세라는 점차 환각에 시달린다. 사건 현장에서 마주친 제보자의 정신과 담당 의사 인호(신하균)의 행동도 미심쩍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수렁 속으로 빠져들던 세라는, 사건에 더 다가가기 위해 인호를 이용해 보기로 한다.

우연히 살인 사건에 얽혀든 주인공의 이야기인 듯 보였던 《앵커》는 세라가 최면치료를 받는 대목을 기점으로 극의 방향을 조금씩 튼다. 초반부는 사건의 미스터리가 조금씩 공개되는 동시에 방송국 내부 묘사들이 주를 이룬다. 메인 앵커로서 세라가 견뎌야 했던 견제와 시기, 특종 보도를 놓치지 않기 위해 사건에 조금씩 집착해 가는 모습이 펼쳐진다. 인호가 등장한 이후부터는 영화의 분위기가 심리극으로 옮겨간다. 감춰져 있던 세라의 복잡한 내면이 본격적으로 탐구되기 시작하고, 온전하게 보이지 않았던 세라와 어머니 사이의 갈등 역시 서서히 드러난다.

《앵커》의 핵심은 모녀라는 관계의 심연이다. 영화는 세상 그 어떤 존재보다 가깝게 피로 이어진 엄마와 딸이라는 세계를 낯설게 바라보기를 자처한다. 세라가 취재하는 모녀 살인 사건도 마찬가지다. 극 중에서 이 사건은 조현병을 앓던 엄마가 자녀 살해 후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밝혀진다. 실제 현실에서도 종종 보도되는 이 안타까운 사건은 홀로 출산과 양육을 책임져야 하는 여성들이 짊어진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를 극단적으로 시사한다. 실질적인 삶의 고통 앞에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향한 축복이나 신성한 모성 같은 개념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세상의 모든 출산과 육아가 행복이 될 순 없다.

세라에게 제보된 것이 하필이면 이런 사건인 이유가 있다. 앵커로 일하는 딸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엄마로 그려지는 소정의 사연까지 밝혀지는 대목에 다다라서야, 영화는 드러내고자 했던 진짜 얼굴을 보여준다. 《앵커》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신과 엄마로서의 삶 사이에 선 여성들의 서늘하고도 슬픈 이야기다. 개인의 욕망과 여성으로서의 상황에서 고전하고, 사회적 지위를 지켜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감수해야 하는지에 대한 사연이다. 어떤 이들에게 임신은 축복이 아니라 힘겹게 쌓아온 경력의 무덤이자 불행의 시작이다. 자녀 살해 후 자살 사건처럼 현실에서 분명 벌어지고 있는 일이지만, 상업영화의 영역에서는 활발하게 다뤄지지 않은 관점이기도 하다. 《앵커》의 시도가 반가운 이유다.

ⓒ에이스메이커 제공
ⓒ에이스메이커 제공

여성의 내면을 좇는 심리 스릴러

그간 한국 영화에서 스릴러의 단골 소재는 남성 조직 내 암투와 배신의 드라마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여성 주인공이 중심에 선다는 점, 사건에 집중하기보다 인물의 내면 자체를 탐험하듯 들여다보는 심리극이라는 점에서 《앵커》는 기존의 스릴러와는 다른 결을 입는다. 자신이 일군 커리어를 지켜내야 하는 여성의 분투라는 점에서 완벽을 향한 욕망이 광기 어린 집착으로 변해 가는 발레리나의 이야기인 《블랙 스완》(2010)을 떠오르게 하는 지점들도 있다.

아쉬운 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개별 장면의 디테일은 돋보이지만 사건과 인물들을 엮는 전체적인 연결이 아주 매끄럽지는 않다. 의아하게 여겨졌던 묘사들은 중반 이후부터 하나하나 퍼즐이 맞춰지는데, 조금은 기계적인 배치라는 인상도 남긴다. 반전의 장치들을 먼저 생각해 두고 이야기를 역으로 쓰면서 디테일을 고집한 시나리오가 아닐까 생각될 정도다. 여성이 겪는 중요한 사회적 이슈를 지적한 만큼 각본에서 좀 더 세심한 접근이 필요했다는 아쉬움도 남는다. 후반으로 갈수록 투박하고 설명적인 대목들이 눈에 띄어서다.

배우들의 연기는 각본과 연출에서 남는 아쉬움을 어느 정도 상쇄한다. 천우희는 앵커로서의 자부심과 불안, 어머니를 향한 사랑과 증오라는 양가감정을 계속해서 진동하는 세라를 통해 예리하고 섬세하게 연기한다. 《한공주》(2014), 《곡성》(2016), 《우상》(2019) 등 필모그래피에서 극단의 상황에 처한 인물들을 설득력 있게 표현해 내며 끝내 관객에게 가깝게 끌어다 앉힌 배우답다. 적재적소에서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배우 이혜영의 관록도 인상적이다. 납득 가능한 명분과 욕망을 지닌 여성 캐릭터들의 질주를 따라갈 수 있는 작품들이 한국 영화에는 여전히 더 많이 필요하다.

천우희의 기지개 시즌

《비와 당신의 이야기》(2021) 개봉 이후 한동안 소식이 뜸했던 천우희가 본격적인 활동의 기지개를 켠다. 《앵커》 이후 차기작을 줄줄이 선보이게 된 것이다. 코로나19 등으로 각 작품의 공개가 늦춰졌기 때문이다.

4월27일 개봉하는 김지훈 감독의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는 무려 5년 만에 공개되는 영화다. 한 국제중학교에서 벌어진 학교폭력 문제를 둘러싸고 권력과 재력을 이용해 사건을 덮으려는 가해자 부모들의 추악한 민낯을 그리는 영화다. 천우희는 담임교사 송정욱을 연기한다.

4월28일 티빙 오리지널로 공개되는 《전체관람가+: 숏버스터》는 여덟 편의 단편영화를 묶은 기획이다. 천우희는 이 중 배우 조현철이 연출과 주연을 겸한 《부스럭》에 출연한다. 한 커플의 이별 사유를 파헤치려다 미스터리한 일들에 휘말리는 세영 역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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